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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3. 2020

1989년 영화, 차이콥스키

드미트리 티옴킨 제작, 음악

1978년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할 때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이 내한했다. 이들이 연주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소련 작곡가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검열 당국의 제지를 받았지만, 번스타인이 이를 무시하고 연주를 강행했다.

그 무렵 같은 곡의 일본 공연

10년 뒤 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1988년에는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이끄는 모스크바 필하모닉이 첫 내한 공연했다.

살아 있네!

격세지감 그해 겨울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역시 소련 영화 <차이콥스키>가 개봉되었다. 1970년에 만든 영화가 우리나라에 오기까지 18년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은 대개 “깊은 잠의 수렁에 빠졌다가 나왔다”라고 기억한다. 고등학생이던 내게는 시내 다른 개봉관과 달리 으리으리한 대리석과 거울로 덮인 호암아트홀의 화장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 또한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내내 잤지만, 첫 장면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긴 잠옷을 입은 소년이 한밤에 피아노에 앉았다가 음악이 들린다며 비명을 지르고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그때 계단에서 내려온 어머니가 역시 소복에 검은 머리까지 길게 풀어헤친 터라 꼭 귀신과 같았다. 어머니의 달램에 안정을 찾은 아이의 모습을 우스워했던 것이 내 수준이었다.

모스필름이 올린 오리지널 1부

차이콥스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영화를 다시 봤을 때 놀라웠다. 극장 관객이 다 자는 동안 영화는 그의 삶과 음악을 환상적으로 엮었음을 알았다. 유명한 몇 곡을 아는 정도로는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라 차이콥스키 입문으로 권할 영화는 아니었다. 마지막에 차이콥스키가 죽고 <비창 교향곡>이 흐를 때 제일 처음 장면이 다시 겹친다. 자다 말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가 울며불며 어머니에게 달려가 안겼던 소년은 다음 장면에서 어머니와 헤어진다. 어머니가 탄 마차가 떠나자, 강제로 떼어낸 아들이 마차를 쫓아 황야를 뛰어간다. 이 이별이 너무도 상징적인 비유임은 그의 유년기를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다.

2부 끝!

원치 않은 법률 학교생활을 하던 십 대의 표트르 차이콥스키에게 더 큰 시련이 왔다. 바로 어머니 알렉산드라 차이콥스카야가 1854년 6월 25일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에서 어머니가 탄 마차는 저승행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은 평생에 걸쳐 그에게 거대한 두려움으로 자리했고, 결국 자신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차이콥스키의 논란 많은 사인은 뒤에 다시 살펴보자). 사실 19세기 유럽을 강타한 몇 차례의 콜레라 대유행 가운데 하나였던 이 해에 중요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영국 의사 존 스노John Snow는 콜레라가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통설을 깨고, 수인성 전염병임을 밝혔다.

런던 소호의 스노 기념관. 물을 끓여 먹자!

어머니 알렉산드라가 물을 끓여 먹었더라면, 열세 살밖에 안 된 표트르의 여동생 알렉산드라가 집안일과 육아를 떠맡았을 리 없다. 네 살짜리 쌍둥이 톨리야와 모디야가 표트르를 삼촌처럼 따르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차이콥스키도 다른 성격으로 자랐을 것이다.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다행히 불행은 아버지와 형제자매를 더욱 살갑게 만들었다.

알렉세이 아푸흐틴

이 시기 차이콥스키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아푸흐틴(Aleksey Nikolayevich Apukhtin, 1840-1893)이었다. 아푸흐틴은 푸시킨을 달달 외워서, 선생님들은 그가 장래에 작가가 되리라 확신했다. 차이콥스키가 음악가가 될 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아푸흐틴만이 친구의 마음속 불타는 예술혼을 알아보았다.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와 한 세대였던 이반 투르게네프는 아푸흐틴의 재능을 높이 사 그를 문단에 추천했다. 아푸흐틴은 작가로서 탄탄대로를 갈 듯했지만, 1859년 법률학교 졸업 뒤 법무부 공무원의 길을 택했고, 차이콥스키도 그와 같이 근무했다. 1863년 직장을 그만두고 예술가의 길을 택한 쪽은 차이콥스키였고, 이때 아푸흐틴은 「운명: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대해」라는 시를 써주었다.

Rachmaninoff's "Fate", sung by Alexander Vinogradov

뒷날 라흐마니노프가 이 시와 베토벤의 모티프를 결합한 가곡을 썼고, 친구였던 베이스 표도르 샬랴핀과 함께 톨스토이를 찾아갔을 때 연주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베토벤을 싫어한다며 고개를 젓자, 낙담한 라흐마니노프가 한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어디를 가나 따라붙는 운명의 그림자를 우울한 어조로 그린 아푸흐틴의 시는 앞으로 예술가가 될 친구에게 그만큼 외로우리라 예고하는 듯하다.


차이콥스키의 삶의 고비마다 아푸흐틴은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결혼에 실패한 친구가 세간의 소문에 괴로웠을 때도, 그의 다독임 덕분에 빨리 일상으로 돌아왔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오페라로 만들 때도 격려했던 아푸흐틴은 <스페이드의 여왕>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동갑내기 친구는 차이콥스키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마지막 ‘운명’은 표트르 일리치의 만년에 다시 만나기로 하자.

세르게이 키레예프

차이콥스키가 아푸흐틴의 영향으로 예술가 정체성을 형성했다면, 그보다 네 살 어린 세르게이 키레예프(Sergey Aleksandrovich Kireyev, 1844-1888)는 성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다. 차이콥스키는 법률학교 후배 키레예프를 말 그대로 사랑했다. 모데스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중세 기사와 그것을 냉정하게 즐기는 숙녀로 묘사했다. 형을 존경한 모데스트가 보기에 키레예프는 잔인했다. 형은 마치 <루슬란과 류드밀라>에서 나이나Nayna에게 구애하다가 조롱받는 핀Finn과 같은 처지였다. 뒷날 차이콥스키가 명사가 되자 관계는 역전되었다.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 된 차이콥스키는 사교계를 드나들며 방종한 삶에 빠졌다.

핀의 발라드: 환영하네, 젊은이 (사교계에 들어온 것을!)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만난 게르만 라로슈(Herman Avgustovich Laroche, 1845-1904)는 평생에 걸친 친구였다. 두 사람은 1866년 나란히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부임했고, 특히 라로슈는 평론에 매진해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정당한 평가를 받도록 도왔다. 『자서전』에 썼듯이 이탈리아 음악에 흠뻑 빠진 젊은이는 미약하나마 작곡가의 꿈을 키워갔다.

게르만 라로슈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읜 쌍둥이 동생들도 어느덧 사춘기가 되었다. 아나톨리와 모데스트에게 다정다감한 작은 형 표트르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형의 사랑을 놓고 맞수일 수밖에 없는 쌍둥이에게 나타난 결과는 반대였다. 차이콥스키는 자신 무조건 따르는 모데스트보다 아나톨리를 더 예뻐했고, 모데스트는 실망했다. 삼각관계는 동생들이 형의 친구들로부터 그의 동성애 성향을 들은 뒤 역전되었다. 아나톨리는 형을 걱정했고 불명예스럽게 생각했지만, 모데스트는 스스로 형과 같은 성향임을 자각하고 도리어 기뻤다. 아나톨리는 모데스트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형을 맹목적으로 따른 탓이라 여겼다. 동기간 이런 내밀한 이야기는 아직 출판되지 못한 모데스트의 미완성 자서전에 적힌 것이다.

쌍둥이 동생 아나톨리와 모데스트, 톨랴와 모댜

차이콥스키는 동생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과 사회적 비난을 피하려고 뜻하지 않은 사랑을 택한다. 그는 1868년 모스크바에 연주를 온 벨기에 메조소프라노 데지레 아르토(Désirée Artôt, 1835-1907)를 소개받는다. 그녀는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María Malibran의 동생이자 당대 제일의 성악가였던 폴린 비아르도 가르시아Pauline Viardot-Garcia에게 배웠다. 차이콥스키는 피아노곡을 헌정하며 데지레 아르토에게 구혼했고 그녀도 받아들였다.

데지레 아르토; 마리아 말리브란; 폴린 비아르도

다 된 결혼을 훼방한 사람은 친구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었다. 그는 늘 연주 여행을 다니는 성악가와 결혼하는 것은 차이콥스키의 작곡가 이력에 치명적이라 생각하고 어깃장을 놓았다. 데지레 아르토는 이듬해인 1869년 스페인 성악가 마리아노 페디야와 결혼해 차이콥스키와 완전히 멀어진다. 그해 11월 차이콥스키는 가장 자전적인 노래로 스스로 위로했다. <Op 6, 여섯 로망스>의 마지막 곡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Net, tol'ko tot, kto znal’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미뇽의 노래에 붙인 곡조이다.

미렐라 프레니의 남편 니콜라이 갸우로프

준 앨리슨과 로사노 브라치 주연 영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에 이 노래가 나온다. 루이자 메이 올콧Louisa May Alcott의 동명 자전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레몬꽃 피는 나라를 아시나요Kennst du das Land, wo die Zitronen blühn’를 부르지만, 아마도 마빈 르로이 감독은 미국인에게 친숙한 차이콥스키 곡을 더 좋아한 모양이다. 작가 지망생 조제핀 마치는 독일에서 온 베어 교수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 자신도 괴테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꿈꾸듯 말한다. 내가 가는 곳마다 영화로 보여주는 이 노래는 바로 뒷날 차이콥스키의 추종자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발레 <요정의 입맞춤Le Baiser de la fée>을 작곡할 때 주선율로 인용했다.

루이사 메이 올콧의 아버지 브런슨 올콧은 미국 매사추세츠 콩코드의 사상가였다. 그의 친구가 더 유명한 랠프 월도 에머슨이다. 이들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내서니얼 호손과 더불어 신생국 미국이 어떻게 하면 유럽과 같은 정신적인 성과에 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들을 선험철학자Transcendentalist라 부르는데, ‘선험(先驗)’이란 경험하지 않고 안다는 말이고 사전은 ‘초월(超越)’이라는 다른 뜻을 제시한다. 둘 다 천재의 자질이다. 이들이 모델로 삼은 나라는 독일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근대화에 뒤처진 독일이 19세기 다시 유럽의 주인공으로 부상한 비결로 이들은 칸트, 괴테, 베토벤과 같은 천재를 꼽았다. 혜성과 같은 천재가 등장하지 않고는 이런 도약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에머슨은 친구의 딸 루이사에게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선물했다.


유럽에서 가장 늦게 기지개를 켠 러시아도 미국의 문제를 그대로 마주했다.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없이 그들이 바그너나 비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방법은 시대를 초월한 천재를 낳는 것뿐이었다. 그 천재는 보통 사람은 모르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평생 짊어질 ‘운명’이리라. 표트르 일리치였다.

1973년의 플리세츠카야. 48세 따귀 소녀 같다

영화 <차이콥스키>는 데지레 아르토와 차이콥스키의 인연을 매우 인상적으로 그렸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한참 뒤 그녀가 볼쇼이 극장을 다시 찾아 노래할 때 객석에서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이 각각 지켜본다. 차이콥스키가 부인의 편지를 받기 직전이고, 실제로 아르토는 이 무렵 모스크바에서 공연했다. 그녀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차이콥스키의 로망스를 부르고, 장면은 베네치아 카니발로 바뀐다. 멀리서 알아본 두 사람이 친구들과 트로이카를 타고 눈밭을 달릴 때 차이콥스키의 여러 음악이 뒤섞이고 여기에 아르토가 벨칸토의 목소리를 뽐낸다. 마치 차이콥스키가 아르토를 만나던 1868년에 초연된 교향곡 1번 ‘겨울 백일몽’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환상적인 이 부분을 만든 사람은 할리우드로 건너간 영화 음악가요, 이 영화를 제작한 드미트리 티옴킨Dimitri Tiomkin이다. 우크라이나 폴타바에서 태어난 유대인 티옴킨은 미국에 건너가 막스 스타이너,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등과 함께 할리우드 영화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하이눈>, <자이언트>, <원더풀 라이프>의 유명한 주제가가 바로 티옴킨 곡이다.

할리우드 황금시대를 수놓은 티옴킨의 선율 메들리

‘겨울 백일몽’에서 깬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은 친구의 파혼이 자기 덕이라고 자랑하고, 그런 무용담의 제물이 된 차이콥스키는 그를 뿌리치고 홀로 호숫가를 거닌다. 이번에 아르토가 백조로 등장하면 그때야 발레 팬은 아까 노래한 성악가가 전설의 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Maya Mikhailovna Plisetskaya, 1925-2015)였음을 알아본다. 볼쇼이의 주역이던 플리세츠카야가 입은 발레복이 바로 내가 봇킨스크 자료실에서 본 그 날개옷이다. 호암아트홀의 <차이콥스키>는 그 시절 나에게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였다. 그러나 아직도 이 유명한 작곡가의 음악은 몇 곡만이 끝없이 연주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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