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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Oct 13. 2020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보다 중헌 것

비제의 <카르멘>

차이콥스키의 삶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현기증이 난다. 1874년 6월 오페라 <대장장이 바쿨라>를 쓰기 시작해 1876년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할 때까지 2년 반을 예로 들어보자. 이 사이 그는 <백조의 호수>와 피아노 협주곡 1번, 교향곡 3번, 교향적 환상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Francesca da Rimini>를 작곡해 초연했다. 그보다는 비중이 가볍다 해도 현악 사중주 3번, <우울한 세레나데Sérénade mélancolique>, <슬라브 행진곡>이 더 있다. 이는 단순히 수가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페라나 발레와 같은 대작을 쓰면서 여러 편 상대적으로 작은 곡들을 작곡했다는 말이다.

집에 틀어박혀 일만 했을까? 평생 그랬듯이 이때도 차이콥스키는 초인적인 거리를 이동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만 오간대도 700㎞이다. 오늘날 고속열차 삽산Sapsan으로 네 시간 거리이니, 차이콥스키 당대에는 하루가 꼬박 걸렸을 것이다. 그는 반대편 모스크바 남쪽으로도 그만한 거리를 수시로 왕복했다. 또 1875년 12월에는 프랑스에 다녀왔고, 1876년 7월 다시 프랑스를 갔다가 오는 길에 바이로이트에 들렀다. 모스크바에서 파리는 2,800㎞, 현재도 기차로 이틀이 걸린다. 2년 반 사이 지구 한 바퀴(12,742km)는 족히 돌 만한 거리를 이동하며 그는 당대의 거장 한스 폰 뷜로, 카미유 생상스,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다. 주고받은 편지는 수백 통이다. 그러고 보면 <대장장이 바쿨라>가 아직 총각인 차이콥스키에게 참 복덩이였던 셈이다.

늘 이런 식이었다. 다음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쓰고 초연하기까지 2년 동안은 바이올린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 2번, <성 요한 크리소스톰 전례음악>을 썼고, 잠시 장가도 다녀왔다. <오를레앙의 처녀>를 쫓기듯 완성하자마자 <마제파>에 돌입했고, 그 사이 작품은 일일이 댈 수 없을 만큼 많다. 만년으로 갈수록 속도는 무섭게 빠르다. 매년 하나씩 대작을 쏟아내며 틈틈이 절대 작지 않은 곡을 병행한다. 


<만프레트 교향곡>(1885), 오페라 <차로데이카>(1887), 교향곡 5번(1888), <잠자는 숲 속의 미녀>(1889), <스페이드의 여왕>(1890), <호두까기 인형>(1891), <이올란타>(1892), 교향곡 6번 ‘비창’(1893), 이런 식이다. 여기에 또 까마득한 이동 거리와 수많은 만남, 주고받은 편지를 더하면 아찔하다. 거꾸로 그가 가장 사랑한 파리를 방문한 해를 나열해 볼까? 1861, 1868, 1870, 1871, 1873, 1876, 1877, 1878, 1879, 1880, 1881, 1883, 1884, 1886, 1887, 1888, 1889, 1891, 1892, 1893. 33년 동안 스무 번. 1876년 서른여섯 살 뒤로는 17년 동안 거의 매해이다. 파리만 따져 그렇다.

유년과 청년, 만년 모차르트의 여행 경로

20세기 이전에 분야를 통틀어 이런 사람은 모차르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보다 100년 전에 살던 모차르트는 기차가 없었고, 이 정도 거리와 빈도는 아니었다. 더욱이 모차르트는 서른여섯 전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가 그랬듯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에 국한된 사람이 아니었다. 국경이 무의미했다. 불어와 독어를 쓰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영어와 이탈리아 말도 능했다. 다른 슬라브권 언어는 원래 서로 통한다. 나는 폴란드에 주재하다가 체코로 건너와 여전히 폴란드말로 소통하는 교포를 만난 적이 있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도쿄 대학교 러시아어과를 나온 내 지인은 전공 필수인 제2 슬라브어로 폴란드어를 골라 크라쿠프에서 교수를 지냈다. 유럽에서 차이콥스키가 가지 않은 곳은 이베리아와 스칸디나비아, 그리스뿐이다.

다시 그렇게 바삐 지나갔던 시절 1874년으로 다시 가보자. <대장장이 바쿨라>의 마감 시간을 잘못 알고 너무 일찍 끝내버린 차이콥스키는 11월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에 착수한다. 이 곡에 얽힌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1875년 1월 5일(러시아 달력으로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차이콥스키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과 역시 음악원 동료였던 니콜라이 후베르트에게 협주곡을 연주해 보였다. 루빈스타인은 혹독히 비판했다. 전문 피아니스트가 보기에 완전히 어설픈 곡이라고 지적했다. 루빈스타인은 베토벤 협주곡을 모델로 들었다. 차이콥스키에겐 대단한 모욕이었다. 루빈스타인과 차이콥스키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클래식 음악의 아이콘. 카라얀은 바이센베르크의 <페트루시카> 연주를 보고 그와 차이콥스키를 하자고 초대했다

많은 독자가 이 책에서 평소 좋아하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정보를 기대할지 모른다. 솔직히 내 관심 밖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는 협주곡을 주로 쓰지 않았다. 협주곡은 명인기를 가진 솔로이스트를 위한 장기자랑이다. 진지한 작곡가라면 그런 것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위대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꼽는 곡을 보라. 거의 한 곡뿐이다. 베토벤, 멘델스존(두 곡이다), 브람스, 차이콥스키. 그나마 절친한 친구를 위한 작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가니니나 사라사테가 여러 곡을 썼다고 음악 시간에 ‘위대한’ 곡으로 외우게 하지는 않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첫 협주곡. 차이콥스키의 어릴 때 벨칸토 취향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쓰지 않았느냐고? 자신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었다. 그나마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아 직접 무대에 서지 못하면서 피아노 협주곡에서도 완전히 손을 뗀다. 그들은 남 장기자랑에 관심 보일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고증에 맞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식이다

차이콥스키가 많은 신세를 진 친구에게 헌정하려고 피아노 협주곡을 써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연주해 의견을 구했다. 그런데 70년 전에 나온 곡을 모델로 하라며 면박을 주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심지어 <대장장이 바쿨라>라는 너무 잘 된 곡을 쓴 직후였는데 말이다. 차이콥스키는 친구에게 음표 하나도 건들지 않을 거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스펠바운딩!

차이콥스키가 낙담했을 때, 또 하나의 충격이 그를 덮친다. 블라디미르 실롭스키는 1875년 3월 3일, 파리에서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의 <카르멘> 초연을 관람하고 악보를 구해 차이콥스키에게 보냈다. 모데스트는 차이콥스키의 반응을 이렇게 적었다. 피아노 협주곡에 얽힌 닳고 닳은 일화보다 백 배 중요한 이야기이다.

“동시대 음악 중에 그렇게 형을 사로잡은 곡은 없었다. 대본과 음악의 대담함과 독창성은 아름다움을 넘어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 순간부터 표트르 일리치의 다음 오페라 주제를 예상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더는 왕이나 신, 박제된 영웅 대신, 삶 그러니까 돈 호세의 슬픈 사랑 이야기에 가까운 이야기를 고를 것이다. <카르멘>이 초연되고 석 달 뒤에 비제가 죽자 표트르 일리치는 그의 오페라와 요절한 프랑스 대가의 재능에 더욱 매혹되었다.”

비제가 6월 3일 과로사하고 열흘 뒤인 6월 13일 차이콥스키는 루빈스타인에게 욕먹은 피아노 협주곡 악보를 당대 제일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에게 보냈다. 뷜로는 곡을 매우 칭찬하며 헌정에 감사해했다. 만일 뷜로도 퇴짜를 놨다면 차이콥스키는 좌절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의 인정은 엄청난 칭찬이다. 뷜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전곡으로 처음 연주한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구약’에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신약’에 비한 사람이다. 이제 연주만 남은 셈이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출판인 표트르 유르겐손에게 7월 20일 편지해 9월 13일까지 런던의 뷜로에게 인쇄본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뷜로는 그곳에서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뷜로가 편곡한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바그너에게 아내를 빼앗긴 뒤이다

6월부터 8월,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3번에 매진했고, 빠른 속도로 완성한 뒤에는 <백조의 호수>에 착수했다. 10월 25일 한스 폰 뷜로는 보스턴에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초연했다. 11월에는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가 모스크바를 찾아왔다. 차이콥스키는 선배에게 프랑스 작곡가의 전위적인 행보를 언급하며, “지난여름 겨우 서른여섯에 세상을 떠난 탁월한 능력의 작곡가”를 애도했다. 11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노 협주곡이 러시아 초연되었다. 엿새 뒤 19일 모스크바에서 교향곡 3번을 처음 들었다.

생상스가 이때 영감을 받았는가?

아직 <백조의 호수>를 작곡 중이었지만, <대장장이 바쿨라>가 초연되려면 1년 가까이 남았다. 차이콥스키는 1875년 12월 프랑스 여행을 떠난다. 이듬해 1월 20일 파리 오페라 코미크에서 차이콥스키는 <카르멘>을 보았다. 여행에 동행했던 모데스트는 이렇게 회상했다.

“형이 극장에서 그렇게 흥분한 일은 본 기억이 없다. 이미 악보로 잘 아는 음악이었지만, 여기서 그것을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카르멘을 맡은 마담 갈리 마리의 놀라운 해석이 형의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뛰어난 가수는 아니었다. 목소리부터 일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기자로서 그녀는 주문을 거는 듯한 재능을 가졌다. 그녀가 해석한 카르멘은 활력을 간직하면서도 믿기 힘든 타오르는 매력과 거침없는 열정, 신비한 운명으로 감싼 것이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차이콥스키는 1월 28일에 <우울한 세레나데>, 3월 20일에 현악 사중주 3번을 초연했고, 4월에 <백조의 호수>까지 마쳤다.


비제의 <카르멘>으로 시작한 1876년, 차이콥스키에게 두 번째 충격이 기다렸다. 7월 프랑스 온천 휴양도시 비시Vichy에서 요양한 그는 8월 12일부터 18일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초연을 관람한다. 차이콥스키는 이미 1863년 러시아를 찾았던 바그너의 공연을 본 적 있지만, 바이로이트 극장 개관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러시아 기록부Russian Register》라는 잡지에 다섯 차례에 나눠 기고했다.

국왕 만세!

첫 회는 4부작 <니벨룽의 반지>의 개요와 바이로이트에 축제 극장이 들어선 내력에 대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각각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 <지크프리트>의 <신들의 황혼>의 줄거리를 요약했다. 네 번째 기고는 직접 참관한 첫 축제의 인상이었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 바그너 악극의 총체인 <니벨룽의 반지>의 음악사적인 의의를 요약했다. 오늘날 바그너 신봉자가 보기에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지만, 젊은 외국인 작곡가로서 거대한 이벤트 한가운데 섰다는 들뜬 감정이 엿보인다. 네 번째 기고에 적은 스케치 가운데 일부이다.

“이미 전 세계 문명국가의 방문자들이 바이로이트를 뒤덮었다고 얘기했다. 정말이지 첫날 나는 유럽과 미대륙 음악계 유명한 대표자를 모두 보았다. 그러나 여기엔 유보할 것이 있다. 가장 무게감 있는 음악의 권위자, 일급 명사는 완전히 빠졌음이 분명했다. 베르디, 구노, 토마, 브람스, 안톤 루빈스타인, 라프, 요아힘, 뷜로 가운데 누구도 바이로이트에 오지 않았다.

저명 연주자로 말하자면, 바그너와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내며 가족의 연을 맺은 리스트를 제외하면 우리 N. G. 루빈스타인 정도만 볼 수 있었다. 그 밖의 러시아 음악가로는 큐이, 라로슈, 파민친 그리고 우리 음악원 교수 두 사람, 익히 알려진 대로 바그너의 4부작을 이루는 네 오페라를 모두 피아노 편곡한 클린트보르트와 모스크바의 존경받는 성악 교수 발세크 여사가 보였다.”

다섯 번째 기고문을 마치면서 차이콥스키는 담담하게 자신의 소감을 요약한다.

“연작 마지막 오페라 최후 장면을 끝내는 화음이 사라지자, 청중은 바그너를 불렀다. 그가 무대 위로 걸어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되는 짧은 연설을 했다. ‘여러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여러분이 원하신 겁니다. 그리고 바라신다면 우리는 예술을 갖게 될 겁니다!’

나는 이 말뜻을 독자 개개의 해석에 맡긴다. 보자 하니, 그 연설은 청중 사이에 뭔가 당황한 기색을 불러왔다. 얼마 동안 완전한 침묵이 따랐다. 그러고는 다시 환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바그너가 무대 위로 불려 나올 때보다는 확실히 덜 열띤 박수였다. 나는 파리 의회 의원들이 루이 14세가 그들에게 한 유명한 말을 듣고 정확히 그런 반응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짐이 곧 국가이다.’ 처음에 그들은 그가 한 과업에 놀라 말문이 막혔고, 이내 그들은 그가 왕임을 상기하고 외쳤다. ‘국왕 만세!’”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바이로이트 스케치에서 나는 차이콥스키가 <니벨룽의 반지>보다는 앞서 <카르멘>을 보았을 때 받은 인상이 훨씬 컸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그가 할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차이콥스키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이제부터는 모차르트나 비제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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