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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Sep 04. 2020

우랄산맥 넘어 세계로

차이콥스키 자서전

아래는 차이콥스키가 1889년에 쓴 짧은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독일 음악가 오토 나이첼의 부탁으로 나눈 대담 가운데 그가 직접 불어로 쓴 이 부분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1890년에 출판되었다. 죽기 3년 전에 쓴 것인 만큼 꾸미려 하지 않고 담담하게 스스로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내가 번역해 음악과 들을 수 있도록 편집했다.




대개 음악가가 그렇듯이 나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다섯 살 때 이미 음악 선생님에게 예술의 기초를 배웠다. 그녀는 작년에 작고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유행하는 모든 종류의 곡을 칠 수 있을 정도로 피아노와 친해졌다. 칼크브레너Kalkbrenner의 <광인Le fou>과 같은 곡은 그런 걸작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것이다. 

앞부분은 손목 연습에 대한 설명이고, 3:20부터 연주이다

나의 조숙함은 즉흥 연주에서도 드러났고, 우랄 지역 저 구석에 사는 소수의 가족을 놀라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차이콥스키의 어릴 적 모습과 가족사진, 보트킨스크 차이콥스키 박물관

열 살까지 그렇게 지냈고, 음악에 대한 내 적성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던 부모님은 내가 정부 관리가 되기를 바랐다. 이 무렵 부모님은 나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 법률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국립학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젊은 귀족 자제들을 교육했다. 졸업생에게는 탄탄대로가 보장되었다. 9년 동안 이 학교에 다니면서 음악을 접할 기회는 충분치 않았다. 음악 도서관과 피아노 연습실에 심지어 피아노 선생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좀 나아지기 위해 그저 격려가 좀 필요한 학생에게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곳에서 실력은 늘지 않았다. 휴일마다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왔지만, 내 음악을 발전시킬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학교나 가족은 장차 공무원이 되는 것 말고 내게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공무 중인 백조들

열일곱 살 때 나는 이탈리아 성악 교사 피치올리Piccioli 씨를 만났다. 그는 내 음악 재능을 알아본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분이 내게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지금까지도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정도이다. 피치올리는 독일 음악에 뿌리 깊은 반감이 있었다. 그는 독일 음악이 “서툴고, 공허하고, 학구적인 체한다”라고 말했다.

“서툴고, 공허하고, 학구적인 체한다”는 베토벤의 카바티나

반면 이탈리아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은 과도했다. 결국, 나는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를 열광적으로 숭배했다. 단순했던 나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자러 보내는 데 그만이고, 모차르트 오페라나 베토벤 교향곡보다 공허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점에서 분명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음악에 대한 내 편식은 확실히 줄었고, 무엇보다 중요하게도 예전의 독점적인 관심은 사라져 더 분별력이 생겼지만, 아직도 나는 로시니의 멋 부린 장식음이 풍부한 아리아나 카바티나, 이중창 그리고 벨리니의 선율을 들을 때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지나칠 수 없다.

로시니의 카바티나, “방금 들린 그대 음성”, 이자벨 레너드 “나 불렀어?”

열일곱 살 때 아버지는 훌륭한 피아노 선생님을 대주셨다. 루돌프 퀸딩거Rudolf Kündinger 씨였다.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퀸딩거는 탁월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가였다. 매주 일요일 그분에게 교습받았고, 내 피아노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그분은 나를 처음으로 고전을 연주하는 공연장에 데려갔다. 고전 음악에 대한 내 편견은 점점 사라졌다. 마침내 어느 축복받은 날, 의도하지 않게 나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

내 첫 오페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완벽한 계시였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열광했고 황홀경에 중독되다시피 했다. 몇 주 동안 나는 성악 피아노 반주 편곡으로 그 곡을 연주했다. 잠잘 때마저도 나는 이 신성한 음악과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달콤한 꿈으로 이끌곤 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아직도 이탈리아 음악을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많이 줄었다. 나는 그런 애정을 소중한 유년기 추억으로 생각한다. 반면 모차르트의 경우는 크게 다르다. 위대한 대가 가운데 나는 모차르트를 가장 좋아한다. 그날 이후 죽 그래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죽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법률학교를 졸업할 당시 내 음악 교육은 아주 형편없었다. 나는 그날그날 다른 기분의 편협한 애호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주 자주 나는 뭔가 작곡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일종의 자존감에 늘 그러길 꺼렸다. 나는 완전한 음악가가 되어서 가진 모든 재능을 내 맘대로 쓸 수 있기를 바랐는가 하면, 그냥 여기저기서 흔히 보이는 심드렁한 애호가로 남고 싶기도 했다. 동시에 나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어느 날 나 자신을 온통 음악에 맡겨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생각을 친구들에게 얘기하면 그들은 그저 날 비웃고 바보 같다고 말했다.

차이콥스키의 모차르트 전집, 클린 차이콥스키 도서관

그렇게 나는 법률학교를 졸업했고, 3년 동안 법무부 하급 관리로 일했다. 외출도 많이 했고, 춤도 췄고, 아마추어 연극도 관람했다. 짧게 말해 나는 다 해봤다. 그러나 음악이라고는 사랑하는 <돈 조반니>를 반복해서 연주하거나 말랑말랑한 살롱 음악을 연습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점차 나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이 음악은 매번 나를 슬프게 했고 몇 주 동안 불행하게 만들곤 했다. 그때부터 나는 교향곡을 쓰고 싶은 열망에 들끓었다. 그 열망은 베토벤 음악을 접할 때마다 용솟음치곤 했다. 그러나 나는 내 무지함을 너무나 잘 알았다. 나는 작곡에 완전히 무능력했고 이런 생각은 나를 절망으로 이끌었다. 점점 우울해졌고, 내 운명에 큰 불만이 쌓였다. 공무원이 따분하게 여겨졌다. 나는 실망했고 풀이 죽었다.

베토벤은 나를 용 솟게 하지... 난 차라리 웃음 짓는 피에로가 좋아...

1861년 나는 황실 근위대에 속한 경기병 중위를 알게 되었다. 그는 진정한 음악 애호가였고 심지어 (니콜라이) 자렘바가 애호가를 위해 마련한 음악 이론 연구회에도 참석하곤 했다. 나는 이 장교와 곧 친해졌다. 하루는 그에게 받은 주제를 피아노로 즉흥 연주해 보여 그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그는 나를 알아갈수록 처음에 받았던 놀람을 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음악가라는 확신으로 바꿨다. 다른 무엇보다 나는 진지하고 꾸준히 음악 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나를 자렘바에게 소개했고, 자렘바는 학생으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용기를 북돋워 줬다. 그는 나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음악에 전념하라고 권유했다. 그것이 1861년의 일이었다. 이듬해 안톤 루빈스타인이 음악원을 열었다. 자렘바는 음악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고, 내게 입학을 원했다. 나는 때맞춰 입학했다. 스물두 살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피아노를 꽤 잘 쳤고 모차르트, 그중에서도 <돈 조반니>를 열렬히 좋아했고, 이탈리아 음악을 숭배했다(지금은 덜하지만).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도 얼마간 익숙했다. 다른 말로 나는 음악을 잘 몰랐다.

이탈리아 음악이라면 나도 숭배하지.. 길을 여시오...

나는 여전히 법무부에 적을 두고 음악원을 다녔다. 그러나 병행은 불가능했다. 선택해야 했다. 아버지는 이미 나를 좋은 공무원으로 만들려고 많이 희생하셨지만, 이번에도 음악에 전적으로 전념하도록 도와주셨다. 그렇게 나는 자렘바에게 화성학과 대위법 그리고 푸가를 배웠다. 그는 능력 있고 열정적인 스승이었고 강의는 명확하고 생동감 있었다. 기악법과 작곡은 안톤 루빈스타인에게 배웠다. 그의 교수법이 정말 실용적이었음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를 매우 존경했고 그의 마법적인 매력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이 천재적이고 기품 있고 너그러운 예술가는 운 좋게 그와 가까운 모든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는 전심으로 내가 하는 일에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그러면서 새로운 시류에 대한 나의 공감이나 베를리오즈 또는 바그너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는 시도를 가로막지 않았다.

따라갈 만한 발자취

나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초대를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겨우 벗어났다. 그는 내게 막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자리를 맡아달라고 청했다. 그의 제안은 더없이 좋은 시기에 왔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재산을 모두 소진했다. 노년에 정부 일에서 은퇴한 뒤로 시베리아의 내 누나 집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그 결과 나는 자립해야 했지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생필품조차 부족할 만큼 가난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내게 처음 해준 일은 부끄럽지 않을 옷을 입히는 것과 적당한 숙소를 찾아주는 것이었다.

루빈스타인이 차이콥스키에게 사준 옷과 피아노,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박물관

나는 곧 이 훌륭한 신사와 가장 가까운 우정을 나눴으며, 그는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나는 음악원에서 십 년 동안 가르쳤다. 나는 양심적으로 최선의 의무를 다했지만, 가르치는 것은 내 일이 아니었고 나는 기껏해야 평범한 선생이었다. 이제 와 내 음악원 시절 수업을 돌이켜보면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얼마나 진이 빠지는 일이었던가! 거기에 빼앗기는 시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했던가! 그러나 당시 나는 젊었고 날마다 여섯 시간의 수업을 하고도 꾸준히 작곡에 매진했다. 나는 짜임새 있는 생활을 했고, 어디도 나가지 않았고, 음악원 이후 시간을 작곡하는 데 할애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지휘로 연주된 내 첫 관현악은 (미 출판된) 연주회 서곡 F장조였다. 내가 쓰는 모든 작품이 루빈스타인이 지휘하는 황실 음악협회에서 연주된다는 사실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관현악법에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자기 작품을 들을 기회를 얻지 못한 작곡가는 불행하다.

기회를 줘도 못 들으니 어쩔 건가!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10년 동안 그토록 싫어한 가르치는 일과, 남은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던 행복한 작곡 사이를 오갔다. 그러나 결국, 이런 분명한 구분조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내 친구들은 모두 도수 높은 술을 들이켰고, 나도 전보다 과실주를 더 많이 마셨다. 나는 곧 그전까지는 피하려 했던 술자리에 더 자주 끼게 되었다. 일에 관한 스트레스와 이런 음주 습관 때문에 신경계를 망치고 말았다. 1877년 나는 병을 얻었고 음악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듬해 교수로 복귀하긴 했지만, 오히려 화성학과 관현악법에 대한 나의 혐오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가르치는 일을 영영 그만두게 했다. 그 뒤로 나는 남부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모스크바 근교에서 자유롭게 살아왔다. 작곡만이 내 유일한 직업이 되었다.

지휘할 맛!

마흔여섯 살까지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휘에 대한 염증은 명백해서 생각만 해도 몸서리칠 지경이었다. 나는 두 차례 바통을 받아 지휘해 보았지만 매번 부끄럽기만 했다. 3년 전 내 오페라 <요녀Charodeyka>를 리허설할 때였다. 모스크바 황실 오페라 음악감독이던 알타니가 병에 걸렸다. 그는 몇 달 뒤에도 완쾌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수줍음을 극복하고 지휘봉을 들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극장 측을 제안했고 허락을 얻었다. 오페라를 상연할 시기에 맞춰 알타니가 돌아왔지만 나는 계속 리허설을 지휘했고 알타니의 격려와 지도 덕에 이번에는 그동안 그렇게 무섭던 일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 뒤로 나는 러시아와 해외에서 자주 지휘봉을 휘두른다.

벨칸토는 잊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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