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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Oct 10. 2020

레베디노예 오제로

백조의 호수

차이콥스키는 186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새로 문을 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부임한다. 설립자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그에게 일자리뿐만 아니라 입을 것부터 살 곳까지 모두 구해주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박물관은 차이콥스키의 첫 살림살이를 잘 전시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박물관. 사진이 차형과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다

루빈스타인이 사준 옷과 모자, 지팡이이며, 카드가 펼쳐진 책상과 의자가 정겹다. 차이콥스키는 곧 또 한 사람의 은인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베기체프(Vladimir Petrovich Begichev, 1828-1891)를 만났다.

블라디미르 베기체프

모스크바 대학을 나와 관직을 두루 맡던 베기체프의 마지막 자리는 모스크바 황실 극장 감독이었다. 186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그의 집은 많은 예술가가 모이는 만남의 장소였다.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와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 작곡가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시스키와 알렉산드르 세로프 그리고 루빈스타인과 차이콥스키가 주요 멤버였다. 이 무렵 베기체프는 두 아들이 있는 미망인 마리야 실롭스카야와 재혼했다. 마리야 실롭스카야 자신이 성악가로 무소륵스키와 발라키레프에게 곡을 헌정받을 만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두 아들이 차이콥스키의 제자이자 친구 콘스탄틴과 블라디미르 실롭스키 형제였다.

앞서 본 적이 있는 형제이다

베기체프는 양아들 블라디미르를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차이콥스키 교수를 매우 좋아했다. 1868년 베기체프는 아들과 선생을 데리고 베를린과 파리로 여행을 간다. 차이콥스키로서는 1861년 이후 두 번째로 제국의 국경을 벗어나는 여행이었다. 1872년에는 당대 제일의 극작가이자 살롱의 단골손님이던 오스트롭스키에게 『눈 아가씨』를 쓰도록 권한다. 베기체프는 차이콥스키가 이 연극에 음악을 붙이도록 주선한다.

오스트롭스키 <눈 아가씨>의 부수음악 중 '광대의 춤'. 이런 건 터치다운 할 때나 보는 건데...

뒷날 같은 대본을 가지고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오페라를 쓴다. 그러나 베기체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발레 <백조의 호수Lebedínoye ózero>를 위촉한 것이다. 대개 <백조의 호수> 이야기는 차이콥스키가 카멘카의 누이 알렉산드라의 아이들을 위해 직접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맘씨 좋은 삼촌과 조카들 사이에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좀 더 분명하게 모데스트 차이콥스키는 전기에 베기체프와 황실 발레단 무용수 바실리 겔처Vasily Geltser를 공동 대본작가로 언급했다. 2015년에 발견된 볼쇼이 극장 자료에 따르면 두 사람에 더해 당시 프리마 발레리나이던 리디야 게이텐Lidiya Geyten이 이야기를 함께 만들었다. 보헤미아 출신으로 안무를 담당했던 율리우스 라이징거Julius Reisinger의 개입설도 있다.


1875년 7월 30일 베르봅카에서 교향곡 3번을 마친 차이콥스키는 8월 26일 곧바로 봄에 베기체프가 위촉한 <백조의 호수>에 착수한다. 모스크바로 돌아와 이듬해 봄까지 작업한 끝에 작곡을 마친 차이콥스키는 악보에 이렇게 적었다.

끝!!! 글레보보, 1874년 4월 10일

글레보보Glebovo는 실롭스키의 별장이 있는 모스크바 외곽 마을이었다. 그는 다음 해, 1877년 초여름 이곳에서 <예프게니 오네긴> 가운데 ‘편지의 장면’을 시작한다.

글레보보의 연못

앞서 대본의 출처를 시시콜콜 따진 이유는 초연 뒤로 수많은 개작을 거친 뒤에 얘기가 다소 엉뚱하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공연되는 <백조의 호수>의 대본이 차이콥스키 무대 음악 가운데 가장 엉성하다고 생각한다. 오페라는 원작이 소설이거나 희곡이기 때문에 등장인물과 장면을 덜어내고 압축해야 한다. <백조의 호수>와 같은 ‘창작 발레’는 상세한 원작이 없으므로, 스케치 위에 무용으로 세부를 완성해야 한다. 그런데 뒤에 남은 사람들이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상관없이 이 작품을 괴상하게 만들었다. 초연 프로그램에 인쇄된 줄거리를 꼼꼼히 들여다보자.

때와 장소: 중세 독일

제1막. 지크프리트 왕자가 친구, 백성과 성년식을 축하한다. 지크프리트의 어머니인 왕비가 들어와 왕자의 혼사를 서두르겠다고 한다. 왕실 혈통을 굳게 하기 위해서이다. 왕비는 내일 열릴 무도회에서 귀족의 딸 가운데 신붓감을 고르라고 명한다. 잔치가 끝나고 지크프리트와 친구 벤노는 한 무리 날아가는 백조를 보고 그것을 사냥하러 간다.     

제2막. 지크프리트와 벤노는 백조를 쫓아 호수로 왔지만, 허탕 친다. 왕관을 쓴 여인이 들어온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오데트라 밝히고 왕자가 사냥하려던 백조 가운데 하나라 말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착한 요정이었는데, 한 기사와 결혼했다. 어머니가 죽자 기사는 재혼했다. 마녀인 오데트의 계모는 수양딸을 죽이려 했지만, 할아버지가 그녀를 구했다. 오데트의 할아버지는 딸의 죽음을 너무 슬퍼해 그가 흘린 눈물이 호수가 되었다. 오데트와 시녀들은 할아버지와 호수에 살며 원할 때는 백조로 모습을 바꿨다. 계모는 여전히 그녀를 죽이려고 올빼미로 변해 기회를 엿본다. 그러나 왕관이 오데트를 지켜준다. 오데트가 결혼하면 마녀는 그녀를 죽일 수 없다. 지크프리트는 오데트를 시랑하지만, 오데트는 마녀가 그들의 행복을 앗아갈까 두려워한다.     

제3막. 왕자는 무도회에 온 귀족 처녀들을 마다한다. 로트바르트 남작과 그의 딸 오딜이 도착한다. 오딜이 오데트를 닮았다는 지크프리트의 말에 벤노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크프리트는 오딜과 춤추면서 점점 그녀에게 반하고 마침내 결혼을 맹세한다. 그 순간 로트바르트가 악마로 변하고, 오딜이 비웃는다. 그때 왕관을 쓴 백조가 창가에 나타난다. 왕자는 성 밖으로 뛰어간다.     

제4막. 오데트는 울면서 시녀들에게 지크프리트가 약속을 깼다고 말한다. 지크프리트가 오는 것을 본 시녀들은 오데트에게 함께 피하자고 권하지만, 오데트는 마지막으로 그를 보고 싶어 한다. 폭풍우가 인다. 지크프리트가 들어와 용서를 구한다. 오데트는 거절하고 떠나려 한다. 왕자가 왕관을 낚아채 호수에 던지며 외친다.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영원히 함께 있겠소”라고. 올빼미가 날아와 왕관을 물어간다. “무슨 짓이에요! 난 죽어요!” 오데트가 외치고 지크프리트의 팔에 스러진다. 폭풍에 넘친 호수가 오데트와 지크프리트를 삼킨다. 폭풍우가 가라앉자 백조들이 호수에 나타난다.     

초연 프로그램을 보고 이미 알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좀 더 세심한 독자라면 뭔가 확인하고 싶은 점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 익숙한 줄거리는 차이콥스키가 세상을 떠난 뒤 마리위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주도한 공연을 위해 동생 모데스트 차이콥스키가 고친 것이다. 2, 3막을 합쳐 전 3막 판으로 보기도 한다.

제1막. 멋진 정원 뒤로 멀리 성이 보인다. 냇물 위로 우아한 다리가 놓였다. 지크프리트 왕자와 친구들이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며, 다가오는 성년식을 축하한다. 농부들도 왕자를 축하한다. 왕의 스승 볼프강이 농부들을 초대해 춤을 권한다. 왕자가 그들에게 술을 내리고, 여자들에게는 꽃과 리본을 하사한다. 원무(圓舞) 뒤에 뜻밖에 지크프리트의 어머니인 왕비가 도착해 내일 열릴 무도회에서 신붓감을 고르라고 말한다. 지크프리트는 마지못해 동의하고 왕비가 퇴장한다. 왕자는 이것으로 자유로운 생활도 끝이라고 말한다. 왕자의 친구 벤노가 위로한다. 잔치가 계속되고 볼프강이 함께 춤을 추려 하지만, 이미 취한 데다가 나이 탓에 넘어진다. 해가 지고 밤이 되자 손님들은 술잔을 들고 마지막 춤을 추자고 제안한다. 공중에서 백조 한 마리가 날아오자 벤노가 사냥을 권한다. 볼프강은 자러 가자고 한다. 왕자는 볼프강의 뜻에 따르지만, 스승이 나가자마자 총을 들고 벤노와 함께 백조가 날아간 쪽으로 달려간다.     

제2막. 숲으로 둘러싸인 산속. 뒤편 호수 위로 달이 비친다. 오른쪽은 무너진 예배당이다. 왕관을 쓴 백조가 무리를 이끌고 우아하게 수면 위로 미끄러진다. 왕자와 벤노가 들어온다. 지크프리트가 백조를 보고 불을 피울 준비를 하자 백조가 폐허 뒤로 사라진다. 폐허가 마법의 불로 빛을 발한다. 두 남자가 살펴보러 다가가자 한 여인이 계단에서 내려온다. 흰옷을 입고 왕관을 손에 들었다. 그녀는 왕자에게 왜 괴롭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자신이 오데트 공주이며, 사악한 계부가 마법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한다. 그녀를 보호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물려준 왕관이다. 결혼 서약만이 저주를 풀 수 있다. 그녀와 시녀들은 낮에는 백조가 되었다가 밤에만 사람으로 돌아오는 저주에 걸렸다. 올빼미로 변신한 사악한 마법사가 왕자를 위협한다. 한 무리의 백조 시녀들이 들어와 젊은 사냥꾼들을 탓한다. 오데트는 해치지 않는다며 그들을 안심시킨다. 지크프리트가 무기를 버린다. 백조들이 춤을 추고 지크프리트는 오데트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왕자에게 내일 열릴 무도회를 일깨우지만, 지크프리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맹세한다. 오데트는 내일 무도회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한다. 새벽이 온다. 오데트와 시녀들이 폐허로 사라졌다가 이내 백조가 되어 호수로 날아간다.     

제3막. 성안 무도회장. 볼프강이 시종들에게 손님을 들이라고 명한다. 왕비, 지크프리트, 시종과 난쟁이들이 들어온다. 시종장이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고 손님을 소개한다. 나이 든 백작 부부와 딸이 들어온다. 딸은 기사 하나와 춤춘다. 여섯 후보 공주가 부모와 도착해 한 번씩 왕자와 춤을 춘다. 몇 번의 만남 뒤에 왕비는 아들에게 간택하라고 말하나, 그는 따르지 않는다. 화가 난 왕비는 볼프강을 불러 그를 타이르라고 명한다. 팡파르가 새로 울리고 폰 로트바르트 남작이 딸 오딜과 도착한다. 지크프리트는 오데트와 닮은 오딜에 반한다. 왕자는 벤노에게 동의를 구하지만, 친구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는다. 지크프리트는 반갑게 오딜을 맞고 무도회가 계속된다. 여러 공주를 위한 춤이 잇따르고 왕자와 오딜은 이인무를 춘다. 여러 나라 무용이 이어진다. 왕비는 왕자가 오딜을 선택해 기뻐한다. 왕자는 오딜과 결혼을 발표하고 손에 입을 맞춘다. 왕비와 로트바르트가 손을 맞잡는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부엉이가 울면서 폰 로트바르트가 악마의 모습을 드러낸다. 백조 모습의 오데트가 창가에 희망 없이 등장하고 오딜은 큰 소리로 비웃는다. 지크프리트가 경악하고 약혼녀의 손을 뿌리친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성을 뛰쳐나간다.     

제4막. 다시 호숫가 빈터. 백조들이 어디로 간 줄 모르는 오데트를 기다린다. 어린 백조들이 기다리는 동안 춤을 춘다. 오데트가 절망해 돌아와 모두에게 자신이 배신당했고 희망은 없다고 말한다. 시녀들이 만류했지만, 오데트는 숲으로 달려온 지크프리트를 마지막으로 만나려 한다. 지크프리트는 오데트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무력한 그녀는 폐허로 뛰어 들어간다. 왕자가 따라가 그녀의 손을 잡고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외친다. 그는 그녀 손에 든 왕관을 폭풍이 몰아치는 호수에 던진다. 머리 위를 날던 부엉이가 발톱으로 오데트의 왕관을 잡아챈다. 오데트는 왕자의 품에서 죽는다. 백조들의 마지막 슬픈 울음이 들린다. 연인은 넘치는 호수에 잠긴다. 물결이 잦아들자 백조들이 고요한 호수 위로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별 차이를 모르겠다면 할 수 없지만, 내가 보기에 수정된 줄거리가 훨씬 어수선하다. 결혼 적령기 선남선녀라면 대개 빨리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싶어 한다. 초연 때 왕자는 별생각 없었는데, 개정판에서는 머리가 복잡한 사내로 나온다. 아직 십 대 왕자가 더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결혼을 꺼리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춘기 일탈이라 치부하기에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안무가가 순수한 지젤을 농락했던 알브레히트를 모델로 했거나 타티아나를 울렸던 난봉꾼 예브게니 오네긴을 예고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동성애를 암시하는 것일까? 그런 왕자가 사냥터에서 만난 백조 공주에게 반한다.


2막의 차이가 가장 크다. 그리고 개정판은 얘기를 맘대로 뜯어고쳤다. 원래 공주는 요정의 딸이며, 마법사가 밤낮으로 백조와 인간의 모습을 오가게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호하고 싶을 때 백조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데스트는 마법사 계부가 인간 공주에 흑마법을 건 것으로 만들었다. 초연판은 할아버지의 역할도 강조했고, 백조는 왕자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무작정 바라기보다는 어찌 될지 모를 미래를 두려워한다. 이 미묘한 차이가 상당히 중요하다. 초연판의 오데트는 백조 기사에게 매달리는 바그너 <로엔그린>의 수동적인 엘자보다 페미니스트이다.

타티아나와 렌스키네?

3막은 초연판과 수정판이 거의 같다. 초연 때는 마녀였던 계모를 3막에서 계부 로트바르트로 바꾸지만, 수정판에서는 처음부터 아버지인 점이 다르다. 친구가 아니라는데 오딜이 오데트를 닮았다고 우기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대개 두 역할은 한 사람이 추기 때문이다.

로트바르트는 붉은 수염이란 뜻이다. 이탈리아 말로 바르바로사. 히틀러의 소련 침공 작전명이다

4막에서 확실히 초연판이 더 설득력 있다. 해피엔딩을 바라는 관객에게 왕자의 사랑을 거부하는 공주의 예상외 반응은 양쪽 모두 같다. 설상가상 왕자도 왕관을 던져버려 산통을 깨고 만다. 그러나 앞서 본 대로 초연판은 2막에서 공주가 왕자에게 먼저 구해달라고 하지 않았고, 맹목적인 희망보다는 걱정을 내비쳤기 때문에, 이제 와 용서해 달라는 왕자의 행동이 부질없어 보인다. 수정판에서는 2막에서 왕자와 오데트가 관객의 희망을 한껏 부풀렸기 때문에, 4막의 체념이 느닷없고 실망스럽다.


나의 독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독자는 발레가 두루뭉술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면 과연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그 미묘한 차이를 표현할 수 있을까? 당연하다. 그러라고 돈 주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 이름을 남긴다.


1895년 마리위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죽은 <백주의 호수>를 살렸을 때 오데트/오딜은 피에리나 레냐니Pierina Legnani가 추었다. 황실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이던 그녀가 1901년 모국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에는 마틸데 체신스카야Mathilde Kschessinskaya가 백조를 맡았다.

레냐니와 체신스카야. 짧고 굵다

러시아 마지막 황실에서 황후가 요승 라스푸틴에게 홀린 이야기는 많이 알려졌지만, 그보다 먼저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마틸데 체신스카야에 눈이 멀어 물불 가리지 않은 사실은 덜 알려진 듯하다. 2017년 러시아에서 만든 영화 <마틸다Matilda>는 그녀가 얼마나 치명적인 요부였는지 보여준다.

잘 만들었는데, 원래 얘기가 좀 짜증 난다. 마지막 황제가 오죽하겠나!

그러나 더욱 인상적인 영화는 <화이트 크로우The White Crow, 2019>이다. 영국 배우 레이프 파인스Ralph Fiennes가 감독하고 출연한 <화이트 크로우>는 소련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의 프랑스 망명을 그렸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바가노바 발레 학교 스승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푸시킨Alexander Ivanovich Pushkin을 파인스가 직접 러시아어 대사로 연기했다. 푸시킨은 누레예프 말고도 올레그 비노그라도프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길러낸 러시아의 거목이었다. 그는 누레예프를 최고의 무용수로 키웠을 뿐만 아니라 당국과 마찰을 빚는 제자의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누레예프는 1961년 파리 순회공연을 마치고 다른 단원이 런던으로 이동할 때 혼자만 소련으로 송환된다. 그는 공항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에 망명을 요청하고, 그 뒤로 두 번째 삶을 산다. 발레리노 올레그 이벤코Oleg Ivenko는 누레예프와 외모도 닮았고, 연기도 훌륭했다. 

보면 볼수록 좋다. OST 바이올린 연주는 리사 바티아슈빌리

훨씬 전에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라는 영화가 이 사건을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20세기 발레단Ballet du XXme Siècle 주역 호르헤 돈이 가상 인물로 출연하는데, 그가 바로 누레예프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이 느리게 연주되는 동안 공항의 누레예프가 KGB 요원을 뿌리치고 프랑스 경찰의 보호에 몸을 던진다. 

대단한 영화, 이렇게 찍었구나... 망명 장면은 2:56부터

<화이트 크로우>를 좀 더 살펴보자.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태어나 아버지 없이 자란 유년기. 그러던 어느 날 징집되었던 아버지가 돌아온다. 일랴 레핀이 그린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를 아는 사람은 파인스 감독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레핀의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내가 니 애비다!"

엄마와 세 누이 아래 계집애같이 자란 아들과 무뚝뚝하고 거친 아버지의 첫 만남은 정말 기대하기 싫은 어색함만 흘렀다. 그러나 파인스는 여기서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걸린 레핀의 그림을 보여주는 대신, 누레예프가 학교 다닌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렘브란트 <탕아의 귀환>을 보여준다.

무서운 손
따뜻한 손
렘브란트 판 레인, <돌아온 탕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아버지가 곰사냥을 나갔다가 아들을 숲 속에 홀로 남겨두는 장면도 누레예프와 상관없는 모스크바 그림이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그림이 떠오른다. “소나무 숲” 하면 이반 이바노비치 시시킨Ivan Ivanovich Shiskin이고, 트레티야코프 그림은 녹음(綠陰),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영화와 같은 설경(雪景)이다.

군불을 쬐는 루디
곰이 잡아간 듯..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진짜 얘기는 이제부터이다. 어머니 손을 잡고 처음 발레를 본 뒤부터 춤은 그의 인생이 되었다. 극장을 두리번거리는 소년의 큰 눈은 이내 망명 전날 파리 공연과 겹친다. <백조의 호수> 1막의 ‘파 드 트루아’, 대개 전체 가운데 주목받는 장면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히 이 부분이야말로 왕자의 우울함 그 자체이다.

"나 장가 안 갈래"

왕자는 내일 신붓감을 고르고 싶지 않다. 누레예프는 소련으로 돌아가기 싫다. 바로 뒤에 올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오네긴이 느낄 우울함이다. 그러고 보면 뒷날 모데스트가 수정한 줄거리를 이해하게 된다.

"장가 갈래"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이어간 뒤에 파인스는 망명 전야와 <백조의 호수> 3막을 연결한다. 오딜에 홀린 지크프리트는 약혼을 자축한다. 2막 ‘파 드 되’의 코다는 또 다른 영화 <블랙 스완>에서 내털리 포트먼의 두 팔에 검은 깃털이 돋게 만들던 바로 그 음악이다.

이 다음 장면인데, 해적 영상뿐이네

누레예프 영화에서 <백조의 호수>를 사용한 것은 당연하다. 그는 이 발레의 대명사가 된 작품을 빈 국립 발레단과 영상물로 남겼고, 만년의 파리 오페라 발레단 안무는 아직도 정기적으로 후배들에 의해 무대에 올라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주연을 맡았던 파인스가 국경을 거부한 예술가를 조명한 것은 숙명처럼 보인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역시 구스타프 아셴바흐의 후예들이다.


<백조의 호수>를 처음 보는 사람은 2막의 아기자기한 군무를 가장 좋아한다. 네 마리(?) 어린 백조의 춤과 이어지는 어른 백조의 우아한 춤은 누구나 발레 팬으로 만들 만하다.

아직 생닭

그런데 누레예프의 안무는 4막에서 돋보인다. 1895년 프티파/이바노프 수정판을 공연한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발레단의 영상물은 내게 익숙한 4막의 군무가 나오지 않는다. 프티파/이바노프 수정판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 누레예프의 군무는 2막에 처음 백조들이 등장하는 장면보다 훨씬 짜임새 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해서 수없이 돌려보는 장면은 오딜의 등장이다. 물론 오데트가 검은 옷으로 바꿔 입고 춘다. 판본별로 로트바르트가 그녀를 왕자에게 인도하기도 하고, 곧바로 이인무를 추기도 한다. 오딜은 사실 큰 힘 들이지 않고 왕자를 사로잡는다. 그저 한 바퀴 돌고 멈추고를 반복할 뿐이다.

결국 오골계에 빠진 지크프리트

누레예프의 영원한 파트너였던 마고 폰테인부터, 전 세계 수많은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를 ‘별étoile’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차이콥스키의 음악이다. 무도회의 마지막 곡 ‘마주르카’에 이어지는 ‘파 드 되’가 시작되면 어제까지 장가가기 싫던 지크프리트가 당장 마음을 바꾼다. 로잘린을 사랑하던 로미오가 그의 사촌 줄리엣을 보자마자 맘을 바꾸어, “지금까지 내가 한 것이 사랑이기나 하단 말이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이 음악은 여기서 나와도 된다

흥미로운 것은 차이콥스키가 <백조의 호수>에 자신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백조의 호수> 초연 얼마 뒤에 빈에서 레오 들리브(Léo Delibes, 1836-1891)의 <실비아Sylvia>를 관람했다. 동시대 프랑스 작곡가 들리브는 <지젤>을 쓴 아돌프 아당에 이은 프랑스 발레 음악의 대표주자였다. 이미 <코펠리아>로 성공을 거뒀고, 바그너의 영향을 듬뿍 녹여낸 <실비아>도 한창 흥행 중이었다. 존 노이마이어가 파리에서 안무한 <실비아>를 처음 보았을 때 나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이렇게 멋진 게 다 있나?”

노이마이어 발레 중에 제일 좋다. 들리브의 <실비아>. 파리 공연이 더 예쁨

숲과 사냥의 여신 디아나를 수행하는 님프 실비아와 그녀를 사랑하는 아민타, 연적 오리온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큐피드가 해결해 주는 내용이다. 극 중 사냥 나팔은 바그너의 <지크프리트>로부터 가져왔음에 분명하고, 색소폰까지 동원하는 섬세한 관현악은 과연 차이콥스키도 혹할 만했다. <실비아>의 진가가 좀 가리긴 했지만,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그만 못하다고 할 사람도 많진 않을 것이다. 그가 바그너에 대해 가진 복잡한 경쟁심을 <백조의 호수>만큼 잘 정리한 음악도 없다. 내 또래나 그 위로 흑백 브라운관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찬 바람이 불 때마다 “감기 조심하세요”라며 나타났던 성냥팔이 소녀 뒤로 흘렀던 음악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뒤로 백조의 라이트모티프만 나오면 “감기 조심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바그너도 라이트모티프를 이보다 잘 쓰진 못했다!

여름날의 노보데비치.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가 처형될 뻔한 담벼락

차이콥스키의 자신없음과 달리 오늘날 <백조의 호수>는 발레의 대명사이다. 튀튀만 봐도 백조가 생각난다. 어쨌든 발레는 춤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백조의 호수>가 받는 갈채는 음악가뿐만 아니라 프티파/이바노프, 누레예프와 같은 인형극사와 그들의 조종에 충실하게 영혼을 맡겼던 무용수가 나눠 받아야 한다. 다만 나는 매슈 본Matthew Bourne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동성애자라서가 아니라, 차이콥스키가 의도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늘 하던 대로 소년의 망상과 동성애가 빚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면 새로 음악을 만들어 쓰면 된다. 만일 그랬다면 흥미로운 생각을 보탤 수 있다. 가령 흑고니는 종의 4분의 1이 동성으로 쌍을 이룬다. 왕자가 백조가 아니라 흑고니에 끌리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뿐만 아니라 무용의 완성도도 낮다. 그는 자신의 줄거리를 위해 고전 무용의 수준을 희화화한다. 모리스 베자르와 마크 모리스 모두 동성애자이지만, 그들은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다. 혹 벗어난 안무는 내 관심 밖이다.

본의 시도 가운데 내가 높이 사는 것은 ‘창작 발레’이다. 그는 파월과 프레스버거의 유명한 영화 <분홍신The Red Shoes>을 발레로 만들었다. 안데르센 동화와 러시아 발레단의 실화를 결합한 걸작은 본의 아이디어로 새 생명을 얻었다. 그는 영화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재현하면서, 버나드 허먼의 영화 음악을 가져왔다. 허먼의 음악 또한 원래 <분홍신>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히치콕 순혈주의자가 아니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그러기엔 너무 고전이 되었다. 나는 차이콥스키가 본의 <백조의 호수>를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히치콕과 허먼이 발레 <분홍신>을 나만큼 즐기리라 확신한다.

코로나 집콕 버전이다

<백조의 호수> 이야기를 훨씬 깊고 복잡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성격과 맞지 않을 듯하다. 우리말로 된 모스크바 가이드북을 보면 흔히 노보데비치 수도원Novodevichy Convent 호수가 <백조의 호수>의 창작 무대라고 적혔다. 어디서 나온 얘기인 줄은 모르겠지만, 한적한 호수와 주변 공원, 산책로는 모스크바 시민의 쉼터이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방러했을 때 영부인 바버라가 선물했다는 노보데비치 오리 떼. 확실히 백조의 호수는 아닌 듯하다

차이콥스키도 분명 이곳을 찾았을 터이고, <백조의 호수>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몇 번을 가보아도 백조가 노는 모습은 없다. 그보다는 레핀이 그린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여제>나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의 장면으로 더 의미 있을 듯해서 이번에는 수도원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니 내부도 잘 보존되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뿔싸! 입장권을 현금으로만 살 수 있단다. 잔돈 없이 택시 탔다가 거스름돈이 없어 곤란을 겪었을 정도로 러시아는 신용카드 없이 살 수 없게 변했던 터라, 지갑엔 루블이 얼마 없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여제, 1879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린 나는 대신 노보데비치 묘역을 가기로 했다. 이곳은 무료인 데다가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로스트로포비치처럼 소련이 사랑한 음악가들이 묻혔다. 문인으로는 안톤 체호프와 니콜라이 고골, 정치인 흐루쇼프 서기장과 옐친 대통령도 여기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예상보다 성대하게 꾸민 것은 항공 우주 과학자 묘소였다. 오래전 미국에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의 충격을 안겼던 소련의 자존심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하늘을 향한 도전이야말로 신의 영역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다.

패트릭 스웨이지 아님!

또 하나 걸음을 멈추게 하는 무덤 주인은 바리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흐보로스톱스키Dmitri Aleksandrovich Hvorostovsky이다. 그는 지난 2017년 55세 이른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흐보로스톱스키를 향한 모스크바 시민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헌화(獻花)가 한겨울 노보데비치 묘역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의 목소리로 청해 듣는다. 차이콥스키의 로망스, Op 6 No 6,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Net, tol'ko tot, kto z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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