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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Oct 11. 2020

대장장이 바쿨라의 탄생

상트페테르부르크 미하일롭스키 궁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시내와 외곽에 수많은 궁전이 있다. 미하일롭스키 궁전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러시아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짧게 체류하는 관광객은 훨씬 큰 에르미타주 미술관만 구경한다. 에르미타주 소장품은 대부분 서유럽 미술품이다. 일주일은 보통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객이라면 꽤 긴 체류 기간이지만, 나에게는 짧디 짧다. 이번에는 에르미타주를 거르기로 했다. 바로크에서 인상주의까지 미술품은 서유럽에서 수없이 보지 않았던가. 러시아에 왔으면 러시아 미술을 보아야 한다.

아침 9시인데 아직 컴컴

러시아 국립 미술관은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자극을 받아 설립되었다. 사업가 트레티야코프가 자국 미술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독식하다시피 하자, 차르 알렉산드르 3세가 맞불을 놓았다. 레핀의 많은 그림을 트레티야코프가 소장했지만, <자포로제 코사크의 답장>이나 <자유다!>는 러시아 국립 미술관에 있다. 그 밖에도 카를 브륄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 이반 에이바좁스키의 <아홉 번째 파도>와 같은 러시아 걸작을 보려면 여기 와야 한다.

레핀 특별전으로 북적이는데, 저 그림은 원래 이 미술관 거다

2020년 1월 러시아 국립 박물관은 특별전이 한창이다. 일랴 레핀의 탄생 140주년을 기념해 <레핀 특별전>을 열면서,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의 그림까지 몽땅 가져왔다. 나는 모스크바로 돌아가 트레티야코프를 갈 예정이었지만,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이번에는 레핀 그림을 하나도 못 봤을 뻔했다. 레핀 없는 러시아 미술은 나 같은 초심자에겐 셔츠 가운데 단추를 안 채운, 아니 바지 지퍼를 올리지 않은 격이다. 레핀은 푸시킨처럼 역사, 풍경, 서정 주제를 가리지 않고 다 잘 다뤘다. 19세기 후반에 그가 초상화를 그리지 않은 위인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차이콥스키가 없다. 나는 만나는 러시아 사람마다 그 까닭을 물었는데, 아는 사람은 없었다. 유명한 차이콥스키 초상화를 그린 쿠즈네초프는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자.


러시아 국립 박물관이 입주한 미하일롭스키 궁전의 임자 가운데 엘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1807-1873)가 있었다. 차르 파벨 1세의 막내아들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의 아내였다. 이들의 조카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였다. 교외의 파블롭스크 궁전도 대공 부부의 여름 궁전이었다.

파블롭스크의 이른 아침

대공 내외는 19세기 러시아 황실 인사 가운데 가장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 찾은 파블롭스크 숲은 내 예상 그대로였다. 손바닥 위에 빵부스러기를 얹고 기다리자 금방 새가 날아와 무서워하지 않고 먹는다.

전성기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았다. 유럽 최고 무도회 마스터가 아니었던가! 그가 작곡한 <파블롭스크 숲에서Im Pawlowsk Walde>는 빈으로 돌아가 빈의 숲으로 바뀌어 <크라펜 숲에서Im Krapfenwald'l>가 되었다.

파블롭스크 숲에서 뻐꾹

나는 어릴 때 본 디즈니 영화 <왈츠의 왕The Waltz King>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요즘엔 구하지 못할 게 없다. 아마존에서 DVD를 산 나는 당장 한글 자막을 붙였다. 파블롭스크에서 연주하던 슈트라우스가 휴식 시간 봉변을 당한다. 러시아 억양의 귀부인이 그의 분장실에 뛰어들어 ‘사생팬’이라 소개한다. 곧바로 이대근 닮은 그녀 남편이 들이닥쳐 아내를 찾지만, 슈트라우스가 뒷방으로 나가게 한 뒤이다. 남편은 러시아 무슨 대공이라며 결투를 청하지만, 슈트라우스는 자신에게 도착한 수많은 꽃다발을 보여주며 자신은 부인을 유혹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위기를 모면한다. 슈트라우스는 당대 비틀스이자 방탄 소년단이었다.

알렉산드르 넵스키 묘역의 안톤 루빈스타인 무덤

1859년 엘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는 안톤 루빈스타인과 러시아 음악협회를 설립했다. 글린카, 다르고미시스키와 같은 러시아 음악가들이 후원을 받았고, 고전이 되어 가던 독일 음악이 미하일롭스키 궁전에서 연주되곤 했다. 연주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음악학도를 위한 강좌였다. 이 수업으로부터 1862년 안톤 루빈스타인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설립했고, 4년 뒤 1866년엔 동생 니콜라이가 러시아 음악협회 모스크바 지부 음악원을 설립한다. 차이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1회 졸업하고, 곧바로 모스크바 음악원 초대 교수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니 이 또한 붉은 양탄자가 깔린 것 아닌가!

브륄로프가 그린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 러시아 국립 미술관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는 1873년 1월 자신이 태어난 슈투트가르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앞서 보았듯이 그 때문에 차이콥스키 교향곡 2번 초연이 연기되었다. 그러나 훨씬 큰 기회가 잇따랐다. 러시아 음악협회는 3월 3일 경연 개최를 발표한다. 1871년 알렉산드르 세로프가 죽으며 미완으로 그친 오페라를 작곡하는 경연이었다. 고골의 「크리스마스 이브Noch péred Rozhdestvóm」를 토대로 야콥 폴론스키가 만든 대본에 곡을 붙이는 경연의 마감은 1875년 8월 13일까지 2년 남짓이었다. 당선작은 작고한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의 추모작으로 기릴 것이며 상금은 1500루블이었다.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역의 고골 무덤

차이콥스키는 이때까지 세 개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1868년에 쓴 <보예보다Voyevoda>는 오스트롭스키 희곡이 원작이었다. 그는 완성한 작품이 맘에 들지 않아 초연 뒤 폐기했다. 그나마 꽤 여러 악상은 뒷날 쓰는 곡에 다시 사용되었다. 

<운디나>의 아리아. 러네이 플레밍, 참 여러 가지 일을 하셨네...

1869년의 두 번째 오페라 <운디네Undine>는 프리드리히 드 라 모트 푸케Friedrich de la Motte Fouqué 원작에 붙인 인어 이야기이다. 이번에는 극장의 거부로 초연조차 되지 못하고 버려졌다. 그는 <운디네>의 몇 부분을 역시 오스트롭스키의 『눈 아가씨』를 위한 부수음악에 다시 썼다. 기사 훌브란트의 죽음은 뒷날 <백조의 호수> 2막 백조의 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세 번째 오페라 <오프리치니크>는 1870년 2월에 시작해 1872년 4월에 완성했다. 신참에게 오페라는 악보에 다 적었다고 완성이 아니라 무대에 올린 뒤 평가까지 봐야 했다. 초연까지는 2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에 오스트롭스키를 위한 부수음악 <눈 아가씨>와 셰익스피어 희곡에 붙인 교향적 환상곡 <템페스트>가 작곡되었다.


친구 알렉산드르 세로프와 글린카의 <차르에게 바친 목숨>과 <루슬란과 류드밀라> 가운데 어느 쪽이 좋으냐를 좋고 으르렁거리던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세로프가 죽은 뒤에 차이콥스키가 발표한 교향곡 2번을 “러시아 악파의 창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치켜세웠다. 세로프 편을 들던 차이콥스키로서는 뜻밖의 우군을 얻은 것이다. 스타소프는 나아가 차이콥스키에게 조언까지 했다. 1873년 1월 11일 편지에서 그는 고골의 『타라스 불바』,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주제로 교향악을 써보라고 권했다. 차이콥스키는 8월부터 10월까지 매달린 끝에 교향적 환상곡 <템페스트>를 작곡했고, 그해 12월 19일 초연하며 스타소프에게 헌정했다.

전곡은 20분이 넘는다. 1988년 스톡홀름 바사Vasa 박물관 유러피언 콘서트

아직도 <오프리치니크>는 공연되지 못했다. 지연의 가장 큰 이유는 검열이었다. 인민주의자를 뜻하는 나로드니키 혁명 세력은 점점 세를 불렸다. 차르 알렉산데르 2세는 19세기에 러시아가 맞은 가장 성군이었지만, 나로드니키 성에는 차지 않았다. 오프리치니크의 뜻을 안다면 이 작품이 검열의 벽을 넘기 힘든 이유를 단박에 알 것이다. 오프리치니크란 폭군 이반 뇌제의 친위대를 일컫는 말이다. 가장 비슷한 느낌으로 KGB를 들겠다. 뒷날 프로코피예프는 에이젠스테인 감독의 영화 <이반 뇌제>를 위해 쓴 영화 음악을 발레로 편집했는데, 여기에도 ‘오프리치니크의 춤’이 나온다.


1874년 4월 24일 완성된 지 2년 만에 <오프리치니크>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는 앞서 버린 두 오페라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감동도, 개성도, 영감도 없다! 대실수를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오페라 작곡에서 큰 수업을 했다. 연습 때 기초적인 실수를 보면서 다음 오페라에서는 범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출판업자 바실리 베셀에게 말했다. 그러나 베셀은 “공연은 큰 성공이었고, 이것으로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재점화되었다”라고 회상했다.

<오프리치니크>의 유일하다시피 한 동영상도 이분이...

차이콥스키로서는 2년 묵은 작품이 만족스러웠을 리 없다. 그는 늘 성장하는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오프리치니크>를 영상으로 볼 방법은 없다. 다만 2003년 겐나디 로주데스트벤스키가 시칠리아에서 남긴 실황 음반이 이 음악의 공연사에 한 장을 차지한다. 로주데스트벤스키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하자.

차이콥스키가 러시아 국립 음악원의 옐레나 공비 추모작 공모에 관심을 가진 것이 이때이다. 그는 마치 자신의 성장을 보여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는 듯이 <대장장이 바쿨라>에 매달렸다. 1874년 10월 31일 차이콥스키는 베셀에게 오페라가 완성되었다고 편지했다. 그는 마감일을 1875년 1월 13일로 잘못 알았으나, 정확한 날짜는 8월 13일이었다.


날짜가 너무 많이 남은 나머지 차이콥스키는 당선을 기다리기보다는 응모를 취소하고 공연을 서두르고 싶었다. 그만큼 작품에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자신이 얼마나 이 곡에 기대가 크고 인정받고 싶은지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편지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대장장이 바쿨라>는 심사를 기다려야 했다. 차이콥스키는 아예 작품을 익명으로 제출하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라틴어 경구를 곁들였다. 1875년 10월 차이콥스키는 1500루블의 주인이 되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초연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특히 자신은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으면서 늘 불평만 해대는 체자르 큐이가 <대장장이 바쿨라>를 혹평했다. ‘강력한 한줌’은 아무리 잘 봐줘도 5인조는 아니고 4인조이다. 큐이는 재를 뿌리는 것 말고는 존재감이 없다.

라흐마니노프의 첫 교향곡을 요한 계시록의 지옥으로 묘사한 큐이

<대장장이 바쿨라> 이야기는 아래 링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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