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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12. 2020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팜파탈

차이콥스키의 아홉 번째 오페라 <차로데이카>

모스크바 강은 아래로 내려가 콜롬나에서 더 큰 오카 강과 만난다. 모스크바 강을 품은 오카 강은 동쪽으로 5백 킬로미터를 흘러가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볼가 강에 합류한다.

러시아 5인조의 리더였던 밀리 발라키레프는 1837년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차이콥스키보다 세 살 연상이었다. 발라키레프는 차이콥스키에게도 <로미오와 줄리엣>, <만프레트 교향곡>을 쓰라고 권해 두 곡을 헌정받았을 만큼 가까웠다.

일랴 레핀, <슬라브 작곡가들>. 중앙이 글린카, 그 왼쪽 정면을 보는 발라키레프, 피아노에 앉은 안톤 프랑켄 아니 루빈스타인

1885년 <만프레트>를 완성한 차이콥스키는 이폴리트 쉬파진스키의 연극 <요녀Чародейка>에 관심을 갖는다. 영어로는 ‘The Enchantress’ 또는 ‘The Sorceress’ 번역하는데, 이를 ‘여자 마법사’로 옮기면 원래 캐릭터를 잘 살리지 못한다. ‘차로데이카’는 미모로 남자를 홀리는 요녀라는 의미를 띤다. 극중 술집 여주인 나스타샤를 이르는 말이다. ‘인챈트리스’, ‘요녀’, ‘차로데이카’, ‘여자 마법사’ 이렇게 다양한 느낌의 제목이 혼용되는 탓에 가뜩이나 알려지지 않은 걸작이 더욱 표류한다.


차이콥스키는 <만프레트>가 완성되기 무섭게 쉬파진스키에게 의뢰한 대본을 받아 들고 아홉 번째 오페라에 착수한다. 우크라이나 카멘카의 여동생 집에서 1막을 쓰고, 모스크바 변두리 클린의 마이다노보에서 나머지를 작곡했다. 니즈니 노브고로드 오카 강변 나스타샤의 술집으로 가보자.

오카 강변의 어느 결혼식
1막. 젊은 과부 나스타샤는 여인숙 주인이다. 그녀의 숙부 포카와 떠돌이 수도승 파이시, 나스타샤의 친구 폴랴가 술집에서 어울린다. 그들은 나스타샤를 ‘쿠마’(대모)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유리 대공과 사냥꾼 주란이 곰 사냥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른다. 쿠마는 남몰래 흠모하는 유리 대공을 반긴다. 주정꾼 루카시가 유리의 아버지 니키타 쿠를랴테프 대공이 여인숙의 불온한 소식을 조사하러 수하인 마미로프와 오는 중이라고 알린다. 쿠를랴테프 대공은 침착하고 친절하게 맞이하는 미모의 안주인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녀는 대공에게 술과 춤을 권해서 마미로프의 화를 돋운다.
2막. 쿠를랴테프 대공의 저택 정원. 대공비 옙프락시아가 마미로프의 동생 네닐라로부터 남편이 매일 쿠마를 만나러 간다는 얘길 듣는다. 아들 유리는 문제의 원인을 밝히려고 파이시에게 쿠마를 감시하라고 명한다. 이어 대공과 대공비가 불같이 싸운다. 유리는 대공의 첩자를 쫓아 정원으로 몰려온 화난 군중을 진정시킨다. 군중은 그를 벌하라고 요구한다. 파이시가 돌아와 대공이 쿠마에게 갔다고 전하자, 유리는 어머니가 슬퍼한 이유를 알아챈다. 그는 아버지를 홀린 ‘요녀’를 죽이겠다고 맹세한다.
3막. 쿠를랴테프 대공이 쿠마의 오두막에서 그녀에게 구애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굴복하느니 죽겠다고 선언한다. 그가 가자 폴랴와 포카가 그녀에게 유리의 위협을 경고한다. 그러나 쿠마는 유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란과 도착한 유리는 잠든 그녀를 향해 칼을 빼어 들었지만 칠 수 없다. 그는 쿠마가 결백함을 알고 서로 끌어안는다.
이반 쉬시킨, 사냥꾼이 있는 풍경
4막. 오카 강변 숲 속에서 사냥 나팔 소리가 울린다. 사악한 마법사 쿠드마가 사냥꾼을 피해 동굴로 들어간다. 주란은 유리를 만나, 그가 여기서 쿠마를 만나 함께 도망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이 다시 사냥터로 간 뒤 파이시와 대공비가 도착해 쿠드마에게 쿠마를 죽일 독약을 얻는다. 소지품을 가지고 강가에 도착한 쿠마는 대공비를 몰라보고 그녀가 건넨 독약을 받는다. 쿠마는 때마침 도착한 유리의 품에서 죽는다. 유리는 기뻐하는 어머니를 저주한다. 대공이 쿠마와 유리를 쫓아 등장한다. 그는 아들이 쿠마를 숨겼다고 생각하고 질투심에 유리를 죽인다. 유리의 시신이 떠내려 간다. 천둥 번개 치는 숲 속에 마법사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대공은 미쳐간다.

대공과 그를 사랑하는 여인의 엇갈린 운명에 아당의 발레 <지젤>이 떠오른다. 한 여자를 두고 부자가 벌인 질투의 비극은 베르디의 <돈 카를로>에도 나온다. 전체적인 음울한 분위기와 격정은 분명 <일 트로바토레>와 닿아 있다. 연적을 독약으로 죽게 하는 대공비는 백설공주의 계모와 분노를 경쟁해야 한다. 밀고자 탓에 배우자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뼈대는 <오텔로>가 아닌가! 때문에 게르기예프 사단의 갈리나 고르차코바나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는 베르디와 차이콥스키의 아리아를 묶어 독집을 낼 때 <차로데이카>의 노래를 포함했다.

루나 백작과 경쟁하는 니키타 대공

그러나 서곡이 시작되자마자 잔혹 동화나 베르디는 잊힌다. 클라리넷과 바순이 굽이굽이 엮어가는 오카 강 물줄기는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전설을 다른 어떤 이야기 못지않게 감동적으로 만든다. 이는 바로 1막에서 나스타샤가 부르는 아리오소 선율과 같다.

니즈니에서 굽어보니 깊은 산속에서 우리 젖줄 어머니 볼가로 흘러오네
금빛 모래사장과 푸른 풀밭에서 볼가는 누이 오카를 끌어안네
슬픔과 고통은 잊힙니다! 사방이 얼마나 넓은지! 끝이 없습니다!
보시면 감탄하실 겁니다. 마음이 창공을 향해 열리는 느낌이지요
자유롭고 행복한 새처럼 여러분 영혼이 그곳으로 날아가고 싶을 겁니다

<예브게니 오네긴>과 <오를레앙의 처녀>, <마제파>의 여주인공들이 그랬듯이 나스타샤도 고향산천을 사랑하는 고운 마음씨를 가졌다. 바로 차이콥스키의 됨됨이이기도 하다.

아스미크 그리고리안, 또 당신입니까?

차이콥스키 <요녀>의 전곡 음반은 1954년 볼쇼이 극장 녹음과 1978년 멜로디야 녹음 두 가지이다. 새 음반이 간절하다. 영상물은 VAI가 출시한 니즈니 노브고로드 오페라단의 모스크바 공연이 유일하다. 좋은 무대이긴 하지만 나이 든 배역은 극적인 몰입감을 떨어트리고, 오늘날 감상자가 원하는 수준의 화질/음질과도 거리가 아주 멀다. 오스트리아 빈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은 아스미크 그리고리안을 타이틀롤로 기용한 빼어난 무대를 보여줬다. 유튜브에서 단편을 볼 수 있다. 절제된 의상과 세련된 무대 배경의 전막을 간추린 홍보 영상에는 첫 군중 장면 음악이 사용되었다. 떠들썩하고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유쾌한 술자리이다. 불어로 대화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 무도회와는 다른 세상이다.

크리스토프 로이가 연출한 빈 강변 극장 무대

나스타샤와 유리의 이중창을 그린 3막의 피날레와, 질투심에 아들을 죽이고 미쳐버린 대공을 보여주는 4막의 피날레 또한 차이콥스키의 최고 장면이다. 만일 빈 공연의 전막을 볼 기회가 생긴다면 대단한 행운이리라!

유리 대공과 쿠마(나스타샤)의 애틋한 사랑
이반 뇌제처럼 아들을 죽이고 미쳐버린 쿠를랴테프 대공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일랴 레핀

볼쇼이와 마린스키 모두 근래에 이 작품을 올렸다. 볼쇼이 2012년 무대의 홍보 영상은 제작 과정과 주역 인터뷰를 곁들였다. 바그너의 <발퀴레>를 보는 듯이 숨막히는 드라마임을 알게 한다.

영상물에 인색한 볼쇼이의 <차로데이카>

마린스키 무대의 히로인은 엘레나 스티히나이다.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가 장기이기도 한 스티히나의 음성은 4막 나스타샤의 고별 노래로 들을 수 있다. 아스미크 그리고리안의 의상에 비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어울릴 드레스이다.

그녀의 라이벌이자 공동으로 이 역할을 맡았던 마리아 바얀키나는 독창회에서 1막의 아리오소를 열창했다. (아래 영상 끝에서 두 번째 노래, 33:15)

그밖에 게나 디미트로바부터 율리아 하마리까지 소프라노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탐험한 명인들이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슬픈 이야기에 동정을 보냈다. 

복장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유모인데...

<요녀>가 되었든 <여자 마법사>가 되었든 이 걸작의 전막을 보게 할 만큼 시장성을 갖춘 소프라노는 안나 네트렙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녀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차이콥스키의 잊힌 여주인공들을 다시 불러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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