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준호 Nov 13. 2020

짧은 신혼과 새로운 인연

차이콥스키와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

서른여섯 되던 1876년 파리에서 비제의 <카르멘>을 보며 시작해, 여름에는 바이로이트 축제의 역사적 개막을 목격한 차이콥스키는 그해 12월 6일 고대하던 <대장장이 바쿨라>를 초연했다. 자신 있던 작품이지만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낙담으로 저물던 그해 섣달그믐 차이콥스키는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보낸 사람은 나데즈다 필라레토브나 폰 메크Nadezhda Filaretovna von Meck 부인이었다.     

친애하는 표트르 일리치 선생님께,     

솔직히 두 사람의 관계를 대략 아는 사람이라면, 부인이 이 첫 줄을 쓰며 얼마나 마음 설레고 흥분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계속 보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위촉을 그리 빨리 들어주시다니요. 선생님 작품이 제게 주는 황홀감을 말씀드려봐야 부질없고 부적절하겠죠. 선생님께서는 저 같은 음악 문외한보다 훨씬 중요한 분에게 더한 찬사와 존경을 받는 데 익숙하실 테니까요. 아마 우스우실 겁니다. 다른 사람이 어이없어할 만한 일을 하고 참을 수 없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도 전 만족합니다. 선생님 음악이 제 삶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 주었다고 믿어주십사 부탁드릴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극진하게 자신을 낮춘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자신이 섬기던 군주에게 보낸, 거의 땅바닥에 엎드린 듯한 편지이다. 폰 메크 부인과 차이콥스키의 경우는 위치가 바뀌었다. 나이로나, 사회적 지위, 경제력으로 보아 위와 같은 겸양은 예의에 차고 넘친다. 어쩌면 차이콥스키가 <대장장이 바쿨라>에 성공을 거뒀더라면 이 편지를 정말 “우습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바로 그날, 답장을 썼다. 이 또한 필연일까?     

친애하는 나데즈다 필라레토브나 여사님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친절하고 으쓱하게 만드는 말씀으로 편지해 주셔서요.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때로는 실망과 실수가 앞을 막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사님같이 제 예술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아껴주시는 소수로부터 위안을 얻습니다.     

이것으로 장장 14년에 걸친 후원자와 예술가의 수백 통에 달하는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 차이콥스키가 비제와 바그너로 열병을 앓던 1876년 폰 메크 부인은 남편과 사별했다. 카를 표도로비치 폰 메크(Karl Fyodorovich von Meck, 1821-1876)는 발트해 연안에서 태어난 독일계 기술공무원이었다. 1848년 결혼한 카를과 나데즈다 부부는 열여덟 명의 아이를 낳아, 그 가운데 열한 명이 성년까지 생존했을 만큼 다복했다. 신혼 초 궁핍했던 부부는 카를이 철도 사업에 손을 대면서 큰 성공을 거두어 어마어마한 부를 일궜다. 부인은 옐레나 공비와 안톤 루빈시테인이 설립한 러시아 음악협회의 주요 후원자였다. 28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남편을 여읜 나데즈다 폰 메크는 차이콥스키보다 아홉 살 많은 마흔다섯 나이였다.

남편과 아내 폰 메크

폰 메크 부인이 첫 편지에서 감사를 표한 위촉은 차이콥스키가 직전에 쓴 현악 사중주 3번의 세 번째 악장 ‘안단테 장송곡Andante funebre’과 독주 피아노를 위한 <두 소품, Op 10> 가운데 2번 ‘위모레스크Humoresque’의 바이올린과 피아노 이중주 편곡이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사람은 요시프 코테크(Iosif Kotek, 1855-1885)였다. 코테크는 1871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1876년에 졸업했는데, 그 무렵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그를 폰 메크 자녀의 음악 교사로 추천했다. 코테크가 음악원 교수 차이콥스키와 부인 사이의 메신저였다. 그는 자연히 코테크와도 가까워졌다. 이듬해 2월과 3월에는 <슬라브 행진곡>과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를 초연했다. 이와 함께 네 번째 교향곡에 착수했다.


1877년 4월 7일, 차이콥스키는 운명적인 두 번째 편지를 받는다. 이번 발신인은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Ivanovna Milyukova, 1848-1917)라는 여인이었다. 폰 메크 부인이 첫 편지 이전은 물론 이후로도 차이콥스키와 직접 만나지 않은 것과 달리 밀류코바는 차이콥스키와 구면이었다.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모스크바 외곽 클린에 영지를 가진 상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갈라선 탓에 안토니나는 양쪽을 오가며 자랐다. 1872년 5월 차이콥스키는 법률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아나스타샤 밀류코바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의 남편은 알렉산드르 밀류코프 대위였고, 여동생이 안토니나였다. 여기서 그녀를 처음 만난 차이콥스키는 6월 11일 <과학 박람회 개회를 위한 칸타타> 초연에 초대했다. 그러나 그 뒤로 만남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듬해 안토니나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한 해를 다니며 남몰래 차이콥스키를 흠모했다. 그러던 그녀가 하필이면 1876년 말에 얼마간 유산을 상속받는다. 지참금이 생긴 그녀가 용기를 내 차이콥스키에게 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다. 편지를 받고 두 달이 조금 못 된 6월 1일에 오랜만의 재회가 이뤄진다. 사흘 뒤 차이콥스키는 정식 청혼했다. 다만 그는 그녀에게 ‘형제간의’ 사랑을 약속했고, 그녀도 받아들였다.

유튜버 "anotherglazunovfan"님은 없는 게 없으심

안토니나의 구애를 받아들인 더욱 결정적인 요인은 역시 막 시작한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이었다. 밀류코바는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협박성 편지를 계속 보냈다. 앞서 5월 25일 소프라노 옐리자베타 라브롭스카야가 푸시킨의 소설을 오페라로 써보라고 권했다. 뒤에 보겠지만, 차이콥스키는 여주인공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사랑한다는 편지를 보냈다가 매정하게 거절당한 부분이 맘에 걸렸다. 그는 오네긴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또 하필 이때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위촉받은 네 번째 교향곡을 쓰던 중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차이콥스키는 약혼 직후 모데스트에게 편지했다.

내 사랑에 대해 물을 거니? 다시 한번 절대 평온의 지점까지 떨어졌단다. 왜 그런지 아니? 너만 이해할 거야. 두세 번 그의 못생긴 데다가 다치기까지 한 손가락을 봤어. 그것이 아니라도 난 미칠 정도로 사랑했을 거야. 그러면 매번 새로워져서 다친 손가락을 잊게 하니까. 손가락이 나을지 나빠질지 모르겠어. 가끔은 이 제자를 잊었거나 불공평하신 하느님이 나를 돌봐주신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이지, 이런 뜻밖의 일치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누가 아니? 이것으로 광신도가 될지, 사순절 기름, 성모의 이콘에 꽉 붙잡힐지언정... 코테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낸다. 최근 가장 뜨거웠을 때 찍은 거야. 나에게 편지할 때 실롭스키의 주소로 보내는 거 잊지마: 모스크바, 보스크레셴스크, 글레보보. 안녕, 나의 사랑하는 모디야. 따뜻한 애정을 담아 콜리야를 안아줄게. 알리나와 남편에게도 안부 전해줘. 사랑하는 아빠께도.     

차이콥스키 말처럼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거의 뒷일이 되어가도록 만든 필연처럼 느껴진다. 뒷일이란 물론 그가 쓸 작품이다. 교향곡 4번, 그리고 파혼과 <예브게니 오네긴>, 바이올린 협주곡. 그로 인한 또 다른 작품과 삶.

교회가 서울만큼 많음

차이콥스키와 밀류코바는 1877년 7월 18일 모스크바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결혼했다. 신랑의 증인은 동생 아나톨리와 친구 코테크였다. 모데스트는 어디선가 말했을 것이다.

“나는 이 결혼 반대일세!”

주례 드미트리 라주몹스키 신부는 차이콥스키가 종교 음악을 쓸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신혼생활의 시작과 함께 차이콥스키는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누군가와 특히 이성(異姓)과 함께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아내의 성격과 주변 사람 모두 그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차이콥스키는 한 달 반 동안 냉각기를 갖기로 하고 8월 8일 교향곡 4번과 <예브게니 오네긴>의 악보를 챙겨 여동생의 카멘카 집으로 떠났다. 9월 8일 아나톨리에게 <예브게니 오네긴>의 피아노 악보를 쓰는 중이라고 편지했다. 전체를 마치고 성악 연습용 악보를 쓴다는 뜻이다. 9월 20일까지 6주를 머물며 나머지를 계속 작업했다.

한때 베를린 필하모닉 악장이던 가이 브라운슈타인의 바이올린 버전 편지의 장면

모스크바로 돌아온 차이콥스키는 9월 24일부터 10월 6일까지 밀류코바와 지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충동적인 결혼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동성애가 비정상이라거나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일이 있는 것처럼 꾸며 다시 집을 떠난 뒤 그곳에서 장기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동생 아나톨리와 스위스로 떠난 그는 10월 22일 제네바 호숫가 클라렝스에 도착했다. 봇킨스크에서 말한 대로 클라렝스는 그의 고향을 떠오르게 했다. 11월 13일까지 머물며 <예브게니 오네긴>을 마무리하고 피아노 반주로 편곡했다.

레망 호수의 백조와 오리

제네바 호수는 불어로는 레망 호수라고 부른다. 가로로 긴 초승달 모양이며 호수 위쪽은 스위스 제네바부터 시작해 로잔, 몽트뢰로 이어지고 아래쪽은 병풍 같은 알프스와 프랑스 에비앙이 마주 본다. 차이콥스키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중요한 바이런,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 지시Sissi가 즐겨 찾았다. 20세기 들어서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찰리 채플린 등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나는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호수를 볼 때마다 오리 떼는 많이 보았지만, 백조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호수나 봇킨스크에서도 백조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스위스 제네바, 루체른, 취리히 그 밖의 모든 크고 작은 호수에는 백조가 있다. 우아한 자태로 물 위를 미끄러지던 백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에서 차이콥스키 스스로 그들과 동종이라고 느꼈으리라.

흑조의 1/4은 수컷 쌍을 이룬다

차이콥스키는 넉 달 뒤인 이듬해 1878년 3월 9일, 이번에는 모데스트와 그의 제자 콘라디, 하인 알렉세이 소프로노프를 데리고 클라렝스에 다시 왔다. 3월 17일 요시프 코테크가 합류했고 이때 바이올린 협주곡의 영감을 얻었다. 곡은 한 달도 안 걸린 4월 11일에 완성되었다. 4월 17일에 클라렝스를 떠나 5월에 러시아로 돌아갔다.


놀라지 마시라. 반년 뒤인 1879년 1월 11일 클라렝스를 세 번째로 찾았다. 2월 16일까지 다음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를 작곡했다. 세 번의 클라렝스 여행을 통해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 밀류코바를 잊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횟수나 체류 기간으로 보면 다른 곳에 비해 썩 눈에 띄지 않지만, 차이콥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클라렝스를 뜻깊게 생각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989년 영화, 차이콥스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