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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3. 2020

“우리 교향곡”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교향곡 4번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만큼 극적인 음악은 찾기 힘들다. 다비트 오이스트라흐나 나탄 밀스타인과 같은 거장의 연주는 불멸의 기록이다. 이 책에서 이 곡의 초연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종이 낭비이다. 대신 나는 2016년에 나온 음반 해설을 옮겼다. 몰도바 태생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가 지휘자 테오도르 쿠렌치스에게 보낸 편지이다. (아래 링크이다.)    

많은 독자에게 생소할지 모르지만, 1977년생 코파친스카야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코로나 와중에도 2020년 100주년을 맞은 잘츠부르크 축제와 스위스 루체른 축제가 그녀를 초청했다고 하면 설명이 될 것이다. 그리스 태생으로 페름 오페라라는 시골구석 단체를 이끌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테오도르 쿠렌치스가 그녀의 단짝이다. 마지막에 언급한 <결혼>은 음반에 함께 수록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이다.

2020 가을 두 사람의 시즌 오픈 연주. 물론 나는 전곡을 가지고 있다

나는 뮌헨에서 코파친스카야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키릴 페트렌코와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공연을 보았다. 후반 프로그램은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이었지만, 내 관심사는 코파친스카야였다. 일찍부터 라디오에서 그녀의 공연을 소개했고, 남다른 면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협주곡과 교향곡 사이 쉬는 시간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뜻밖에 코파친스카야와 마주쳤다. 역시 교향악을 들으러 객석으로 가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연주자에게 프로그램을 내밀고 사인을 받았다.


편지를 읽고 슈만과 차이콥스키를 낡은 골동품 취급하는 그녀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진 분도 있을지 모른다. 내가 앞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자 장기자랑’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연주자에게 여러 도시 전전하며 똑같은 협주곡을 반복하는 것이 권태롭듯이, 나 또한 같은 협주곡을 이런저런 연주자로 돌려 듣는 데에는 관심 없다.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교향곡 4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차이콥스키가 동시에 작곡했던 <예브게니 오네긴>을 들어야 한다. <예브게니 오네긴>을 듣지 않고 차이콥스키를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클라렝스에 가서 호수와 알프스는 안 보고 밥상 사진만 찍다 온 격이다.

유튜브에도 일말의 흔적이 없어서 스틸컷으로

클래식 스트리밍 서비스 가운데 하나인 메디치 TV는 코파친스카야의 또 다른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제공한다.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2011년 공연이다. 공연에 앞선 연습 장면을 보면 아직 코파친스카야는 어린 유망주 취급을 받는 모양새이다. 반면 연주 당시 여든이 다 된 페도세예프는 평생에 걸쳐 수많은 협연자와 이 곡을 협연했던 베테랑이다. 결과적으로 이날 연주는 무난했다.

그러나 나는 페도세예프가 5년 뒤 코파친스카야가 쿠렌치스와 녹음한 음반을 들으면 못마땅했으리라 생각한다. 속사포처럼 빠른 템포는 이 곡에 익숙한 노년층에게는 건성으로 들릴지 모른다. 솔직히 나도 그녀나 쿠렌치스 녹음의 지나친 편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 애호가는 모스크바 지하철이나 에스컬레이터와 같이 바람 소리를 낼 듯한 속도감에 열광할 것이다.

탔나 싶으면 내리는 모스크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정답은 없다. 코파친스카야는 자신이 이 무거운 돌이 얹힌 듯한 곡을 연주한다면 뭔가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이른바 ‘진보’이다. 반면, 페도세예프는 스스로 생각한 작곡가의 의도를 벗어나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1973년에 처음으로 <체레비츠키>(<대장장이 바쿨라>의 개정판 제목이다)를 녹음했고, 1999년에는 미완성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도 녹음했다. 프랑크푸르트 알테 오퍼에서 녹음한 교향곡과 협주곡 전곡 연주 실황은 그가 이끌던 모스크바 라디오 교향악단이 왜 소련 붕괴 이후 지금과 같은 ‘차이콥스키 교향악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는지 수긍하게 한다. 페도세예프에게 오케스트라는 곧 차이콥스키의 도구이다. 그는 차이콥스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내놓을 것이다. 이른바 ‘보수’이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어느 한쪽만 옳다고 하면 결국 ‘꼰대’가 되고 만다.

체레비츠키의 4막

차이콥스키가 짧은 기간 러시아와 클라렝스를 오가며 불행을 씻으려 애쓸 때 폰 메크 부인의 도움이 도착했다. 차이콥스키는 적잖은 정기 후원금을 약속받았다. 덕분에 그는 음악원 교수를 그만두고 순수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클라렝스를 떠나 이탈리아를 계속 여행하며 교향곡 악보를 놓지 않았고, 마침내 1878년 1월 7일 산레모에서 곡을 완성했다. 그는 1월 10일 밀라노에서 악보를 모스크바로 부쳤다. 2월 22일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지휘한 초연은 큰 성공을 거뒀다.

30년 전 페도세예프가 섰던 프랑크푸르트 알테 오퍼 무대의 또 다른 교향곡 4번

교향곡의 해설을 바라는 부인에게 차이콥스키는 3월 1일 피렌체에서 편지하며 프로그램을 적었다. 꽤 긴 설명이지만, 굳이 전문을 옮기기보다는 요약하는 편이 낫겠다. 간단히 말해, 첫 악장은 ‘가혹한 운명’이며, 두 번째 악장은 ‘멜랑콜리’이다. 3악장은 ‘변덕스러운 아라베스크 문양’이 빚어내는 비현실적 이미지요, 마지막 악장은 평범한 사람들의 축제에서 만나는 ‘기쁨’이다. 차이콥스키는 장황한 자신의 프로그램 끝에 하이네를 인용한다. “말이 끝나는 곳에서 음악이 시작한다.” 이미 뱉은 말을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하며, 추신을 덧붙인다.

편지를 봉투에 넣으며 다시 읽어보다가 제가 보낸 해설이 조리도 없고 알맞지도 않아 크게 당황했습니다. 음악적 사고와 이미지를 말로 옮기기는 처음입니다. 제대로 해내지 못했네요. 저는 교향곡을 쓰던 지난겨울 완전히 의기소침했습니다. 이 음악은 제 경험의 충실한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메아리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말로 명료하고 조리 있게 연결되겠습니까?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거의 다 잊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경험만 열정과 신비한 느낌의 회상입니다. 모스크바의 친구들이 뭐라고 말할지 아주아주 궁금합니다. 안녕히.     

그대의 P. 차이콥스키     

어제 국립 극장에서 저녁을 보냈는데 무척 웃었습니다. 이탈리아 희극은 저속해서, 우아한 면은 없지만, 정말 재미있습니다.      

추신에 썼듯이 이 교향곡은 어서 들어야지, 해설에 기댈 것이 없다. 추신에 덧붙인 추신을 보면 이제 표트르 일리치는 악몽에서 벗어난 듯하다.


1878년 11월 18일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4번이 인쇄될 때 폰 메크 부인에게 “우리 교향곡이 인쇄되었습니다”라고 편지에 썼다. 이것으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헌정이 완성되었다.

알렉산드르 말로페예프와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미르 드르 예프

1991년 페도세예프가 이끄는 모스크바 라디오 교향악단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교향곡 4번을 연주했다. 당연히 한데 묶을 두 곡이다. 바이올린 협연자의 이름은 빅토르 ‘트레티야코프’, 또 한 사람 러시아 거장이었다. 거의 30년이 지난 2020년 1월 19일 나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홀에서 페도세예프가 지휘하는 차이콥스키 교향악단의 연주를 들었다. 그는 이날 2001년에 태어난 알렉산드르 말로페예프라는 소년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고, 후반에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을 들려줬다. 말로페예프는 변함없이 한결같은 연주를 이어가려는 페도세예프에게 순종했지만, 머지않아 쟁쟁한 선배의 아성을 딛고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이제 우리 친구, 예브게니 오네긴을 만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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