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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Sep 23. 2020

작지 않은 교향곡 ‘소러시아’

차이콥스키: 교향곡 2번 C단조, Op. 17

차이콥스키의 뜻은 아니지만, 교향곡 2번을 ‘소러시아’라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첫 악장과 끝 악장에 우크라이나 민요를 사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차이콥스키는 우크라이나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스케치했다. 러시아의 모태가 키예프 공국임을 상기하면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라 부르는 것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20세기 들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까닭도 그런 자존심 때문이다. 차이콥스키는 1872년 여름, 여느 해처럼 여동생 부부가 사는 우크라이나 카멘카Kamenka로 갔다. 5월 31일부터 7월 2일까지 그곳에 머물다, 니지Nyzy(위 사진)를 잠깐 들러 우소보Usovo로 가 8월 중순까지 지냈다. 현재 우소보는 우크라이나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 내륙이지만, 차이콥스키 시대에는 더 먼 북캅카스와 볼가강 유역까지 우크라이나였다. 우소보에서 대강의 초고를 완성한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9월부터 12월까지 마무리 작업을 했다.

폴타바 바로 위에 자리한 니지는 차이콥스키의 친구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콘드라톄프Nikolay Dmitryevich Kondratyev의 영지였다. 변호사인 콘드라톄프는 낙관적인 성격으로 차이콥스키와 친했다. 동생 모데스트는 그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스티바 오블론스키에 비유했다. 그러나 알렉산더 포즈난스키는 그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가 훨씬 복잡했다고 말하며, 모데스트가 짐짓 언급을 피한 동성애 관계가 작용했음을 지적한다. 차이콥스키는 콘드라톄프의 아내 마리야, 딸 나데즈다와도 매우 친했다. 

니콜라이 콘드라톄프

1881년 겨울에는 가족과 차이콥스키 형제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딸의 교육 문제로 콘드라톄프가 니지에 머물지 않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완전히 옮기자 차이콥스키도 니지는 찾지 않고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마다 이들 집을 방문했다. 또 1886년에 콘드라톄프가 차이콥스키 집 근처 마이다노보에 별장을 구입한 뒤 왕래는 더욱 잦았다. 차이콥스키는 그의 집에서 톨스토이의 책을 즐겨 빌려보았다. 1887년 수종을 앓던 콘드라톄프가 독일 아헨(도시 이름이 온천을 암시한다)에서 요양할 때도 차이콥스키는 석 달이나 곁에 머물렀고 그가 곧 사망한 뒤에도 유족을 종종 찾았다.

차이콥스키가 강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도시라 칭했지만 한때 샤를 마뉴의 수도였던 아헨. 공대만 쓸쓸히..

이렇게 친한 콘드라톄프가 작곡 중인 교향곡 2번을 ‘천재적’이라고 칭찬했다. 차이콥스키도 그때까지 쓴 가운데 최고라 자신하며, (매번 그랬듯이) 전에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평했다. 1873년 1월 23일로 예정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초연은 러시아 음악협회 회장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의 사망으로 연기되어, 2월 7일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곧바로 차이콥스키는 동생과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 등에게 편지했는데, 모두 ‘대성공’이라는 내용이었다.

조프리 사이먼의 유일한 원전 전곡 녹음. 타네예프는 이것을 수정판보다 좋아했다

위대한 작곡가의 첫 교향곡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그것은 무(無)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베토벤과 베를리오즈, 브람스와 말러 모두 첫 교향곡에서 뒷날 이루고자 할 모든 것을 제시했다. 차이콥스키는 어떠한가? 나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1번이, 2번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베토벤의 첫 교향곡도 좋지만 두 번째 교향곡의 첫 악장은 그것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나는 베토벤 교향곡 2번 첫 악장 클라이맥스에서 감동하지 않을 때가 없다. 맙소사, 브람스가 첫 교향곡을 쓰고 그에 필적하는 두 번째 교향곡을 그리 쉽게 쓰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브람스 2번 4악장 피날레는 곡이 잉태된 뵈르터 호수만큼이나 벅차오르게 한다.

푀르차흐에서 본 뵈르터 호수

차이콥스키는 마치 선배보다 더 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이 첫 교향곡보다 월등한 두 번째 교향곡을 들려준다. 첫 악장 도입부에 인용한 우크라이나 민요 ‘어머니 볼가강을 따라 아래로Vniz po matushke, po Volge’가 전체 밑그림이다. 

열 번은 들어야 한다

볼가강은 명실상부 러시아의 젖줄이다. 모스크바강도 오카강과 합류해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볼가강과 만난다. 우랄 지역을 굽이도는 카마강도 차이콥스키가 태어난 보트킨스크를 지나 카잔 아래에서 볼가강에 합쳐진다. 아래로 아래로 흐른 볼가강은 그 이름을 딴 볼고그라드(잠시 ‘스탈린그라드’라 불렸던)에서 방향을 틀어 아스트라한을 통해 3,500 킬로미터가 넘는 여정을 마치고 카스피해로 흘러나간다. 그래서 러시아 문학에서 볼가강을 어머니라 부르고, 차이콥스키도 볼가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극적인 휘몰아침은 그가 장차 무대 음악의 일인자가 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호른이 주도하는 진중한 민요가 잦아들 무렵 차이콥스키 특유의 휘젓는 현악 앙상블이 분위기를 고조한다. 이 볼가강이 스메타나의 위대한 교향시 <나의 조국> 가운데 제2곡 ‘블타바(독일명 몰다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썼음을 생각하면, 두 곡이 누리는 인기 차가 불공평하다.

블타바가 볼가보다 낫다면 그것은 스메타나가 차이콥스키보다 16살 많은 덕이다

지휘자 미하일 플레트뇨프는 펜타톤 음반에 초판 첫 악장을 함께 담았다. 5분가량 긴 16분 길이 초판본은 차이콥스키가 볼가강을 훨씬 유장하게 그리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수정판에서 길이를 줄이는 대신 깊이와 폭을 확대한 선택이 옳았다.

일부러 대충 연주한 거 같기도 하다

차이콥스키는 두 번째 악장의 악상을 폐기한 오페라 <운디네> 가운데 ‘혼례의 행진’으로부터 가져왔다. 물의 요정 운디네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루살카, 멜루지네, 인어 공주가 모두 같은 부류이다. 푸시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에도 루살카가 등장하고(글린카의 오페라에는 안 나온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체레비츠키>에도 멋진 운디네 발레 장면이 있다. 볼가강에 요정이 없을 리 없다.

체레비츠키에 나오는 엄마 인어 애기 인어

요정들이 폴란드 궁정 무도회에 모두 도착하면 세 번째로 멘델스존이나 베를리오즈가 그린 셰익스피어풍 스케르초 악장이 따른다. <한여름 밤의 꿈>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어주는 요정 마브의 행렬과 같다. 로미오의 친구 머큐쇼는 캐퓰릿 가문의 무도회를 다녀오며 요정의 여왕 마브에 대해 재담한다. 베를리오즈가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그린 이 장면은 멘델스존이 <한여름 밤의 꿈>에 묘사한 요정의 여왕 타티아나와 시녀의 모습과 함께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맴돈다.

게르기예프가 데려온 흑인 머큐쇼 케네스 타버

네 번째 악장은 다시 우크라이나 민요 ‘두루미’로 만들었다. 들판에 선 외로운 모습이거나 하늘을 나는 신선 같은 모습이 아니다. 꺽다리 같은 두루미가 성큼성큼 걸어가며 여울 속의 물고기를 사냥하는 듯한 모습이 익살맞다.

차이콥스키의 제자 아렌스키가 같은 주제로 쓴 푸가

차이콥스키의 관심은 쉬지 않고 춤을 향해 질주한다. 그것은 이미 황실에서 열리는 화려한 무도회를 넘어서 온 마을이 광장에 모여 추는 축제의 한마당이다. 두루미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껑충껑충 추는 춤을 그는 다음 교향곡에서 그리고 오페라 <체레비츠키>의 피날레에서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차이콥스키 교향곡 1번과 2번에는 함정이 있다. 오늘날 듣는 두 곡은 사실 교향곡 3번 뒤에 수정한 것이다. 첫 교향곡은 1868년에 초연된 뒤 묻었다가, 1874년에 수정해 출판했다. 1874년이면 두 해 전에 교향곡 2번을 썼고, 말 많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발표했던 해이다. 그런가 하면 교향곡 2번은 초연 8년 뒤인 1880년에 수정해 재출판했다. 이미 교향곡 3번과 4번을 냈고,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과 <오를레앙의 처녀>를 발표하던 사이였다. 그러니 최종 출판 순서대로라면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의 번호는 아래 순으로 매겨야 한다.

교향곡 1번 - 교향곡 3번 - 교향곡 4번 - 교향곡 2번

물론 차이콥스키의 수정이 교향곡 2번을 4번보다 더 완숙하게 만들 정도라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예전 작품의 부족한 면모를 가다듬어 부끄럽지 않은 수준으로 내놓은 만큼 앞선 번호가 주는 선입견은 벗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 교향곡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존 엘리엇 가드너이다. 그는 2012년 말에 로열 콘세르트헤바우에서 이 곡을 지휘했다.


러시아 낭만주의와 선뜻 연결되지 않는 지휘자이지만 가드너는 오랜 세월 두껍게 덧칠된 프레스코와 같은 후기의 세 곡보다 아직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보이는 교향곡 2번에서 훨씬 순수한 차이콥스키의 매력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암스테르담 무대는 얼마 뒤 베네치아 신년 음악회를 위한 연습이었다. 2013년 1월 1일 라 페니체 극장은 가드너를 앞세웠다. 이전에 이 무대에 섰던 로린 마젤이나 리카르도 무티와 선뜻 다른 성격의 지휘자이지만, 가드너와 베네치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다. 그가 창단한 몬테베르디 합창단이야말로 이 도시 음악의 자존심인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를 부활시킨 일등 공로자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산 마르크 바실리카에서 <성모 마리아의 저녁 기도>를 공연해 자신을 알린 가드너가 이번에 마련한 프로그램도 의미심장하다. 전반부에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2번을 연주한 뒤, 후반부를 베르디의 오페라 갈라로 꾸민 그에게 열광한 사람은 진정 나뿐이었을까? 이것이야말로 교향악과 오페라가 어느 하나만으로 극장을 지배할 수 없음을 보여준 선언이다. 가드너 자신과 친소관계를 떠나 베네치아를 매우 좋아했던 두 작곡가 차이콥스키와 베르디를 신년음악회에 초대한 것도 시의적절했다.

2013년 라 페니체 실황의 1악장. 나머지 악장은 직접 찾아 듣는 성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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