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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l 26. 2020

비운의 마제파와 폴타바 전투

푸시킨의 폴타바와 차이콥스키의 마제파

차이콥스키는 1881년 <오를레앙의 처녀>를 초연한 직후 <마제파>에 착수했다. 이야기는 <예브게니 오네긴>에 이어 다시 푸시킨의 서사시 『폴타바』에서 가져왔다. 폴타바는 우크라이나의 지명이다. 마제파는 이곳 자포로제 코사크를 이끄는 게트만, 곧 우두머리였다. 푸시킨과 차이콥스키에 앞서 마제파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바이런과 리스트이다. 리스트는 마제파의 젊은 시절 모험담을 시로 썼고, 리스트는 그것을 토대로 먼저 <초절기교 연습곡>의 한 곡을 쓴 뒤에, 다시 교향시로 확대했다. 같은 인물이지만, 바이런/리스트와 푸시킨/차이콥스키는 마제파의 서로 다른 시기에 주목했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제4번 '마제파'

이반 마제파(1639-1709)는 실존인물이다. 그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 그리고 스웨덴 제국의 카를  12세(재위 1697-1718)와 동시대를 살았다. 러시아와 스웨덴 두 나라는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국운을 건 전쟁을 벌였다.  1700년부터 1721년까지 계속된 대북방 전쟁 가운데 최대 격전이 벌어진 곳이 1709년의 폴타바였다. 이곳의 맹주 마제파는 스웨덴 편을 들었다. 마제파의 코사크와 카를 12세는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군에 패했고, 둘은 오스만 제국으로 피했다. 도피 중에  마제파가 카를 12세에게 들려주는 젊은 날의 이야기가 바이런/리스트의 내용이다.

마제파가 말을 잘 다루게 된 사연을 카를 12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푸시킨/차이콥스키는 마제파가 표트르 대제와 스웨덴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 외교를 벌이던 무렵을 택했다.

이야기는 코자크의 총재판관 코추베이의 집에서 시작한다. 그는 부족의 우두머리 마제파와 막역한 사이이다. 코추베이를 찾아온 마제파는 머뭇거리며 그의 딸 마리야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기 또래의 마제파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을 달라 하니 코추베이와 그의 아내를 벌쩍 뛰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놀랍게도 부모 몰래 마리야도 마제파를 흠모해 이미 마음을 맞춘 상태였다. 배신감을 느낀 코추베이는 표트르 대제에게 밀사를 보내 마제파가 스웨덴과 내통한다고 밀고한다. 그러나 차르의 궁중에 잠복했던 마제파의 첩자가 먼저 손을 쓰는 바람에, 코추베이는 도리어 무고죄로 잡혀간다.
두 번째 장은 마제파의 방으로 안내한다. 마제파는 표트르 대제와 스웨덴의 카를 12세 사이에서 줄타기 중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표트르 대제를 등지고 스웨덴과 내통했다. 이를 알아챘지만 도리어 무고죄로 갇힌 코추베이는 그에게 없애야 할 정적이 되었다. 마제파가, 친구이자 이제는 장인이기도 한 코추베이를 죽였을 때 벌어질 일을 생각하고 괴로워할 때 아내 마리야가 방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보위에 오를 거라는 남편의 야망을 듣고 기뻐하지만,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 하나를 잃어야 한다면  어쩌겠냐는 질문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택하라면 남편 뜻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야가 잠들었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숨어 들어와 아버지가 실제로 처형을 앞두고 있으니 어서 손을 써보라 한다. 마제파가 친구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돌아왔을 때 혼비백산한 마리야는 온데간데없다.
타티아나를 버리고 온 오네긴, "오 마리아"
마지막 장은 전투가 쓸고 간 폴타바이다. 마제파의 배신을 안 표트르 대제는 코추베이의 유족을 위로하며 그들의 지위를 전보다 높여준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대한 마제파의 바람도 부질없이 스웨덴의 국운은 다했고, 시대가 원한 것은 표트르 대제였다. 패잔병의 신세가 된 마제파가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날 때 실성한 마리야가 나타난다. 그녀는 마제파에게, 부모가 잠들었으니 조용하라고 말한다. 조롱하듯 웃으며 어둠 속에 사라지는 마리야를 보며 마제파는 누구도 겪지 못한 바닥 없는 슬픔 속으로 떨어진다.

역사의 주역이랄 표트르 대제나 카를 12세는 푸시킨의 『폴타바』에서도 잠깐 스쳐가는 데 불과했지만, 차이콥스키의 <마제파>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마제파와 마리야, 코추베이를 통해 대북방 전쟁과 폴타바 전투의 시기를 작곡과 연주 당대로 가져온다.

폴타바의 마제파 동상

차이콥스키가 오페라를 작곡하던 시기는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유럽 열강이 재편되고 난 얼마 뒤였다. 마제파가 꿈꾼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1991년에야 이뤄졌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친서방 정책을 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내긴 힘들었고, 2014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한 크림 공화국과 합병했다. 두 나라가 적성국이 된 탓에 폴타바나 키예프, 오데사와 같이 러시아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를 취재하려면, 러시아가 아닌 다른 인접국가를 통해  가야 한다.

이반 아이바좁스키가 그린 <산 라자로에 도착한 바이런>

푸시킨은 차르의 전제 정치를 비판한 진보 지식인이었던 탓에 유배까지 가야 했고, 그가 존경한 바이런은 그리스의 독립을 넘어 코자크와 인접한 아르메니아까지 오지랖을 넓혔다. 그는 아르메니아를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베네치아를 찾았을 때 아르메니아 이주민 정착촌 산 라자로 델리 아르메니에서 이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처음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차이콥스키 당대에 러시아 화단을 대표했던 아르메니아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반 아이바좁스키가 <산 라자로 델리 아르메니를 방문한 바이런>을 그렸다. 일랴 레핀의 <술탄에게 답장하는 자포로제 코사크인들>과 더불어 흑해와 카스피해를 끓어오르게 할 그림이었다.

레핀의 그 유명한 그림. 비웃을 때는 좋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코사크의 영웅 마제파의 고뇌를 그린 차이콥스키의 오페라는 뜨거운 감자였다. 1막 코추베이의 정원에서 펼쳐지는 흥겨운 ‘호팍’ 춤사위와 3막을 여는 ‘폴타바 전투’의 격렬한 교향악은 제삼자가 아닌 당사자들에겐 미묘한 감정을 불러올 것이다.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1996년 앨범 가운데, 누가 이 음악을 5인조의 흙냄새만 못 하다고 하는가!

그 밖에도 아버지를 거역하고 결혼하는 아름다운 신부는 <오텔로>의 데스데모나를 떠오르게 한다. 마제파에 분노하는 코추베이 부부의 선창에 합창이 호응하는 1막의 피날레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같은 민족적인 작품과 경쟁한다. 옥중에 갇힌 코추베이의 분노와 친구를 칠 수밖에 없는 마제파의 번민은 <돈 카를로>의 주인공들에 상응한다. 아버지를 잃은 것이 자신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미쳐버린 마리야는 여느 벨칸토 오페라의 ‘광란의 장면’ 주인공 못지않다.


차이콥스키는 푸시킨의 결말을 조금 손보았다. 마리야가 마제파를 두고 사라지는 대신, 적에 쫓긴 마제파가 마리야를 두고 피신한다.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양자택일하도록 했던 가혹이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자기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신세는 영웅에게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홀로 남은 마리야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시 정신이 든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사랑하던 안드레이가 죽어가는 것을 본 그녀는 자장가를 불러준다.

피셔 디스카우의 아내가 부른 마리야의 자장가
마지막 리사이틀에서 호로비츠의 편곡을 연주한 밀스타인

차이콥스키가 푸시킨의 『폴타바』로 끌어당긴 것은 그의 핏줄일지 모른다. 그의 증조부 표도르 차이카는 폴타바 전투에서 표트르 대제 편에 섰던 코사크 기병이었다. 표도르의 둘째 아들 표트르는 성을 차이콥스키로 바꿨다.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형 요한 야콥 바흐이다. 그는 스웨덴 카를 12세의 궁정 음악가가 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갔고, 뒤에 폴타바 전선에서도 오보에를 연주했다. 바흐는 형을 떠나보내면서 <카프리치오, BWV992>를 썼다. 차이콥스키가 알았더라면 오페라 가운데 선율을 인용했을까?

사랑하는 형을 떠나보내며 쓴 카프리치오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이 간과되어 온 오페라를 1996년 무대에 올렸고, 그동안 유일한 영상물이었다. 코로나 유행 기간 동안 2019년 공연을 한시적이나마 스트리밍으로 제공해 더욱 반가웠다.


(1996년 전막 공연)
https://youtu.be/D7CZ-VOdriA 


2021 마린스키 공연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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