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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l 16. 2020

오를레앙의 처녀

차이콥스키의 잔 다르크

<예브게니 오네긴>을 마무리한 차이콥스키는 1878년 4월 새 오페라 작곡을 시작했다. 독일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오를레앙의 처녀Die Jungfrau von Orleans, 1801』가 밑그림이었다. 실러는 이 희곡을 죽기 4년 전에 완성했다. 그 뒤에 쓴 것은 『메시나의 신부』와 『빌헬름 텔』뿐이다. 그만큼 원숙기 작품이고, 독일어권에서 자주 상연된다. 100년 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의 이야기는 후대에 매우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로렌 지방 농부의 딸이던 잔이 의기소침한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맞서 싸우다 순교했다는 뼈대에 다양한 사료를 덧입힌 것이다.

수많은 독일 극장의 무대 가운데 빌레펠트 공연의 예고편

셰익스피어는 『헨리 6세』에서 그녀를 마녀로 그렸다. 200년이 지났지만, 적국 입장에서 잔 다르크를 온당하게 평가할 여지는 없었다. 같은 프랑스이지만 계몽주의자 볼테르에게도 맹목적인 신앙을 따른 그녀는 자아를 찾지 못한 인물이었고, 군중은 신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20세기 들어서도 잔 다르크를 향한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조지 버나드 쇼는 성직자를 거치지 않고 신과 직접 소통한 그녀를 프로테스탄트의 시초로 보았고, 성녀를 노조 지도자로 그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선도 지극히 그이답다. 모두 자기가 속한 세상에 전설의 인물을 투영한 결과이다.

잉그리드 버그먼과 싸워 이긴 밀라 요보비치. 존 말코비치를 왕으로 모신다. 둘 다 소련 사람 아님!

차이콥스키는 앞서 실러를 토대로 <조반나 다르코Giovanna d'Arco, 1845>를 작곡한 베르디와 경쟁한다. 두 사람 모두 원작자의 복잡한 에피소드를 걷어내 이야기를 간추렸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 솔레라의 대본에 전적으로 의존한 베르디가 범작을 내는 데 그친 반면, 바실리 주콥스키의 번역을 토대로 직접 대본을 만든 차이콥스키는 실러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했다.

안나 네트렙코를 성녀로 모신 라 스칼라 공연, 어서 마린스키로 돌아가 차이콥스키를 부르길...

실러가 만든 여러 가상의 인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영국 기사 라이오넬이다. 잔 다르크는 라이오넬을 사랑하게 되어, 이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성모의 계시를 어긴다. 실러를 통해 잔 다르크는 신의 뜻을 대리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신앙과 충돌하는 자신의 실존에 고민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베르디의 <조반나 다르코>에는 라이오넬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마귀와 결탁한 딸을 원망하는 아비와 나라를 일으킬 용기 없는 나약한 국왕,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뜬금없이 전사(戰死)하는 소녀가 있을 뿐이다. 잔 다르크가 모진 종교재판 끝에 화형 당한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말이다.


베르디를 깎아내리고 차이콥스키를 두둔하는 나를 두고 실상을 좀 아는 사람은 의아할 것이다. 오늘날 두 사람의 오페라 가운데 그나마 구해 듣기 좀 더 쉬운 쪽은 베르디이기 때문이다. 불세출의 스타가 된 안나 네트렙코가 라 스칼라에서 부른 <조반나 다르코>는 이 작품을 간과하던 베르디 팬들을 열광케 했다. 반면 <오를레앙의 처녀>은 음반으로나 영상으로 모두 구하기가 별따기이다. 그러나 <예브게니 오네긴>의 팬이라면 볼쇼이가 1993년 무대에 올린 공연을 꼭 찾아보기 바란다. 

볼쇼이 전막을 올려버린 유튜버, 정말 훌륭한 무대이다

들판에서 “그래, 때가 왔다Da, chas nastal!”며 정든 고향 산천에 이별을 고하는 차이콥스키의 잔 다르크는 바로 직전에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왔던 타티아나이다. 그녀는 잔 다르크 이야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에피소드를 통과한다. 곧 만조백관 사이에서 처음 보는 샤를 국왕을 알아맞히는 장면이다. 또 반신반의하는 국왕 앞에서 그가 간밤에 꾼 세 가지 꿈을 이야기한다. 이제 그녀를 믿지 않는 사람은 없다. 로렌의 십자가를 앞세운 군중은 승리를 외친다. 무대 위에서 굳이 전투를 그릴 필요도 없다.


본디 잔의 아버지 이름은 자크 다르크이다. 실러는 이를 티보라 고쳤다. 라 스칼라에서 다시 자코모로 바뀐 티보는 실성한 바빌로니아의 왕 나부코와 같다. 볼쇼이에서 티보로 돌아온 자크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등장인물처럼 보인다. 

볼쇼이 무대의 최후. <신들의 황혼> 마지막인 줄!

잔 다르크가 화형대에서 최후를 맞는 장면은 뭉클하다. 그녀는 하지 말아야 했던 사랑을 했으며, 남들보다 너무 앞서 진격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예브게니 오네긴>이 차이콥스키 자신의 상황을 담았던 것처럼 <오를레앙의 처녀>도 그의 이야기였다. 내 두둔만으로 작품이 살아나긴 버겁지만, 이탈리아 오페라 팬들은 만년의 미렐라 프레니가 누구보다 차이콥스키에 열중했으며, <예브게니 오네긴>이나 <스페이드의 여왕> 뿐만 아니라 <오를레앙의 처녀>에도 애정을 가졌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33:10부터). 절친했던 니콜라이 갸우로프와 2002년 모스크바에서...

다행히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코로나 19 전염 기간 중 객석을 비운 마린스키 갈라 콘서트에서 잔의 아리아를 예카테리나 세멘추크에게 부르게 했다. 마린스키의 전막 공연과 볼쇼이의 재공연이 경쟁하길 고대한다.

밀라 요보비치와 미모 대결하는 엘리나 가란차의 앨범 가운데

<오를레앙의 처녀>가 정당한 대접을 받는 것과 별개로, 차이콥스키의 경쟁작은 오래전에 나온 베르디의 <조반나 다르코>가 아니었다. 오페라가 초연된 1881년에 오펜바흐는 <호프만의 이야기>를, 무소륵스키는 <호반시치나>를 미완성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베르디는 <돈 카를로> 개작과 <시몬 보카네그라>에, 바그너는 최후의 대작 <파르지팔>에 매진했다. 물론 이런 작품들은 모두 차이콥스키 눈앞에서 당장 연주될 가능성은 없었다. 단지 당대의 수준이 그 정도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머지않아 선배 보로딘이 <이고르 공>을, 후배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눈 아가씨>를 내놓는다. 마흔을 갓 넘긴 차이콥스키가 그런 산들을 넘기 위해서는 ‘오를레앙 처녀’ 이상이 되어야 했다. 그는 다시 푸시킨으로 눈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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