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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n 29. 2020

오네긴은 몇 살인가?

차이콥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5)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은 몇 살인가? 푸시킨은 친절하게 다 밝혔다.

발랄한 변덕쟁이들을 위해 / 꾀 많은 런던이 팔아버린 것 / 발틱해 파도 넘어온 배들이 / 목재와 수지로 바꿔 간 것들 / 파리의 주린 입맛이 / 쓸만한 교역 거리 삼으려고 / 취미와 사치와 유행을 위해 고안한 / 모든 것이 열여덟 살 철학자의 / 장식장을 꾸몄다. I-23

숙부의 유산을 상속받기 전 오네긴은 18세였다. 타티아나의 편지를 받은 것도, 소녀의 순정을 거절한 것도 그해였다. 타티아나의 명명축일 사건은 이듬해이다.

그해는 가을 날씨가 / 오래 지속되었고 / 자연은 겨울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 눈은 1월에야 내렸다 / 둘째 날 밤에 V - 1

시인은 렌스키의 나이를 콕 집어 알리진 않았다. 오네긴이 19세가 되었고, 렌스키가 타티아나의 동생 올가와 약혼한 사이였음을 떠올리면, 설령 그가 더 많았더라도 오네긴과 큰 차이는 없었을 터이다. 심지어 시인은 그가 소년이었다고 알려준다.

묘비가 보인다 / 나이 든 두 소나무 그늘 사이에 / 비문은 나그네에게 알린다 / “여기 블라디미르 렌스키 누웠다 / 일찍이 용감하게 죽었으니 / 어느 해, 몇 살 언저리였다 / 안식을, 소년 시인에게!” VII - 6

결투에서 친구를 죽인 오네긴은 7년 동안 세상을 떠돌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로 돌아온다.

오네긴은 /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친구를 죽이고 / 목적도 없이, 노력도 하지 않고 / 스물여섯이 되도록 살았다 VIII - 12

타티아나는 그사이 하필이면 오네긴의 친척인 그레민 공과 결혼했다. 그레민 공은 전쟁에서 장애를 얻은 뚱뚱한 장군이라는 것밖에, 나이에 대한 언급은 따로 없다.

“아하! 정말 오래 ‘세상’에 없었구먼 / 기다려봐, 소개해주지” / “하지만 누군데요?” “내 아내야” 
“결혼했군요! 몰랐는데 / 얼마나 됐는데요?” “2년쯤” / “누구하고?” “라린 집안” “타티아나군요!” VIII - 17-18

푸시킨이 자세히 그리지 않았지만, 차이콥스키는 그레민 공에게 아주 훌륭한 아리아를 주었다. 타티아나가 남편을 떠나지 못할 강력한 장치를 푸시킨이 빠뜨렸다고 생각했나 보다.

예카테리나 셰르바첸코가 주연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무대

이상이 원작에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처지가 바뀌어 오네긴이 그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낸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답장은 없고, 먼발치에서 싸늘함만을 느낀다.

날은 내달렸다. 공기 중엔 따스함이 퍼지고 / 겨울은 어느덧 풀렸다 / 그는 시인이 못 되었고 / 죽지 않았고 미치지 않았다 / 봄이 그를 재촉했다. VIII - 39

그러는 사이 오네긴은 27세가 되었다. 처음 만나 8-9년이 지났으니 적잖은 세월이다. 20대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노년과는 다르지 않은가! 9년 전과는 처지가 뒤바뀌었다. 이번에 훈계받는 쪽은 오네긴이다. 애원하는 오네긴에게 그녀도 사랑을 숨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고 그에게 충실하겠다며 오네긴을 두고 방에서 나간다. 푸시킨은 오네긴 혼자 남은 방에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을 들인다. 그리고 거기서 비참한 그를 놓아준다.


차이콥스키는 많은 고민을 한 듯하다. 그의 타티아나는 푸시킨의 그녀만큼 모질지 못하다. 오네긴을 아직 사랑한다고 노래할 때 두 사람은 다시 격정에 사로잡힐 것만 같다. 그러나 선은 넘지 않는다. 그녀가 뿌리치고 나가자, 오네긴이 좌절하기 때문이다.

쪽팔린다! 고통스럽다!
불쌍한 내 운명아!

마지막 부분에 대해 차이콥스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1880년 볼쇼이 공연을 앞두고 수정을 요청하는 동생 아나톨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너와는 다른 생각이고, 푸시킨도 많은 암시를 통해 내가 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마무리했다고 생각하지만, 동봉하는 것처럼 네 조언에 따라 몇 가지 장면을 바꿨어. 먼저 242페이지, 타티아나가 오네긴 품에 안긴다는 지시 대신에 이렇게 썼다. “오네긴이 끌어당긴다.” 그 뒤로 오네긴은 쓴 대로 노래하고, 여전히 그녀를 ‘그대’라고 부를 거야. 이전처럼 가는 거지. 하지만 끝에 가서 타티아나의 가사를 바꿨어. 그러니까 그녀는 더 이상 굴복하거나 결심을 바꾸려 들지 않아. 그 대신 의무에 충실할 거야. 오네긴은 그녀를 안으려 들지 않지만, 그녀에게 간청하지. 그러면 “죽겠어요!” 대신에 타티아나가 말할 거야. “영원히 안녕!” 그러고 퇴장해. 그러면 그는 몇 분 동안 섰다가, 마지막 말을 내뱉지. 장군은 들어오지 않을 거야.

사실상 연출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차이콥스키의 성악가는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가? 앞서 보았듯이, 오늘날 여건과 달리 차이콥스키 당대에 타티아나는 정말 20대 성악가가 맡았다. 메트로폴리탄의 르네 플레밍은 <장미의 기사>를 연기하듯 고전적이다.

 드미트리 체르냐코프는 볼쇼이의 타티아나 모노가로바에게 전깃불을 나가게 하고 창문을 깨뜨리는 초자연적인 힘을 요구한다.

이것은 엑스맨인가?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소프라노 아스미크 그리고리안은 베를린 코미셰 오페라 무대에서 찬반을 무의미하게 하는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데미 무어의 킹콩 포효

바르셀로나의 크리스틴 오폴라이스는 마농 레스코 같은 두 얼굴이라 혼란스럽다.

만년의 오네긴 같은 노인이 대사 없이 시종일관 따라붙는다

어머니도 아닌 유모에 더 어울렸을 연배의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는 발레리나와 더블 캐스팅인 덕분에 부담을 덜었다. 

더빙 영화로 나온 선례를 무대화한 것이다

푸시킨의 처형과 이름이 같은 마린스키의 예카테리나 곤차로바는 젊음이 무기이다.

보거스? 이승기?

가진 자의 여유인가? 안나 네트렙코가 애써 꾸미지 않고 가장 푸시킨에 가깝다. 

안나 카레니나 옷을 입고 타티아나를 부른 네트렙코

다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존 크랑코의 발레 <오네긴>이다. 이건 음악부터 문제가 있다. 크랑코의 음악감독 쿠르트 하인츠 슈톨체가 사용한 음악은 차이콥스키의 오페라가 아니다. 그는 가사가 있는 오페라 대신 <사계>를 비롯한 피아노 독주곡집 가운데 여러 곡을 골라 관현악 편곡했다. 그 또한 사실 스트라빈스키가 1928년 뜬금없이 차이콥스키의 서거 35주기를 기린답시고 안데르센 동화에 붙인 발레 <요정의 입맞춤>을 만들 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차이콥스키가 다루지 않은 소재를 그의 음악으로 만들었지, 크랑코처럼 <예브게니 오네긴>처럼 차이콥스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작품에 도전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틴 하델리히가 연주하는 <요정의 입맞춤>의 실내악 버전 <디베르티멘토>

피아노곡들에 그쳤다면 모를까, 슈톨체와 크랑코는 그와 거의 같은 비중의 곡을 오페라 <황후의 슬리퍼>에서 더 가져왔다. 차이콥스키는 <예브게니 오네긴>에 앞서 고골의 작품집을 가지고 <대장장이 바쿨라>(1874)를 썼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뒤에 수정해 새로 무대에 올린 것이 <황후의 슬리퍼>(1885)이다. 역시 사후 거의 잊혔지만, 오늘날 <이올란타>와 더불어 새롭게 조명받는 원숙기 오페라이다. 섬세한 완벽주의자 차이콥스키가, 후대의 안무가가 자신의 음악을 임의로 골라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했을 <예브게니 오네긴>의 대본에 입혀 공연할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이러려고 작곡했겠나!

그가 황당할 일은 이게 다가 아니다. 3막에서 오네긴과 타티아나가 재회할 때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또 다른 음악을 더했다. 단테 『신곡』의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이야기에 붙인 교향적 환상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가 튀어나온다. 오네긴과 어쩔 줄 모르다 그를 쫓아낸 타티아나가 망연자실 오열하는 것으로 발레는 막을 내린다. 물색없는 객석의 요란한 환호는 <비창 교향곡> 3악장이 끝난 뒤에 나오는 박수보다 더 절망적이다.

어쩔 거냐! 이 사태를...

그런데 뜯어보면 원래 슈톨체의 뜻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의 스코어 마지막 곡은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가 아니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중창’이다. 차이콥스키는 1870년에 환상서곡으로 셰익스피어의 연인을 다뤘고, <예브게니 오네긴>을 쓸 당시 1878-81년 사이 오페라로 확대하려다 뜻을 접었다. 이때 남은 곡들은 작곡가 사후 그의 제자 세르게이 타네예프가 완성해 초연했으니, 그 이중창 가운데서 환상서곡의 아름다운 서정미를 들을 수 있다. 타티아나의 절규 뒤에 터져 나오는 박수에 뭘 더하기 어색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발레에선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중창을 들을 수 없다. 만일 이 부분을 안무했더라면 그나마 푸시킨의 애틋한 마무리에 가깝지 않았을까.

위에도 나왔던 셰르바첸코는 속옷 바람에 찬 바닥에 누워서 편지의 노래를 불렀다. 2009년 카디프 콩쿠르 우승자

함부르크 발레단의 존 노이마이어는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작곡가 레나 아우어바흐에게 신곡을 의뢰했고, 발레 제목을 <타티아나>로 바꿨다. 차라리 차이콥스키와 경쟁하기로 한 노이마이어가 가상하다

빡빡이 오네긴은 처음이다

나도 이쯤에서 오네긴을 놓아주고 다음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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