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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22. 2020

스페이드의 여왕을 돌려주오

푸시킨으로 돌아온 차이콥스키의 열 번째 오페라

낭비벽이 심한 카드 노름꾼이며 사교계의 망나니였던 알렉산데르 니콜라예비치 골리친 공작은 자신의 아내 마리야 가브릴로브나를 모스크바의 가장 두드러진 귀족 중 한 명이었던 레프 키릴로비치 라주몹스키 백작에게 카드게임에 진 대가로 넘겨주어야 했다.

유리 로트만,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가운데

아내를 내기에 걸 정도로 도박에 미친 러시아 상류 사회의 일그러진 풍속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로트만도 알았겠지만, 골리친(Голи́цын, 또는 ‘갈리친’이라 표기) 가문과 라주몹스키 가문은 베토벤을 놓고도 경쟁했다.골리친 공작부인을 내기로 딴 레프 키릴로비치 라주몹스키(1857-1818)는 빈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안드레이 키릴로비치 라주몹스키(1852-1836)의 동생이었다. 안드레이는 베토벤에게 현악 사중주 세 곡을 위촉해 가문의 이름으로 불리게 했고, 교향곡 5번과 6번 ‘전원’까지 헌정받은 음악 애호가였다. 라주몹스키 사중주 2번의 3악장에는 매우 유명한 러시아 선율이 들어 있다.

2:00부터 러시아 선율이 시작된다

그러나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에 사용된 같은 가락을 듣는다면 베토벤이 곡의 진가를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1:05부터 시작하는 음악을 베토벤에게 들려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차이콥스키도 <마제파> 가운데 ‘폴타바의 전투’ 승리를 이 음악으로 장식했다.

어쨌거나 골리친 집안도 라주몹스키에 뒤지지 않았다. 아내를 잃은 알렉산데르 니콜라예비치 골리친(1773-1844)의 친척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골리친(1794–1866)도 베토벤에게 현악 사중주 세 곡을 위촉했다. 그 결과물이 후기 현악 사중주 여섯 곡 가운데 Opp. 127, 130, 132였다. 니콜라이 골리친이 친척 공작에게 부인 대신 자신의 베토벤 현악 사중주를 카드에 걸라고 했으면 뭐라 했을까? 참고로 알렉산데르 니콜라예비치 골리친은 동성애자였으니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이보다 아름답긴 힘들다

러시아 문화의 핵심 요소 셋으로 무도회, 결투 그리고 카드게임을 들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무도회와 결투의 모든 것을 보여줬고, 또 한 번 푸시킨 원작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카드게임의 핵심을 탐구한다. 음악은 단연 최고이다. 이 곡은 차이콥스키가 평생 가장 존경했던 모차르트에 대한 오마주이다. 궁극은 물론 <돈 조반니>이다. 망령에 사로잡힌 광기의 주인공 게르만은 석상과 결투하는 호색한 돈 조반니를 떠오르게 한다.

이 서곡은 다 좋은데 너무 짧아서 더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서곡부터 음울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밤이 짙게 드리운다. 막이 오르면 모처럼 화창한 날 공원 정경이다. 군대 놀이 하는 어린이 합창은 15년 앞서 나온 비제 <카르멘>의 영향이리라. 보불전쟁이나 러시아 튀르크 전쟁처럼 잇따른 유럽의 전쟁이 동심에 투영된 결과이다.
병정놀이 가자꾸나
팔 거리의 어린이들이 왜 여기서 나와?
아이들 뒤로 젊은 사관 장교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나눈다. 게르만은 톰스키에게, 이름도 모르는 처녀를 사랑한다고 털어놓는다.. 그때 옐레츠키 공작이 등장해 약혼을 공개한다. 친구들이 상대를 궁금해할 때 마침 약혼녀 리자와 그녀의 할머니 백작부인이 들어온다. 옐레츠키가 리자를 친구들에게 소개하자 게르만은 얼어붙는다. 톰스키는 그녀가 친구의 짝사랑 대상임을 직감한다. 옐레츠키가 백작부인과 리자를 데리고 나가자, 톰스키는 백작부인에 얽힌 비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가 한 때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던 시절이 있었다. ‘모스크바의 비너스’라 불린 그녀는 카드에 빠져 큰돈을 잃었다. 그녀를 가엾게 여긴 생 제르맹 백작은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는 대가로 어떤 게임도 이길 수 있는 세 가지 패를 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거래를 받아들인 백작부인은 잃었던 판돈을 되찾았다. 그녀는 카드의 비밀을 남편과 한 청년에게 알려줬는데, 어느 날 유령이 찾아와 다음번 패를 알려고 오는 사람이 죽음의 사자라고 예고했다.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게르만에게 세 번째 행운아가 되라고 부추긴다. 모두 소나기를 피해 나간 사이 게르만은 리자를 얻지 못하면 죽겠다고 노래한다.
올가 보로디나가 부른 폴리나의 로망스
리자는 친구 폴리나의 노래를 듣다가 우울해진다. 폴리나가 밝은 노래로 분위기를 바꿔도 리자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약혼한 친구의 기운을 북돋으며 폴리나가 나가자, 리자가 처지를 한탄한다. 공작비가 될 그녀가 약혼자보다 보잘것없는 사관 게르만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발코니에 숨었던 게르만이 들어와 사랑을 고백한다. 거부하는 리자의 목소리는 단호하지 못하다. 인기척을 들은 백작부인이 왔다가 약지 못한 손녀를 책망하고 나간다. 게르만이 더욱 매달리자 그녀도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2막은 가면무도회로 시작한다. 친구들은 우울하던 게르만이 활력을 찾은 이유를 궁금해한다. 반면 옐레츠키는 약혼녀의 어두운 표정을 걱정한다. 옐레츠키의 애틋한 사랑의 아리아에서 <예브게니 오네긴>의 렌스키나 그레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흐보 형아
두 사람이 나가자 게르만이 리자의 편지를 들고 나타난다. 연극이 끝난 뒤 밀회를 약속하는 내용이다. 게르만은 백작부인의 비밀 패만 알면 리자와 멀리 떠날 수 있다는 꿈에 부푼다. 극중극 <양치기 소녀의 지조>가 공연된다. 전반적인 오페라가 <돈 조반니>를 모델로 했다면 이번에는 모차르트의 밝은 면에 대한 예찬이다.
연극이 끝나고 리자는 게르만에게 백작부인 방에서 자신의 방으로 통하는 문 열쇠를 주며 밀회를 기약한다. 파티가 성대하게 막을 내린다.

게르만이 방에 걸린 백작부인의 초상을 보는 동안 부인이 들어온다. 무도회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백작부인 앞에 게르만이 나타나 카드의 비밀을 캐묻는다. 두려움에 질린 노인은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만다. 소리를 듣고 들어온 리자는 게르만의 사랑이 카드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거짓이었다고 비난하며 오열한다.
3막은 게르만의 방. 게르만은 리자의 사과 편지를 읽는다. 감정이 격해 오해했으니 오늘 밤 운하에서 만나자는 내용이다. 바람이 창문을 열치며 초불이 꺼지자 백작부인의 유령이 방에 들이닥친다. 망령은 게르만에게 리자를 위한 것이라며 카드의 비밀은 3, 7, 1이라고 알려준다.

운하에서 기다리던 리자가 게르만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비통하게 노래한다. <마탄의 사수>를 강하게 연상케 하는 음악이다.
어디 갔었어?
게르만이 리자에게 함께 도망치자며 할머니의 비밀을 알아냈으니 도박장으로 가야 한다고 뛰쳐나간다. 망연자실한 리자는 운하에 뛰어든다.

마지막 카드판이 벌어진다. 약혼을 취소한 옐레츠키가 게르만과 상대하길 기다린다. 마지막 패가 ‘1’이라고 외치는 게르만에게 옐레츠키는 네 카드는 ‘스페이드의 여왕’이라고 되받는다. 말도 안 된다며 쳐다본 카드에는 백작부인의 얼굴이 비웃듯이 쳐다본다. 광기에 사로잡힌 게르만은 옐레츠키와 리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애도하는 합창으로 막이 내린다.

열 번째 오페라에서 차이콥스키의 창작력은 승리의 패를 쥔 것처럼 거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에 피할 수 없는 의문을 갖는다. 왜 차이콥스키는 푸시킨의 이야기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는가?


<스페이드의 여왕>은 차이콥스키의 동생 모데스트가 대본을 썼다. 원래 니콜라이 클레놉스키가 오페라로 쓰려다가 지지부진하자 모데스트는 형에게 대본을 넘겼다. 형제는 푸시킨을 난도질했다.

최선의 옮김 같지는 않음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이 푸시킨 시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주석인 것과 달리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은 모독이라 할 만큼 소설을 왜곡했다. 게르만이 노름에 팔려 백작부인의 비밀을 알아내려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는 푸시킨과 무관하다. 먼저 오페라에서 리자는 백작부인이 아끼는 손녀이며, 귀족과 약혼했다. 그러나 푸시킨의 리자는 백작부인의 양녀로 거의 하녀와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는다. 사교 모임에서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리자는 백작부인의 노망을 말없이 감내하며 힘들어한다.

영화판 스페이드의 여왕 후보

소설에서 게르만은 처음부터 리자를 좋아한 것이 아니며, 사실 뒤에도 그녀에겐 무관심하다. 그는 친구에게 들은 백작부인의 필승 카드 패를 알아내기 위해 리자를 철저히 이용한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접근하려고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양녀 리자를 사랑하는 척 줄곧 연애편지를 보낸다. 리자가 게르만이 자신을 사랑한 것으로 오해한 것은 맞는다. 그러나 그것은 게르만에게 철저히 놀아난 것이다. 백작부인이 협박당하다가 돌연사 한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게르만에게 속았음을 알고 마음을 정리한다.


소설 가운데 가장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부분은 백작부인이 집을 비운 사이 게르만이 리자의 조언대로 집에 숨어드는 장면이다. 리자는 모르는 집에 처음 들어올 게르만이 눈을 감아도 문제없을 만큼 상세하게 내부를 설명한다. 추리소설 읽는 듯한 아슬아슬한 침입이 끝나면 게르만은 뜻하지 않게 노부인이 옷 갈아 입고 가발 벗는 장면을 목격한다. 차이콥스키는 이 짜릿한 침입 장면을 작곡하지 않았고, 대신 있지도 않은 <양치기 소녀의 지조>를 극중극으로 삽입했다.

가장 고전적인 바르셀로나 리세우 극장 무대

차이콥스키의 멋대로이긴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묘사한 ‘인테르메초’는 그 자체로 완성도 높다. 황실 가장무도회에서 열린 공연이니,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가운데 촌부들의 ‘베르가마스크’와 견줄 것이다. 몰리에르/륄리의 <서민귀족>에 나오는 극중극이나 <서민귀족>을 액자로 만들어 버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도 경쟁작이다. 차이콥스키는 이 ‘인테르메초’의 음악을 모차르트풍으로 작곡했으니, 뒷날 스트라빈스키 <풀치넬라>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차이콥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이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을 모델로 한다면, <스페이드 여왕>의 ‘인테르메초’는 <피가로의 결혼>에 대한 예찬이다. 실제로 우리는 극 중에서 파파게노의 선율을 떠올릴 수 있다.

보스턴은 또 중년 커플...

차이콥스키 오페라와 푸시킨 소설이 드물게 일치하는 부분은 백작부인의 망령이 나타나 게르만에게 비밀을 일러주는 장면이다. 그 조건 또한 양쪽 다 게르만이 리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애당초 백작부인이 리자를 딸처럼 여기지 않았고, 게르만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감이 생긴다. 독자는, 과연 게르만이 거짓 사랑의 대가로 카드의 비밀을 얻어 승리한다면 백작부인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리자와 결혼할까 궁금해한다. 그러나 리자에 애정이 없는 백작부인이 두 사람의 행복을 바랐을 리 없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게르만에게 파멸을 가져다주었다. 약속된 ‘1’이 아니라 ‘스페이드의 여왕’이 되어 나락으로 몬 것이다. 그러니 오페라에서처럼 백작부인이 게르만에게 패를 알려주는 대가로 사랑하는 손녀 리자와 맺어지길 요구했다면, 그녀는 게르만이 이기도록 도왔어야 한다는 모순이 생긴다. 이런 경우의 수를 차이콥스키가 정말 몰랐을까?


푸시킨의 게르만은 유령에게 배운 패로 도박사 체칼린스키를 상대한다. 그는 하루에 한 패씩 판돈을 두 배로 올려가며 도박을 하다가, 사흘 째에 헛발을 디디며 앞선 대박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차이콥스키의 게르만은 리자의 약혼자였던 옐레츠키 공과 카드를 하다가 진다. 옐레츠키는 백작부인이 원했던 리자의 혼처이다. 이것으로 돈 조반니처럼 복수를 당한 것이라 생각하면 위에 가졌던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백작부인이 자기 뜻을 따르지 않은 손녀를 담보로 게르만을 혼내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콥스키가 했다기엔 너무 조잡한 수이다. 


오페라가 두 주인공을 자살로 몰아가는 것과 달리 푸시킨은 미쳐버린 게르만을 요양원으로 보냈다. 리자는 백작부인 집사의 친절한 아들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일군다. 리자에게 우울한 노래를 불러줬던 친구 폴리나는 소설의 마지막 줄에야 등장한다. 공작의 딸인 그녀는 톰스키와 결혼한다.


동생 모데스트의 대본에 대한 만족감,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놓고 보면 차이콥스키는 정말 스페이드의 여왕에게 홀린 것이 아닌가 싶다. 음악은 승리했지만 푸시킨이 살았다면 일말의 동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이콥스키가 그랬다고 연출가들까지 작품을 제멋대로 다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최고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는 작고하기 직전까지 차이콥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에 몰두했다. 2016년 네덜란드 국립 오페라 창단 50주년 기념작과 2018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연이 각기 다른 무대로 선보였다. 그간 여러 차례 나를 실망시킨 스타 연출가 슈테판 헤어하임은 네덜란드에서도 모호한 주장을 펼쳤다. 그가 담으려 한 자기 생각은 차이콥스키의 동성애 성향이다. 그는 작품 내내 성악 배역과 무관한 차이콥스키 역할의 배우를 등장시킨다. 실제로 피아노 반주를 하기도 하는 작곡가는 무도회가 끝나는 2막에서 남장 여제와 맞닥뜨리고 기겁한다. 서재에는 폰 메크 부인의 초상이 걸렸다. 헤어하임은 차이콥스키를 갈리친 공작과 착각한 것이 아닐까?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과 차이콥스키가 가졌을지 모를 동성애 성향이 무슨 상관인가? 심지어 헤어하임은 게르만과 친구들 이외의 모든 남성을 차이콥스키로 분장시켜서 혼동을 일으킨다. 비중이 엇비슷한 작곡가 역과 옐레츠키를 구분할 수 없으니 혼란만 가중된다.

아수라장

1분만 봐도 당장 만행의 장본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연출가가 한스 노이엔펠스이다. 2006년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모차르트 <이도메네오>에서 마호메트의 목을 베는 무리수로, 소요를 우려한 극장이 아예 공연을 취소한 예는 유명하다. 2010년 바이로이트의 <로엔그린>에서 군중을 쥐떼로 묘사해 야유를 한 몸에 받았던 이도 그이다. 노이엔펠스의 여제는 데미언 허스트풍의 보석 공예 해골이다. 잘츠부르크 연출 가운데 딱 하나 맘에 드는 것은 백작부인이 침소에 드는 장면이다. 베테랑 한나 슈바르츠는 혼자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주인공 같은 옷을 입었는데, 잠자리에서 주황색 가발을 벗자 대머리가 드러난다. 눈살을 찌푸리는 관객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정확히 푸시킨 소설에 나오는 모습이다. 그밖에 노이엔펠스의 기괴한 상상력은 잘츠부르크와 찰떡궁합이다. 이곳 청중은 연출가가 자신들을 조롱하고 풍자해도 잘 모르고 (아니면 알고도 즐기는 자학인가!) 좋아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헤어하임과 노이엔펠스 모두 얀손스가 혼신의 힘을 다한 마지막 공연에 폐를 끼친 셈이다.

잘츠부르크를 구출하라!

<젊은이와 죽음>으로 유명한 프랑스 안무가 롤랑 프티는 1970년대 초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위해 안무했다. 당시만 해도 프티는 <스페이드의 여왕>의 녹음조차 구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고 한다. 2001년 볼쇼이의 초대로 <스페이드의 여왕>을 다시 안무했을 때 그는 음악을 교향곡 6번 ‘비창’으로 바꿨다. 이 시도가 나름 의미 있을 것이라 기대한 나는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블라디미르 안드로포프가 지휘하는 볼쇼이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조악한 무용에 봉사하느라 이 곡의 연주사에서 최악으로 꼽힐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음악 진행과 상관없이 무분별하게 박수가 쏟아져 나와 더욱 꼴불견이다.

산으로 간 볼쇼이

내용은 푸시킨과 차이콥스키를 제멋대로 절충한 잡탕이다. 이를 위해 프티는 공연사에 남을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교향곡의 3악장과 4악장 순서를 바꾼 것이다. 비극적인 4악장을 게르만이 백작부인 유령과 거래하는 장면에 넣고, 마지막 카드게임 장면은 축제 성격의 3악장으로 안무했다. 게임에 진 게르만이 절망하며 무대 위에 쓰러질 때 쏟아지는 장조의 클라이맥스가 희한하게 맞아떨어진다. 이 곡의 3악장이 끝나고 박수가 나올 때마다 눈총 주던 차이콥스키 청교도들도 이날만큼은 원 없이 손바닥에 불을 냈을 터이다.


게감 그리고리안과 오래전 이 곡을 공연했던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그의 딸 아스미크 그리고리안과 다시 무대에 올린다면 반길 일이다. 

늘 이성적인 마린스키 공연을 기대한다

리제 다비드센이 리자를 맡은 바실리 페트렌코 지휘, 일라이자 모신스키 연출의 메트로폴리탄 공연도 영상물로 만나길 기대한다.

2015년 오페랄리아 콩쿠르 우승자인 노르웨이 소프라노 리세 다비드센

작지만 탄탄한 모스크바 스타니슬라프스키 네미로비치 단첸코 극장이 거장 알렉산데르 라자레프의 지휘로 공연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것이 고마운 일이다. 헤어하임이 콧수염 난 여장 남자 차르를 등장시키고, 노이엔펠스가 해골 바가지를 들이미는 장면에서 알렉산데르 티텔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무대 위 모두가 객석의 11시 방향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여제가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제정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이거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이거나 더 이상 중요치 않다는 뜻이다.

2020년 11월까지 유튜브에 공개되는 스타니슬라프 네미로비치 단첸코 극장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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