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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Sep 04. 2020

악보 밖으로 나간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의 차이콥스키 협주곡

아래 글은 몰도바 태생의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며 내지에 직접 쓴 글이다. 지휘자 테오도르 쿠렌치스에게 쓰는 편지 형식이다. 쿠렌치스는 답장으로 함께 수록된 음악 스트라빈스키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모름지기 이 정도는 되어야 협주곡을 연주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테오에게     

얼마나 그리운지 몰라요, 당신과 당신 오케스트라, 우리 녹음이 끝나자마자 계속해서, 항상 언제나요. 당신 소리, 당신 정신, 당신 체력과 상상력, 당신 광기와 용기로 이런 풍성한 시기에 전통과 단절할 수 있었죠.


음악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죠? 우리 영혼을 이런 슬픔에 열어준다는 게 무슨 의미죠? 무한함에 스스로 납작 엎드리는 것이요? 우리가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것? 연약한 상처로 돌아가는 것? 새로운 형식에 올라탈 때 우린 어디에 있죠? 아니면 모든 형식을 잃고 더 큰 전체의, 이해할 수 없는, 진실한, 생명의 일부가 되나요?

차이콥스키 고향 보트킨스크의 얼어붙은 호수, 곡을 쓴 제네바 호숫가와 비슷하다

소리가 순수한 에너지가 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지죠? 생각이나 공간은요? 그것이 깨지고, 사라지고, 우리를 소비하고, 최면을 걸고, 미치게 하고, 최고의 신비를 말해주고, 감동으로 울거나 웃게 할 때는요? 순수한 어린애처럼, 우리에게서 우리 자신을 떠올리죠, 우리 내면을, 우리 본질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도둑인 양 숨기는 것들을 말이에요.


알다시피, 오랫동안 차이콥스키 협주곡은 내게 낯설었어요. 내가 듣기에 이 곡은 우리 시대에 맞지 않았어요. 연습에 안달인 사람들이 잘근잘근 씹고, 손가락 훈련을 남용하고, 콩쿠르에서 질러대는 바보 바이올린 음악, 그렇게 생각했죠. 난 현대에 있었으니까. 죄르지 쿠르타크, 갈리나 우스트볼스카야, 죄르지 리게티, 자친토 셸시, 살바토레 스키아리노 같은 이 시대 작곡가들 말이에요. 

이렇게 놀고 있었다

내가 처음 마주한 낭만주의는 슈만이었어요. 썩은 내에 질식할 것 같았죠.

빨간 드레스가 말했다: 님아 날 두고 가지 마오

다리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려고 찾은 안식처가 베베른과 베르크였죠. 

어서 녹음해 주세요

훨씬 뒤에 갈망... 그래요 갈망한 것이 차이콥스키였어요. 그의 아쉬움, 그의 슬픔, 그의 혼돈, 물론 그의 달콤한 유혹과 생생한 명인기 그리고 민요에 대한 애정이요.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이 협주곡을 시작할 때 내 기분이 어땠게요? 관찰자였어요. 추운 겨울 거리에 서서 얼어붙은 유리창에 입김을 쏘이죠. 서리 낀 유리 틈새로 엿보이는 건 반짝이는 촛대, 잠옷, 제복, 색깔들, 화려함과 오만함. 바이올린의 도입부는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는 아가씨 같아요. 그녀는 자신 없고, 수줍고, 불안해요. 처음에는 거의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죠.

정확히 이걸 말함. 베리 코스키 연출의 취리히 공연

그러나 아주 천천히 천천히 자신감을 가져요. 점차 그녀는 농담도 하고, 날개를 달죠. 경쾌하고, 순수하고, 순진한 존재가 거의 무도회 최고 미녀로 거듭나서 왈츠의 미몽에 사로잡히죠. 첫 악장에서는 여러 역할을 해야 해요. 우쭐한 발레리나, 달려드는 장교, 유혹하는 미녀, 불같은 무용수와 연인, 타티아나와 오네긴. 카덴차는 딸꾹질 같기도 하고 외설적인 소음 같기도 하죠. 충격받은 평론가의 찡그린 표정, 고양이 같은 바이올리니스트 뒤꿈치에 입 맞추기.

2악장 칸초네타

차이콥스키의 ‘어린이 앨범’ 중 ‘옛 프랑스 노래’ 기억해요? 그 곡이 ‘칸초네타’의 열쇠 같아요.

정말 비슷한 선율 아니에요? 가사 알아요? 프랑스 민요 ‘나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Mes belles amourettes’에요.

너무 무스꾸려...

실연의 비밀, 죄책감, 후회, 고통, 털어놓을 수 없죠. 숲 속에서만, 완전히 혼자 있을 때, 죽어가는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어요. 차이콥스키가 어렸을 때 프랑스 가정교사로부터 이런 노래를 들었을까요?

프랑스에서 온 취향, <예브게니 오네긴> 가운데 트리케

그는 후원자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에게 편지했어요. “칸초네타는 그저 대단해요. 이 감춰진 비밀의 음 속에 어떤 시상과 그리움이 들었을까요?” 부드럽게 해야 해요, 죽어 가듯이...

3악장 알레그로 비바치시모

초연 뒤에 신문은 이 곡을 “떠들썩한 러시아 사육제처럼 거칠고 형편없고, 조악한 모습에 가공하지 않은 저주 같다”라고 썼어요. 정말이지 피날레는 보드카가 흐르는 강이에요. 기둥에 묶인 채 춤추는 곰이 보여요. 뛰어다니는 코사크, 술 취한 농부의 욕지기, 바람이 폭풍으로 바뀌죠. 하지만 나무로 된 널찍한 교회에 촛불이 비쳐요. 소박한 사람들 노래가 훈훈하게 퍼지죠. 슬픈 가락이 다시 한번 표트르 일리치의 가장 내면적이고 마법과 같은 마음을 떠돌아요. 촛불 그림자에서 악보를 재빨리 긁는 깃털 팬 소리가 들려요.

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마음이 구불구불 희미한 기억의 사진첩을 지나가요, 꿈처럼... 이 음악에서 새로운 것은 못 찾겠어요. 대신 작곡가의 영혼, 작품의 영혼,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세상의 영혼, 오랫동안 틀 안으로 부서져 먼지가 된 세상이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뮤즈가 작곡가의 귀에 속삭인 순간만 포착할 수 있다면요. 덕분에 그가 날쌔게 곡을 마칠 수 있었죠. 매번 다르게 들려요. 러시아 회화처럼 야하고, 거칠고, 단정치 못해요. 이런 그림의 힘에 휘둘리죠.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갈 때마다 그런 것을 봐요. 재즈 음악가 같아요. 즉흥 연주할 것을 대충 알죠. 하지만 어떤 게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오히려 당신이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먼저 알죠.


그런 작품들이 우리와 함께 살며 모습을 보이지만 때로는 지쳐서 과묵하죠. 총천연색 이야기요? 그런 건 듣는 사람 마음속에서만 일어나요.

바이올리니스트 요시프 코테크와, 1877

바이올리니스트 요시프 코테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없었을 거예요! 코테크가 자필 악보에 바이올린 파트를 직접 적은 거 알아요? 어이없는 실수도 했죠. 219 마디를 보세요. 셋잇단 음표를 빠트렸어요! 하여간 나는 우리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연주하고 싶어요. 코테크 자신이 이 곡을 한 번 밖에 연주하지 못했다니 안 됐어요. 아마 차이콥스키와 관계가 어색했던 모양이에요. 코테크가 결핵으로 다보스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차이콥스키에게 한 번만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 경험이 차이콥스키를 뒤흔들었어요. 그는 직후에 <만프레트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죠. 파멸과 죄책감과 죽음의 작품 말이에요.

고마워요, 테오도르, 그리고 당신의 환상적인 동지 무지카에테르나도요. 늘 사랑과 열린 마음과 열정으로 이 프로젝트에 임해줬어요.

우린 페름에서 녹음했죠. 러시아 한복판, 차이콥스키 생가에서 110마일밖에 안 떨어졌어요. 세르게이 댜길레프가 어릴 적 인상을 받았던 바로 그 옛날 마법의 극장에서요. 우린 거트 현과 당대 고악기로 연주했죠. 우리 공범들은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많이 리허설했어요, 밤늦게까지 찾고, 녹음하고, 목관도 솔로이스트처럼 서서 연주했죠. 지구 상 어떤 녹음 조건도 여기와 같을 수 없어요.

가족 같은 사이

<결혼Les noce>? 좋아요! 결혼해요! 태양과 지구처럼, 별과 달처럼, 음악과 우리 마음처럼, 도취와 이성처럼, 이고르와 표트르, 러시아와 서유럽, 돌과 물처럼이요. 흰 드레스를 입었는데 맞질 않네요. 하지만 언제는 맞았나요? 무엇보다 내가 다른 사람과 맞았던 적이 있나요? 러시아 모기가 노래 부르며 종아리를 뜯네요, 아야, 아야, 아야! 춤춰요! 즐겁게! 꿈꿔요! 결혼해요!


당신의 파트리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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