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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Oct 08. 2020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흰까마귀

글린카의 <차르에게 바친 목숨>과 <루슬란과 류드밀라>

1848년 차이콥스키 집안의 가장 일리야는 아내와 다섯 아이를 데리고 안정된 봇킨스크를 떠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새 일자리를 찾으려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구직은 생각처럼 원만하지 못했고, 그는 다시 가족과 함께 우랄산맥으로 돌아와야 했다. 봇킨스크에서도 동쪽으로 640㎞나 더 가야 하는 알라파옙스크Alapayevsk의 제철소가 새로운 일터였다. 일리야는 1849년부터 1852년까지 책임자로 재임했다. 1850년 5월 1일 7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아나톨리와 모데스트 쌍둥이 형제였다. 가족들은 쌍둥이를 ‘톨리야’, ‘모디야’라 불렀다. 특히 막내 모데스트는 형제 가운데 표트르와 가장 가까웠고 뒷날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과 <이올란타>의 대본을 썼을 뿐만 아니라, 형이 죽은 뒤 클린에 박물관을 세웠고, 첫 번째 차이콥스키 전기를 세 권으로 펴냈다. 나는 어찌어찌 봇킨스크까지는 갔지만 알라파옙스크는 무리였다.

겨울 러시아의 낮은 짧지만, 그만큼 밤은 길다. 해가 진 뒤 아쉬워만 하기에는 하루가 꽤 남았다. 독서와 사색의 시간이다. 2020년 1월 러시아에서 보낸 보름 동안 또 많은 이야기가 조합되었다. 발품으로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마저 완성해보자.


알라파옙스크는 뒷날 러시아 혁명 때 로마노프 황실 가족이 끌려와 몰살당한 도시이다. 봇킨스크와 알라파옙스크 사이에 페름이라는 좀 더 큰 도시가 있다. 차이콥스키가 다녀갔다는 기록은 없지만, 가족이 봇킨스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갔다가 더 먼 알라파옙스크로, 또 얼마 뒤 어린 표트르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 갈 때 페름에 들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910년 무렵 페름 전경

페름은 위대한 두 러시아인을 기억하게 한다. 러시아 발레단을 창단한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댜길레프Sergei Pavlovich Diaghilev와 소설가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Boris Leonidovich Pasternak이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앞세워 20세기 초 서유럽에 러시아 문화를 운석처럼 쏟아부은 댜길레프야 우리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으리라. 파스테르나크는 어떠한가?

발렌틴 세로프가 그린 댜길레프, 1904

오데사에서 태어난 레오니트 오시포비치 파스테르나크(Leonid Osipovich Pasternak, 1862-1945)는 러시아 후기 인상주의와 이동파Peredvizhniki 주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889년 피아니스트 로자 이시도로브나 카우프만Roza Isidorovna Kaufman과 결혼해 네 아이를 낳았는데, 장남이 『닥터 지바고』로 노벨문학상을 받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이다.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는 레프 톨스토이와 가까워 그의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장원에 머물며 『전쟁과 평화』와 『부활』의 삽화를 그렸다. 그는 이 삽화로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메달을 받았다. 그 해에 오르세 미술관은 <시험 전야>라는 그림을 사서 지금도 전시 중이다.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가 그린 <시험 전야, 1895>. 오르세 미술관 소장

음악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알렉산드로 스크랴빈도 파스테르나크 부부의 친구였다. 자연스럽게 예술과 가까이 자란 보리스는 특히 스크랴빈의 영향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에 진학했다가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결국 시인의 길을 갔다. 『닥터 지바고』의 복잡한 등장인물 관계도는 마지막에 유리의 이복형 옙그라프 장군이 수많은 전쟁고아 중에서 유리와 라라의 딸 타냐 코마롭스카야를 찾으며 완성된다. 타냐 본인은 부모를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든 발랄라이카가 그녀의 부모가 누구인지 증명한다. 어머니가 죽을 때 유리에게 남긴 악기이기 때문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쯤 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이다.

발랄라이카(숟가락 아님) 연주에 맞춰 추는 글린카의 <카마린스카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장애(그는 낙마에 입은 부상으로 다리를 절었다) 때문에 징집을 면하는 대신 페름의 화학 공장에서 일했다. 이때의 경험이 소설 속 가상의 우랄 도시 유리아틴(유리의 도시라는 뜻이다)을 낳는다. 유리아틴이 바로 페름이다. 유리 지바고는 이곳에서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라라와 재회한다. 라라는 하필이면 그가 책을 빌리러 간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오마르 샤리프가 줄리 크리스티와 만나는 영화 장면은 스페인에서 촬영했지만, 나는 가보지 못한 페름과 알라파옙스크를 영화를 통해 상상한다.

옙그라프는 오비완 케노비가 되고, 스트렐니코프는 음악가의 요양원으로, 오마르는 담배 광고로...

각기 다른 시기에 페름에 살았던 댜길레프와 파스테르나크를 겹치면 차이콥스키가 나온다. 어떻게? 10여 년 동안 유럽의 주목을 받던 댜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은 1921년 런던에서 차이콥스키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Spyashaya krasavitsa>를 공연한 뒤 내리막을 걷는다. 청중의 반응은 좋았지만, 댜길레프 자신이 “잠자는 공주만 있지, 미녀는 없다”라고 한탄했다.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발레단은 점점 기울어갔다.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 가운데 좀 홀대받는 편인 <숲 속의 잠자는 미녀>. 숲이 자는 건 아니다

파스테르나크는 만년에 미완성 희곡 <눈먼 미녀Slepaya krasavitsa, 1969>를 남겼다. 그는 스스로  완성하지 못하리라 예감하고는 아들 예브게니에게 작품의 구상을 얘기해주었다. ‘눈먼 미녀’는, 곧 “자신의 아름다움과 운명을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한 러시아”를 상징한다. 이쯤 되면 이 희곡이 스크랴빈과 더불어 파스테르나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차이콥스키의 두 작품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이올란타>를 합친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올란타> 가운데 '그리움을 왜 몰랐건가'. 아스미크 그리고리안의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100주년 기념 공연

앞서 말했듯이 알라파옙스크에 온 우리의 표트르는 불과 1년 뒤에 혼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다. 부모가 그를 법률학교(아래)에 입학시키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린 아들을 타지에서 홀로 입학시키기 위해 함께 수도로 온 어머니는 1850년 8월 22일 표트르를 처음으로 오페라에 데려갔다. 모자가 본 작품은 글린카의 <차르에게 바친 목숨Zhizn’ za tsarya>이었다. 이 관람의 의미는 소년에게뿐만 아니라 러시아 음악 전체로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Mikhail Ivanovich Glinka, 1804-1857)는 <차르에게 바친 목숨>(1836)과 직후에 쓴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 단 두 개의 오페라로 러시아 음악의 시조가 되었다.

볼쇼이의 <차르에게 바친 목숨> 가운데 폴로네즈로 시작하는 연회

글린카 뒤에 오는 작곡가는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다르고미시스키(Aleksandr Sergeyevich Dargomyzhsky, 1813-1869)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세로프(Aleksandr Nikolayevich Serov, 1820-1871)를 기억해야 한다. 다르고미시스키는 <루살카>와 <석상의 손님>을, 세로프는 <유디트Judith>와 <로그네다Rogneda>를 썼다. 다르고미시스키와 세로프 다음으로 <데몬>을 작곡한 안톤 그리고리예비치 루빈스타인(Anton Grigoryevich Rubinstein, 1829-1894), 그리고 이른바 ‘5인조’(발라키레프, 퀴, 보로딘,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차이콥스키가 뒤를 따른다. 이름도 어려운 시시콜콜한 계보를 늘어놓았으니 이제 줄을 세울 차례이다.

싸우기 싫은데?

글린카의 후예들은 그의 두 오페라 <차르에게 바친 목숨>과 <루슬란과 류드밀라> 가운데 어느 쪽이 훌륭한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차르에게 바친 목숨>은 17세기 로마노프 왕조의 태동을 그린다. 차르가 될 미하일 로마노프를 구하려고 적국 폴란드의 군을 엉뚱한 길로 인도하고 죽은 이반 수사닌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푸시킨 원작의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여러 구혼자와 겨뤄 부마가 된 루슬란이 하늘을 나는 난쟁이 마법사와 싸워 신부 류드밀라를 구출한다는 동화이다. 마치 같은 고양잇과의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를 놓고 논박하는 식이다. 사자와 호랑이가 다른 기후대에 살기에 다툴 일이 없는 것처럼, 또는 설령 싸운다 해도 체급과 성질에 따라 결과가 다를 것처럼 애초에 어이없는 대결처럼 비칠지 모른다. 깊은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좀 더 비유해보자.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수상의 노래로 시작하는 브람스 소나타 2번

같은 시기를 산 베토벤과 슈베르트 가운데 누가 더 좋은가? 위대하냐고 물으면 베토벤이 우위일지 몰라도, 호불호를 따지면 슈베르트를 택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바그너와 브람스는 어떠한가? 모르긴 해도 팽팽할 것이다. 나는 차이콥스키의 책을 쓰는 중이고, 그가 러시아 작곡가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맞수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는다. 결국, 뒤에 가서 스트라빈스키가 양자를 화해시킬 것이다.     

구혼 경쟁에서 탈락한 라티미르와 파를라프를 위로하는 류드밀라 네트렙코

오늘날 <차르에게 바친 목숨>과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인기를 따지자면 후자가 월등하다. 들을 기회로나 유명한 곡조로나 전자가 따를 수 없다. 단골로 연주되는 서곡이나, 주요 아리아, 발레 모두 <루슬란>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 지난겨울 마린스키 극장에서 실연으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화려한 무대와 의상, 연주는 기대했던 대로였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막간에 방금 들은 아리아와 합창을 흥얼거리는 청중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보고 들은 이들에 비하면 난 정말 신참이었다. 그러나 나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1992년 케네디센터 공로상Kennedy Center Honors Award을 받을 때 후배들이 불러주던 <차르에게 바친 목숨>의 마지막 합창을 잊을 수 없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애칭이기도 한 ‘슬라바Slava’(영광이란 뜻이다)를 열창할 때 내가 당사자보다 더 감격에 젖곤 한다. 당장 유튜브에서 찾아보라! 하물며 러시아 사람이라면 어떻겠는가? 이 곡을 들을 때면 아마도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아기자기한 음악을 따라 불렀던 마린스키 청중도 목소리가 훨씬 커질 것이며, 눈시울이 뜨거울 것이다.     

기적이랄밖에... 할배에게 영광!

세로프는 1852년 바그너의 『예술작품의 미래Das Kunstwerk der Zukunft』과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를 읽었다. 그는 1858년 드레스덴으로 달려가 <탄호이저>를 보고 리스트와 바그너를 만난 뒤 ‘러시아의 바그너 사도(使徒)’를 자처했다. 그는 <차르에게 바친 목숨>이 애국에 호소하는 오라토리오 정도이며, <루슬란과 류드밀라>가 월등하다는 친구 스타소프를 들이받았다. 세로프는 1858년 에세이에서 “<차르에게 바친 목숨>이 영감의 승리이며, 장엄한 창조물이고, 전체적인 구상을 유기적인 완전체로 만든 모범”이라 치켜세웠다. 한마디로 바그너 이론에 충실한 작품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번득이는 걸작이긴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대본에 매달린 덩어리”라고 깎아내렸다. 가만히 있을 스타소프가 아니다. 그에게 <차르에게 바친 목숨>은 “수동적인 자기희생의 찬양”인데 비해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최고의 “서사 오페라”였다.

발렌틴 세로프가 아버지 사후 그린 초상화

법률학교 동창끼리 음악을 놓고 벌인 자존심 싸움이 되고 만 이 사태에서 후배 차이콥스키는 누구 편이었을까? 그는 세로프 편에 섰다. 이것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인 판단이었다. 먼저 차이콥스키가 먼저 본 글린카 오페라가 <차르에게 바친 삶>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처음 본 것은 그로부터 14년이나 지난 1864년의 일이었다.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던 소년이 가혹한 삶의 도피처로 삼았던 오페라의 인상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았으리라.

차이콥스키와 반대로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스트라빈스키의 첫 오페라로 평생 그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사실 차이콥스키가 바그너 이론에 열광하지도 않았고, <차르에게 바친 목숨>이 세로프의 말처럼 그렇게 바그너 스타일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차이콥스키는 법률학교 선배 세로프에 큰 연민을 가졌다. 세로프도 원치 않는 진학을 했지만, 차이콥스키와는 좀 달랐다. 차이콥스키는 법률학교 졸업 뒤 음악가가 되기로 했을 때 아버지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로프는 가혹한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하고, 공무원이 되었다가 나중에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다. 차이콥스키는 1878년 폰 메크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작고한 선배 세로프를 무척 동정했다. 차이콥스키는 선배가 쓴 오페라 <유디트>와 <로그네다>를 매우 좋아했다. 둘 다 오늘날 제대로 된 음반조차 만나기 힘든 레퍼토리이다. 그러나 역시 홀대받는 차이콥스키의 오페라들에 비춰보면 들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디트 이야기
키예프 공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던 무렵의 이야기

알렉산드르 세로프는 1871년 51세라는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았다. 죽기 전에 그가 몰두하던 작품은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 대본에 붙인 <악의 힘Vrazhya sila>이다. 전설의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이 즐겨 불렀고, 리처드 태러스킨도 대단한 성과로 꼽았지만, 완성을 보지 못했다. 세로프가 대본만 받아 들고 아예 시작도 못 한 작품이 있었으니, 니콜라이 고골 원작의 <대장장이 바쿨라Kuznets Vakula>였다. 차이콥스키는 1874년 이 대본을 오페라로 썼고, 1885년 <체레비츠키>라는 제목으로 개정했다. 차이콥스키가 쓴 열 편의 오페라 가운데 해피엔딩은 이것과 <이올란타>뿐이다. 그래서 나는 <체레비츠키>를 매우 좋아한다. 끝으로 짐작했겠지만, 알렉산드르 세로프의 아들은 댜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과 함께 일했던 화가 발렌틴 세로프이다. 그가 그린 유명한 그림은 <복숭아를 든 소녀>,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이다 루빈스타인의 초상이 있다.

복숭아 림스키 이다

세로프에 얽힌 긴 이야기는 차이콥스키의 법률학교 시절이 불행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부모 뜻을 따랐지만, 결국엔 음악가의 길을 택할 것이다. 학교는, 사자와 호랑이의 싸움과 같은, <차르에게 바친 목숨>과 <루슬란과 류드밀라> 가운데 어느 쪽이 좋으냐에 관심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차이콥스키는 죽기 4년 전인 1889년 독일 출판사를 위해 짧은 자서전(아래)을 썼다. 여기에 당대 음악가에 대한 호불호가 잘 정리되었다.

나로 말하자면, 슈베르트과 베토벤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학창 시절 슈베르트의 연가곡을 다 외우다시피 따라 불렀지만, 이제는 그때만큼 애정은 없다. ‘바그너 대 브람스’라면 후자를 먼저 들었지만, <탄호이저>를 처음 들은 순간부터 나는 바그너의 포로가 되었다. 브람스조차 바그너 팬이었으니 말할 나위 없다. 오페라로 한정하면 모차르트와 바그너를 제일 위에 두고 그 뒤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이콥스키, 푸치니, 비제 따위를 들겠다. 이탈리아 벨칸토 작곡가 순위는 관심 밖이다. 차이콥스키 자서전을 번역하며 엷은 미소가 번진다. 나도 차이콥스키처럼 모차르트가 제일 좋다. 바흐를 제외하면...

무소륵스키의 <육아방>을 들으며 어린 차이콥스키와 이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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