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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l 31. 2020

체레비츠키, 여제의 신발

고골의 「크리스마스 전야」에 붙인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니콜라이 고골은 우크라이나 드네프르 강 동쪽 폴타바 현의 작은 마을 소로친치에서 태어났다. 18세기 초 대북방 전쟁의 격전지였던 곳이다. 그의 첫 성공작은 1832년에 나온 『디칸카 근처 농가의 저녁』이라는 단편 기담집이었다. 폴타바 북쪽 시골 디칸카는 바로 <마제파> 1막의 배경인 코추베이의 집이 있던 곳이다.

 코추베이의 집터에 무성한 라일락. 폴타바 현, 디칸카

『디칸카 근처 농가의 저녁』 가운데 「소로친치의 장터」와 「성 요한의 날 전야」는 앞서 무소륵스키가 오페라와 교향시로 썼다. 1874년 차이콥스키는 그 가운데에서 「크리스마스 전야」라는 작품을 골라 <대장장이 바쿨라>라는 오페라로 썼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오페라를 그때까지 차이콥스키가 쓴 작품 가운데 매우 높게 평가다.

페름 차이콥스키 극장 오페라의 <신발> 콘서트 전막 공연

그러나 큰 기대와 달리 초연을 실패한 차이콥스키는 <예브게니 오네긴>, <오를레앙의 처녀>, <마제파>에 이르는 중기 걸작을 쓴 뒤인 1885년 <대장장이 바쿨라>를 개작했다. 그는 처음 작곡하고 10년이 지난 뒤에도 애착을 가질 만큼 전작에 끌렸다. 베토벤이 자신의 유일한 오페라 <레오노레>를 수 없이 매만진 끝에 <피델리오>로 내놓은 것에 비길까? 그러나 베토벤이 이 <오페라>의 서곡을 네 개나 쓴 것과 달리, 차이콥스키가 수정은 10년 만에 하는 것치고는 많지 않았다. 1막 바쿨라와 옥사나의 이중창을 확대했고, 1막 피날레는 새로 썼다. 2막 교장의 노래와 5중창과 3막 황제의 노래로 다시 썼다. 그밖의 수정은 미미했다.

로열 오페라의 <신발> 예고편

대신 차이콥스키는 개정판의 제목을 바꾸었다. ‘대장장이 바쿨라’, ‘황후의 신발’, ‘크리스마스 전야’, ‘옥사나의 변덕’과 같은 것을 떠올렸지만, 그는 그냥 <신발Cherevichki>이라 정했다. 마제파의 친구이자 마리야의 아버지 코추베이가 살던 디칸카 집터는 지난 날 격전의 흔적은 볼 수 없고 무성한 라일락 사이에서는 똑같은 풍경을 그린 화가 미하일 브루벨의 아내 나데즈다가 백조 공주로 나타날 것만 같다.

서곡이 울리는 동안 악마를 그리는 바쿨라 ⓒ Bill Cooper
디칸카의 달밤. 무당 솔로하에게 호색한 악마가 다가온다. 악마는 그녀에게 달을 따다 달라고 부탁한다. 대장장이 바쿨라는 어머니에게 추근거리는 악마가 못마땅해 교회에 흉측한 몰골로 그려놓는다. 악마는 그런 바쿨라를 골려주려 눈보라를 일으키며 솔로하와 날아간다.

옥사나가 거울 속 자기 모습에 빠졌다가, 그런 자신이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게 생겼다며 투정을 부린다. 때마침 도착한 순박한 바쿨라가 화풀이 대상이다. 바쿨라가 옥사나의 투정을 받아주던 차에 춥이 눈보라를 피해 들어온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낯선 사람으로 오해한 바쿨라는 춥을 쫓아낸다. 옥사나는 아버지를 몰라본 바쿨라에게 자기는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며 내보낸다.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자신도 바쿨라를 좋아한다고 되뇌는 옥사나.
박쥐 날개, 뱀 혀, 이런 것이 마녀의 도구이다 ⓒ Bill Cooper
2막은 다시 솔로하의 집. 그녀가 악마가 시시덕거릴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악마는 석탄 자루에 숨고, 시장이 들어와 구애한다. 그때 또 문 두드리는 소리에 시장이 석탄 자루에 숨고, 이번에는 학교장이 들어와 솔로하에게… 그를  자루에 들어가게 하는 다음 방문자는 춥이다. 춥도 솔로하에게 고백하다가 바쿨라의 도착에 자루를 뒤집어쓴다. 고골은 석탄 자루가 없어질 때까지 사람을 들일 생각이었나 보다. 옥사나에게 퇴짜 맞고 우울해진 바쿨라는 집을 가득 채운 석탄 자루를 치우며, 신세를 한탄한다.

한편 옥사나는 캐럴을 듣다가 친구가 신은 ‘신발’을 보고 부러워한다. 어떤 신발이던 구해주겠다는 바쿨라의 다짐에 옥사나는 여제의 신발을 신고 싶다고 답한다. 바쿨라는 옥사나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낙담한다. 마을 사람들이 위로와 옥사나의 사과도 소용없이 그는 악마가 든 자루를 끌고 떠난다. 사람들이 호기심에 남은 자루를 벗긴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코사크 마을의 유쾌한 잔치 ⓒ Bill Cooper
바쿨라를 놓고 싸우는 물의 요정과 악마 ⓒ Bill Cooper
달빛 비친 강둑의 3막. 바쿨라는 물의 요정 루살카에 홀려 물에 뛰어들려 한다. 악마가 자루에서 나와 바쿨라의 영혼을 달라고 흥정하자 바쿨라가 그의 꼬리를 잡고 꼼짝 못하게 한다. 잘못을 비는 악마에게 바쿨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리나 여제의 궁전으로 데려가라 명한다. 황실에서는 무도회가 한창이다. 바쿨라는 여제의 부군인 대공에게 약혼녀가 황실에서 신는 신발을 갖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코사크 춤이 이어지는 동안 바쿨라는 여제의 신발을 얻는 데 성공해 악마의 등에 올라탄다.
신발 싫다고? 내가 언제! ⓒ Bill Cooper
4막, 햇빛이 쏟아지는 디칸카의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모두가 잔치를 벌이지만 솔로하와 옥사나는 바쿨라 걱정에 밤을 지새웠다. 마을 남자들이 옥사나에게 구애하지만 그녀는 바쿨라 생각에 슬퍼한다. 잔치가 한창일 때 바쿨라가 도착해 춥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며 용서를 청한다. 그러나 진짜 선물은 옥사나의 것! 신발이 없더라도 바쿨라를 사랑한다나! 두 사람을 축복하는 합창으로 막을 내린다.

나는 차이콥스키의 많은 무대 음악 중에 오페라로는 <예브게니 오네긴>이, 발레로는 <호두까기 인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작품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이 대장장이 바쿨라가 나오는 <체레비츠키>를 꼽고 싶다. 이 오페라이면서도 <이올란타>와 나란히 차이콥스키에게 드문 해피엔딩이면서도 유일한 ‘코미디’이다. 나는 차이콥스키가 매우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고 믿고 싶고, 그 점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로열 오페라의 2009년 공연을 영상으로 만나기 전까지 이 곡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직까지 유일한 영상물이다. 그러나 일찍이 이 음악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존 크랑코의 <오네긴>을 위해 음악을 편곡한 쿠르트 하인츠 슈톨체이다. 슈톨체는 발레 <오네긴>에 <예브게니 오네긴>은 하나도 가져다 쓰지 않았지만, <신발>의 주요 장면을 적절히 배치했다. 타티아나가 오네긴과 처음 만나고 편지를 쓸 때, 또 뒷날 재회하는 장면에서 ‘옥사나의 아리아’가 연주된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그 유명한 ‘폴로네즈’는 <신발>의 아무도 모르는 - 그러나 그 못지않게 좋은 - ‘폴로네즈’로 대체되었다. 촌부들의 춤에는 황실의 ‘러시아 춤’과 ‘코사크 춤’이 장단을 맞춘다.

너무 늙어서 재회한 슈투트가르트의 연인들

<오네긴>이 발레로 나올 당시 미지였던 <신발>이라고 차이콥스키가 그냥 써도 좋다는 위임장을 써놓 않았다. 스트라빈스키가 이미 <요정의 입맞춤>이라는 안데르센 발레에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멋대로 가져다 쓴 적 있지만, 그것은 차이콥스키가 작곡하지 않은 새로운 소재였다. 그리고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다룬 솜씨는 차이콥스키가 살아온대도 눈감아주었을 만큼 빼어났다. 그러나 슈톨체는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개성 있는 자기 언어를 만들 능력은 없었고, 그나마 차이콥스키가 이미 다룬 소재를 그의 다른 음악으로 발라버린 것이다. 이를테면 판소리 <춘향가>를, <심청가>나 <적벽가> 따위에서 가져온 곡조로 부른 것이다.

'노가바'라고 치니까 이런 게 나오네.. 발레 <오네긴> 거의 이 지경이다..

프란체스카 잠벨로는 <신발>이 그동안 받지 못한 찬사를 한껏 받을 만한 공연을 만들었다.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연출가였던 장 피에르 포넬의 보조로 이력을 시작한 그녀는 특이하게 미국 태생이면서 1970년대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다녔다. 여러 메이저 오페라단에서 특색 있는 공연을 만든 능력은 이런 이력이 뒷받침된 것이다. 의상과 무대, 연기가 완벽하게 작동하는 공연은 이 곡을 처음 보는 관객이라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게 만든다. 유튜브에는 1961년 소련에서 제작한 영화 <크리스마스 이브>가 올라 있다. 잠벨로는 아마도 학창 시절에 보았을 이 영화로부터 시각적인 이미지를 빌려온 모양이다.

소련 영화, 참 요지경이다. 영어 더빙에 영자막까지

동화와 민담을 오가는 스토리는 다소 황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좀 더 익숙한 다른 작품들과 연관 짓게 만든다.


악마와 영혼을 거래하는 파우스트 류의 이야기는 러시아에도 흔하다. 예쁜 연인을 두고 속 태우는 바쿨라는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네모리노와 같다. 옥사나가 뭇 남성들에게 구애를 받는 모습을 본 바쿨라는 바람난 올가 라리나를 보고 피가 끓어오르던 블라디미르 렌스키, 바로 그이다. 그러나 바쿨라는 렌스키처럼 친구에게 결투 신청을 하는 대신 물가로 간다. 그는 그곳에서 물의 요정 루살카를 만날 것이다. 차이콥스키가 쓴 여러 오페라 가운데 유일하게 공연되지 못 하고 폐기된 작품이 두 번째로 쓴 <운디네>이다. 운디네와 루살카의 차이는 계단과 층계의 차이와 같다. <신발>을 통해 운디네들을 다시 불러모은 것이다.

매슈 폴렌차니의 네모리노

무당 솔로하를 두고 악마와 동네 영감이 차례로 들이대다 숨고 찾는 2막의 설정은 차이콥스키가 존경한 <피가로의 결혼>에도 나온다. 돼지처럼 보이는 악마의 행색은 로열 오페라 관객이라면 브린 터펠이 연기했던 베르디의 팔스타프를 떠오르게 할 것이다. 더욱이 아낙들의 세탁통에 던져진 팔스타프처럼 악마도 자루에 담겨 끌려다닐 신세이다.

차이콥스키가 죽던 해에 초연된 베르디의 <팔스타프>

대장장이라는 직업은 바그너의 지크프리트와 경쟁해야 하지만, 그렇게 비장하지 않다. 바그너의 주인공이 출생의 비밀을 놓고 세상과 씨름할 때 공감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바쿨라가 옥사나의 마음을 얻지 못해 죽으려 들 때,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돕고 싶을 것이다. 그가 악마의 도움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가 황제에게 신발을 청하는 모습은 다소 뜬금없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황제의 반응을 보면 당대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미네르바가 이끈 승리가 흑해 연안까지 뻗쳤음을 축하”하는 무도회에 나타난 젊은이가 신발을 달라하자 황제는 우크라이나 여자들은 모두 이런 신발을 신어 마땅하다라고 칭찬한다. ‘러시아의 미네르바’는 러시아의 치세를 최대로 넓힌 예카테리나 여제를 뜻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마제파가 반란을 일으킨 뒤로, 코사크를 당근과 채찍으로 다뤄야 했던 러시아의 속내를 보여준다.

예카테리나 여제를 미네르바로 그린 조각

마을로 돌아온 바쿨라가 곧바로 연인을 찾아가지 않고, 먼저 눈보라에 쫓아냈던 춥에게 선물을 꺼내는 장면도 훈훈하다. 모자와 신발에 이어 자신을 벌해 달라고 채찍을 내밀 때 솔로하가 재빨리 춥에게 제지하는 눈빛을 던진다. 춥은 그녀의 경고로 자신이 다른 구혼자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이런 건 차이콥스키가 굳이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이심전심으로 알아야 한다. 바쿨라가 가져온 여제의 신발을 옥사나가 신어보는 장면은 러시아판 ‘신데렐라’이다.

악마, 네가 수고가 많다 ⓒ Bill Cooper

로열 오페라가 크리스마스의 축복을 노래하는 피날레를 ‘커튼콜’에서 한번 더 연주한 것이야말로 차이콥스키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불새>가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태양 ⓒ Bill Cooper

차이콥스키의 세 번째 오페라 <오프리치니크>를 시칠리아까지 가져가서 공연한 겐나디 로주데스트벤스키. 그는 그보다 3년 앞선 2000년에 <체레비츠키>를 같은 칼리아리 극장Teatro Lirico di Cagliari에서 공연했다. 올 러시안 캐스팅의 성악가가 본토에서도 하기 힘들던 걸작을 시칠리아에서 공연한 걸 차이콥스키가 알았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이탈리아 구석구석을 다녔지만, 시칠리아는 가지 못한 차이콥스키가 기꺼이 달려갔을 터이다. 로주데스트벤스키가 마지막 합창을 끝내고 뜨거운 박수가 나올 때 오케스트라는 아름다운 피날레를 다시 연주한다. 나는 이것이 전통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로주데스트벤스키Rozhdéstvenskiy는 크리스마스라는 뜻이다. <체레비츠키>는 내가 아는 일급 크리스마스 선물, 곧 <34번가의 기적>, <아더 크리스마스>와 같은 작품과 비겨서 손색이 없다. 물론 그 가운데 최고는 <호두까기 인형>이다.

일라리온 프랴니시니코프의 그림으로 듣는 림스치킨 <크리스마스 이브>의 '폴로네즈'
본다르추크 판 <전쟁과 평화>를 표지로 쓴 차이콥스키의 <신발> 가운데 '폴로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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