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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Oct 04. 2020

어린 차이콥스키를 만나다

봇킨스크 차이콥스키 박물관과 수태고지 교회

2020년 1월 18일.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우랄산맥 입구 우드무르트 공화국 이젭스크Izhevsk, Udmurt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은 2시간이었지만 시차 때문에 도착과 함께 1시간을 잃었다. 기차였다면 열다섯 시간을 꼬박 달려야 하는 먼 여정이다.

코로나 이전이지만 황량 그 자체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10시 반에 이젭스크에 내린 나는 “차이콥스키 박물관”이라고 영어로 쓴 표지판을 든 마리야 스베타코바Mariya Svetakova를 만났다. 맘씨 좋아 보이는 바실리 아저씨가 모는 낡은 SUV는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르고 달리다가 금방 서버리지나 않을까 싶은 상태였다. 한 시간을 달려 봇킨스크Votkinsk에 도착했다. 1840년 5월 7일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가 여기서 태어났다.

사진에서 본 파란 호수는 꽁꽁 얼어붙었다. 호수인지 모르고 보았으면 들판이라고 생각했을 넓은 얼음판 멀리 이따금 얼음낚시꾼만 눈에 띈다. 그 호숫가에 자리한 노란색 저택이 차이콥스키의 생가이다. 표트르의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 차이콥스키Ilya Petrovich Tchaikovsky는 봇킨스크 인근 광산과 제철소를 책임지는 관리였다.

홈페이지도 잘 만들었다

많은 직원을 거느린 공장을 경영한 만큼 살림살이는 제정 러시아에서도 상류에 속했다. 현재 박물관이 된 사택의 규모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중앙의 살림집 주위로, 마구간과 마부 처소, 하인들이 쓰던 집, 온실, 두 채의 여름 별관 따위가 넓은 관내에 자리 잡았다. 호수를 등지고 박물관을 바라보는 차이콥스키 동상은 소련 대표 조각가 올레그 코모프Oleg Komov가 1990년에 세운 것이다.

호수 위에 띄엄띄엄 보이는 어부를 마리야는 '철학자들'이라 불렀다

학예사 마리야가 곧바로 안내를 시작했다. 이젭스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마리야는 유창한 영어로 멀리서 이곳을 찾는 이방인을 안내한다. 눈 덮인 정원은 쓸쓸했지만, 곳곳에 보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은 정교회 성탄절(1월 6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방구석구석을 장식한 작은 털실 인형은 인근 아이들이 보낸 응모작으로 매년 그 가운데 우수한 작품을 가린다고 한다. 박물관을 책임지는 타티아나 네가노바Tatiana Neganova 관장과는 한 마디도 통하지 않아 서로 눈웃음만 주고받았다.

페치카에 사는 처키

마부 처소에는 페치카가 있고, 그 위에 어린이 인형이 손짓한다. 페치카는 나도 예전 군대 내무반에 있었다고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경험한 적은 없는 실내 난방기구이다.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나보다 젊은 것은 확실한 마리야는 따뜻한 페치카 위는 자연스레 어린이 방이었다고 설명한다. “너도 그랬냐”는 질문에 자신도 “들어서만 안다”라고 수줍게 답한다. 공항에서 오는 한 시간 동안 부지런히 얘기를 나눴지만, 아직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마리야는 러시아말도 못 하는 동양 사람이 차이콥스키 책을 쓴다며 봇킨스크까지 왔다니 신기할 법하다. 나는 퍼뜩 떠오른 알렉세이 킵셴코(Aleksey Kivshenko, 1851-1895)의 그림을 손전화로 찾아서 보여줬다.

러시아 가정의 벽 구석에는 이콘을 건다

쿠투조프Kutuzov 원수가 필리Fili의 한 농가에서 나폴레옹에게 모스크바를 열어주자는 결정을 내리는 참모 회의 장면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왼쪽 위 귀퉁이에서 한 소녀가 염탐한다. 적의 첩자일까? 페치카가 보금자리인 이 집 딸이다. 킵셴코는 러시아의 운명이 결정되던 긴박한 순간, 소녀의 눈을 통해 한 줄기 숨을 불어넣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 이렇게 적었다.     

농부 안드레이 사보스티야노프의 가장 좋은, 널찍한 통나무 집채에서 2시에 회의가 소집되었다. 농부의 대가족을 이루는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이 현관방 건너편 굴뚝 없는 통나무 집채에 모여 북적댔다. 대공작(쿠투조프 원수)이 귀여워해서 차 마시는 시간에 설탕 한 조각을 준 안드레이의 여섯 살짜리 손녀 말라샤만 큰 통나무 집채 페치카 위에 남았다.
말라샤는 페치카 위에서 통나무 집채로 연이어 들어와 성화가 놓인 구석, 성화 아래 널찍한 긴 의자에 자리를 잡는 장군들의 얼굴과 군복과 십자 훈장을 수줍고도 즐거운 표정으로 구경했다.     

별 것 아닌 장면 같지만, 이 그림을 토대로 헨리 폰다와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전쟁과 평화>의 군사회의 장면이 제작되었고, 파리 오페라가 공연한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전쟁과 평화>도 페치카 위의 소녀 말라샤를 빠트리지 않았다.

흉내는 냈지만, 그림이나 소설과는 좀 다르다. 계단이 아니라 페치카에 앉아야... 원수도 반대편에 앉았다

타티아나와 마리야에게 보여준 이 그림 하나로 우리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들은 내가, 러시아 문화가 이룬 많은 것에 얼마나 목마른지 바로 알아차렸다. 벌써 점심시간이다. 일정이 빠듯한 손님을 위해 직접 점심까지 대접한다. 정성껏 마련한 러시아 가정식을 들고 본관으로 향했다. 입구에 걸린 세계 지도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출신 도시를 표시했다. 내가 처음이 아니다. 서울과 대구 그리고 평양에도 작은 표식이 꽂혔다.

맨 왼쪽이 표트르 차이콥스키

현관에는 1848년 4월 25일 일가가 봇킨스크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찍은 사진을 확대해 걸었다. 맨 왼쪽이 여덟 살 표트르이다. 전실 옷걸이와 옷장 모두 180년 전 가족이 쓰던 것이다. 이 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동생 모데스트는 1846년 말 이복누이 지나이다Zinayda가 오던 날 형의 기억을 대신 적었다.     

크리스마스 전 겨울이었다. 그는 가족 모두 흥분했던 순간을 기억했다. 마차 벨 소리가 들릴 때 모두 전실로 뛰어갔다. 문이 열리고 서릿바람이 방안을 파고들면서 작고 아주 예쁜 사람이 집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손님은 소년에게 요정처럼 보였다. 천국의 보물과 기적이 가득한 세상에서 온 것만 같았다.

일리야 차이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산 학교를 나와 예카테린부르크와 페름에서 철광, 소금 광산 일을 하다가 1827년 마리야 카를로브나 케이제르Mariya Karlovna Keizer와 결혼했다. 아내는 딸 지나이다를 낳고 결혼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 아시에르Aleksandra Andreyevna Assier를 새 아내로 맞은 일리야는 그녀와 사이에 일곱 아이를 두었다. 첫째 딸 예카테리나는 아이 때 죽었고, 1837년 봇킨스크에 온 뒤 니콜라이(1838–1911), 표트르, 알렉산드라(1841–1891), 이폴리트(1843–1927)를 차례로 낳았고, 뒤에 알라파예프에서 쌍둥이 아나톨리(1850–1915)와 모데스트(1850–1916)가 태어났다. 은퇴 뒤에 일리야는 세 번째 아내 옐리자베타(1829-1910)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전처가 낳은 자식과 매우 좋은 사이로 지냈다.

차이콥스키가 아홉 살 때 콜레라로 세상을 떠나는 엄마

방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차이콥스키의 어릴 적을 추억하게 하는 유물이 반긴다. 네 살을 넘긴 차이콥스키 가족은 프랑스인 파니 뒤르바흐(Fanny Dürbach, 1822-1901)를 가정교사로 맞는다. 여느 러시아 상류 가정처럼 파니 양(Mademoiselle Fanny)은 아이들에게 불어를 가르쳤다. 표트르는 그녀에게 배운 불어로 시를 썼고, 파니는 제자를 ‘작은 푸시킨’이라 불렀다. 어쩌면 어린 표트르가 뒷날 『예브게니 오네긴』과 『폴타바』, 『스페이드의 여왕』을 오페라로 쓰리라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가족이 봇킨스크를 떠나 파니와 헤어졌을 때 표트르는 불어로 편지를 썼다. 1848년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보낸 편지 일부이다.     

여기는 전에 보지 못한 게 많아요. 아빠는 우리 아파트를 구하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셨어요. 우린 하느님 덕분에 잘 지내요. 파니 양 저를 사랑하시죠? 알려주세요.     

감사하며 제자, 표트르 차이콥스키     
오케스트리온. 오르골을 크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실에는 파니가 아이들을 돌봤던 많은 흔적이 있다. 일종의 자동피아노 오케스트리온Orchestrion은 아버지가 아이들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온 선물이다. 모차르트, 도니체티, 벨리니, 로시니의 곡이 기록된 이 기계는 차이콥스키의 어린 시절 가장 강렬한 음악적 인상을 주었다. 그는 온종일 들어도 싫증 내지 않았다.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소장품은 비르트 회사 그랜드 피아노이다. 원래는 뒷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어머니가 12살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지만, 현재 생가가 소장 중이다. 파니 뒤르바흐는 “페트야(표트르의 애칭)는 마주르카를 연주하고 젊은 폴란드 장교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 마솁스키에게 입맞춤을 받았을 때 뿌듯하고 기뻐했다”라고 추억했다.     

자수로 만든 벽난로 가로막

한 살 어린 알렉산드라는 표트르의 가장 친한 동무였다. 그녀가 가지고 놀던 인형과 부활절 달걀 따위가 바닥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벽난로의 뜨거움을 막아주는 가리게는 어머니가 표트르를 낳던 해에 직접 수놓아 남편에게 준 선물이다. 나는 성년이 된 차이콥스키가 어릴 때 살던 집을 다시 찾은 기분이다. 그는 1878년 ‘슈만풍 스물네 소품’ <어린이 앨범, Op 39>를 작곡했다. 여동생 알렉산드라의 일곱 살짜리 아들 블라디미르 다비도프에게 써 준 소품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아침 기도 – 겨울 아침 – 놀이 목마 – 엄마 – 나무 병정의 행진 – 아픈 인형 – 인형의 장례식 – 왈츠 – 새 인형 – 마주르카 – 러시아 노래 – 아코디언 연주자 – 카마린스카야 – 폴카 – 이탈리아 노래 – 옛 프랑스 노래 – 독일 노래 – 나폴리 노래 – 유모의 이야기 – 마법사 – 달콤한 꿈 – 종달새의 노래 – 손풍금 연주자의 노래 – 교회에서     

내가 지금 집 안팎에 보는 것들이 모두 망라되었다. 이 가운데 ‘옛 프랑스 노래’는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에서, ‘나폴리 노래’는 <백조의 호수>에서 같은 곡조를 다시 만날 터이다.

옥사나 야블론스카야의 앨범. 그의 아들 드미트리 야블론스키는 지휘자이다

러시아의 겨울 낮은 짧다. 수장고를 담당하는 스베틀라나 모로조바 씨가 자료실로 안내한다. 박물관에 다 늘어놓지 못한 가재도구며 기념품을 방마다 보관 중이다. 일리야가 경영하던 광산의 두툼한 장부가 인상적이다.

재산목록

여기에는 당시 직원의 임금과 매출, 생산량 등은 물론이고 관사의 인부와 가구, 살림살이 목록까지 다 적혔다고 한다. 볼쇼이의 전설적 프리마 발레리나 마이야 플리세츠카야Maya Plisetskaya가 기증한 발레복부터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구입해 사인하고 다시 기증한 기념주화까지, 차이콥스키를 사랑했던 소비에트 시절 예술가의 자취도 빼곡하다.

이 옷의 주인이던 마이야 플리세츠카야는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의 아내였다

마리야와 타티아나는 해가 지기 전에 나를 호수 반대편 정교회에 데려가려고 서두른다. 가는 길에 중요한 기념물이 보인다. 봇킨스크 제철소는 철도와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1837년 흑해 함대를 위한 75㎏ 닻이 주조되었을 때 뒷날 차르가 될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봇킨스크를 찾았다. 3년 뒤 1840년 6월 16일 세운 닻 기념비에는 대공과 광산소장 차이콥스키 대령, 공장장 로마노프 소령의 이름이 적혔다.

러일전쟁에서 돌아온 전함 포템킨의 닻도 여기서 만들었을지 모른다

닻 기념비 뒤로 허름한 공장이 보인다. 냉전 시절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생산하던 곳이 바로 봇킨스크이다. 우랄산맥의 철광석과 카마강의 풍부한 수원이 중공업의 밑거름이었다. 차이콥스키가 누린 행복한 성장기의 바탕은 이렇게 불과 철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보겠지만 그의 전성기를 후원했던 폰 메크 부인 또한 철도 사업으로 부를 일군 집안이었다.

카마강에서 유입되는 물을 조절하는 수문이 있다

잠시 느낀 어두운 기운을 저기 보이는 황금색 지붕의 수태고지 교회가 몰아내준다. 타티아나와 마리야가 나에게 박물관에 이어 이 교회를 보여준 것은 당연하다. 차이콥스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가 이 두 곳이기 때문이다. 바실리 예고로비치 블리노프Vasily Yegorovich Blinov 신부는 1811년 이젭스크에서 봇킨스크로 왔다. 바실리 신부의 아버지는 차이콥스키의 할아버지 표트르 표도로비치(차이콥스키의 표트르는 할아버지 이름을 땄다)와 친구 사이였다. 표트르 표도로비치는 친구의 아들 곧 바실리 신부의 대부였고, 뒷날 바실리 신부는 일리야 차이콥스키의 누이동생 결혼식 예배를 집전했다. 수태고지 교회는 1828년에 완공되었다. 내부는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성삼위일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따위 그림을 모사해 채웠다. 내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밀라노에서 보았던 그림들이다.

봇킨스크 수태고지 교회 앞 얼음조각에서 얼음 자세로

바실리 신부와 가족이나 다름없는 일리야가 봇킨스크 광산 책임자로 오면서 수태고지 성당은 종탑을 갖게 되었다. 바로 표트르가 태어난 해였다. 러시아 음악의 아이콘이 될 소년이 태어나기 전에 신부가 이곳에 터전 삼았고, 그의 아버지가 종탑을 세웠으며, 그곳에서 소년이 세례를 받고 배움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지어낸 이야기처럼 운명적이다. 심지어 그 교회 이름이 수태고지이다. 차이콥스키의 생년월일과 세례 받은 날 모두 교회 자료에 남아 있다.


바실리 신부는 광업 부설 학교의 교장으로 학생들에게 직접 산수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무엇보다 표트르는 부모님을 따라 일요일과 축일마다 교회에 가서 듣는 예배음악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바실리 블리노프 신부는 1846년 4월 6일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교회 담 밑에 묻혔다.

게르기예프나 레핀 같은 정상급 연주자를 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값에 볼 수 있다는 봇킨스크 극장. 차이콥스키 덕분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교회는 구악의 근원으로 지목받았다. 성화는 벽 채로 뜯겨 팔렸다. 1841년에 그린 <블라디미르 성모>의 모작도 약탈되었다. 소비에트 붕괴 뒤 복원이 추진되었지만, 예전 모습을 되찾기란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닫힌 문을 열어주고 내부로 안내한 관리인 할아버지는 가끔 벽에 성화가 어른거린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해주며 교회 내부 촬영을 금했다.


벌써 날이 저문다. 마리야와 타티아나는 모스크바로 돌아갈 나를 위해 저녁을 대접하고, 이젭스크 공항까지 다시 데려다주었다. 이번에는 정말 바실리 아저씨의 차가 고장 난다면 비행기를 놓칠 판이었지만, 다행히 나는 공항에 잘 내렸다. 마리야도 박물관에서 만나 결혼한 맘씨 좋아 보이는 남편 콘스탄틴과 아들 마르크가 기다리는 집으로 잘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1848년 봇킨스크를 떠난 뒤로 다시 고향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곳이 별로 좋지 않아서가 아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봇킨스크는 다시 찾기에 너무 오지였다. 그는 평생 여행했고 더 외딴곳도 많이 갔지만, 그것은 친구와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신혼생활을 박차고 무작정 떠난 차이콥스키가 레망 호수에 이르렀을 때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곳은 봇킨스크의 호수를 연상케 했다.

바이올린 협주곡이 잉태된 스위스 레망호

차이콥스키는 세상을 떠나기 전해 1892년 12월에 프랑스 알프스 깊은 시골 몽벨리아르로 일흔 살 노인이 된 ‘마드무아젤’ 파니 뒤르바흐를 찾아갔다. 44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 무렵부터 파니가 차이콥스키에게 보낸 열두 통의 편지가 클린Klin 차이콥스키 박물관에 남아 있다. 역시 불어로 쓴 마지막 편지 일부를 옮겨본다.     

몽벨리아르, 1893년 10월 13일

친애하는 피에르,
네 편지를 막 받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를 거야. (...) 신문에서 러시아 해군 리셉션에 대해 읽었어. 갈라 콘서트에서 세 러시아 작곡가, 글린카와 루빈스타인 그리고 네 음악을 다른 프랑스 작곡가 세 사람의 곡과 연주했다고. 너도 들었겠지. 다른 기사에는 네 얘기만 있었는데, 네가 작곡한 오페라 가운데 좋아하는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지. 네 편지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거절한 거니? 나보다 우리나라에 더 안 된 일이야. 딱한 프랑스 사람들은 합당한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고, 엉뚱한 것에 열광하지.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 실수를 보고 견뎌왔으니, 화내지 않겠지? (...)    

 차이콥스키는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6일 사망했다. 그가 파니의 편지를 받긴 했을까? 차이콥스키의 오페라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훨씬 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어쩌면 아직도...

1973년 흑조를 춘 플리세츠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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