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준호 Nov 15. 2020

교향곡, 오페라, 발레의 연금술사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과 <잠자는 숲속의 미녀>

1888년은 특별한 해였다. 차이콥스키는 지휘자로 처음 유럽 순회 연주에 올랐고 1월 5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무대에 섰다. 여기서 요하네스 브람스와 에드바르 그리그와 인사했다. 그는 브람스를 “인자한 수염을 기른 러시아 사제” 같았고 고매한 인품이었다고 기억했다.

차이콥스키는 이때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을 들었다. 베를린 필, 영국 지휘자, 조지아 바이올리니스트, 노르웨이 첼리스트

그리그는 그보다 훨씬 친밀했고, “정신적인 우정”을 나눴다. 젊은 말러도 라이프치히에 있었다. 그는 이 해에 첫 교향곡을 발표할 것이다. 1월 28일 함부르크에서는 한스 폰 뷜로의 연주도 들었다. 2월 4일 베를린에서 약혼녀였던 데지레 아르토와 재회했다. 그는 <여섯 개의 프랑스 노래, Op. 65>를 헌정했다.

니즈니 노브고로드 태생의 피아니스트가 야나체크 히로인을 반주했다

2월 8일엔 베를린 필하모닉 협회에서 지휘했다. 2월 19일부터 21일까지 프라하에서 지휘하며 드보르자크를 만났다. 3월 파리에서 세 차례 연주하며 샤를 구노, 레오 들리브, 폴린 비아르도 가르시아와 교우했다. 3월 20일 런던 연주를 끝으로 흑해 연안으로 돌아갔다.


모차르트의 그랜드 투어를 떠오르게 하는 이 연주 여행에서 차이콥스키가 지휘한 곡은 다음과 같다. 모음곡 1번&3번, 현을 위한 세레나데, 피아노 협주곡 1번,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안단테 칸타빌레’, <1812년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백조의 호수> 2막, 교향곡 4번, 여섯 개의 로망스.

이 음악은 너무 좋아서 어쩔 수가 없게 만든다

차이콥스키가 들은 남의 음악으로는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과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가 있었다. 선배들과 겨루려면 아직 더 나아가야 했다. 이해 여름 교향곡 5번을 썼다. 내가 라디오로 가장 많이 방송한 교향악을 꼽자면, 베토벤 ‘영웅’ 교향곡, 브람스 교향곡 1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들겠다. 이 셋은 수로 다른 곡을 압도한다. 두 편의 영화가 2악장의 향수와 그리움을 값지게 끌어올렸다. 그리어 가슨과 로널드 콜먼이 주연한 고전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와 알레한드로 이냐리투의 <버드맨Birdman>이다. 모두 기억을 저편에 두고 실존을 미래로 옮기는 데 이 음악을 사용한다. 교향곡 5번의 가장 값진 성과는 왈츠 악장이다. 어떤 독일 작곡가도 교향곡에 왈츠를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차이콥스키 뒤에 말러가 ‘렌틀러’라는 춤곡을 넣었다.

코로나 특수로 듣는 전곡 연주

수많은 연주 가운데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Yevgeny Fyodorovich Svetlanov가 지휘하는 소비에트 국립 교향악단의 1985년 차이콥스키 음악원 대강당 무대가 각별하다. 피날레에서 스베틀라노프는 마치 국민의례를 하듯 부동자세로 섰다. 그야말로 차이콥스키를 향한 마땅한 예우이다. 잔재주가 아니라 교향악의 우람한 실존을 보여주는 진정한 마에스트로이다.

위에 언급한 연주는 아니지만 1993년 도쿄 실황 가운데 4악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아랍과 이스라엘 젊은이의 연합 앙상블 이스트 웨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스위스 제네바 빅토리아 홀에 데려와 이 곡을 연주한 적이 있다. 차이콥스키가 자주 왔던 곳이고, 국제 외교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제네바의 의미는 작지 않다. 정치가 할 수 없는 일을 자신의 음악으로 보여준 무대를 ‘세계인’ 차이콥스키가 보았다면 흐뭇했으리라! 아르맹 조르당의 아들 필리프 조르당은 새로 지은 파리 필하르모니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곡을 지휘했다. 오래전 글라인드본에서 투우사 흉내를 내며 <카르멘>을 지휘한 젊은 지휘자가 이제는 정상의 무대에서 아버지보다 더 멀리 가려한다. 비제도 힘껏 그를 응원하리라.

이 분은 연극영화과를 나오신 듯...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작업 속도는 만년으로 갈수록 빨랐다. 교향곡 5번에 착수하기 직전 1888년 5월 25일 차이콥스키는 이반 프세볼로시스키로부터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발레로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대본은 7월 15일에 받았다. 1889년 9월 1일에는 전막을 완성했다. 그 사이 교향곡 5번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프라하, 모스크바에서 초연하고, 독일과 스위스, 영국, 프랑스를 돌며 연주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원작자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는 그밖에도 「신데렐라」, 「장화 신은 고양이」 따위의 동화로 유명한 루이 14세 때 작가이다. 월트 디즈니의 원조인 셈이다. 발레의 줄거리는 어린이들이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로라 공주의 생일날,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악한 마녀 카라보스가 저주를 한다. 공주가 자라 물레바늘에 손가락에 찔려 영원한 잠에 빠질 것이라고. 라일락 요정은 다른 요정의 저주를 바꿀 수는 없지만, 대신 공주가 100년 뒤 젊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나리라 저주를 누그러뜨린다. 

카라보스의 저주 탓에 왕국에선 물레바늘을 모두 없앴다. 그래도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는 없는 법. 오로라의 스무 번째 생일날 노파로 변장한 카라보스가 공주에게 물레바늘을 건넨다. 좋다고 놀다가 손가락을 찔린 철부지 공주. 라일락 요정이 잠에 빠진 그녀를 안으로 옮기게 한다. 안개가 일고 나무와 덤불이 성을 완전히 가린다. 온 궁전 사람은 백 년 동안 잠에 빠진다. 

백 년 뒤. 젊은 왕자 데지레가 사냥을 나왔다. 라일락 요정은 그에게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야기를 해주고 마법으로 그녀의 환영을 불러낸다. 라일락 요정은 오로라에게 반한 왕자를 배에 태우고 마법의 숲을 지나 침묵의 성으로 들어간다. 왕자가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게 입을 맞추자 저주가 깨지고 모두가 깬다.     

아마도 차이콥스키의 극음악 가운데 가장 갈등 요소가 빈곤하지 않나 싶다. 사냥 나온 왕자는 멧돼지 한 마리 잡지 않고 입맞춤하는 수고만으로 잠든 숲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벽Aurora’ 공주를 얻으니 말이다. 그러나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막이 오르는 순간 모두가 마법에 사로잡힌다.

“이번에도 최고를 쓰고 말았어요!”

1983년 영화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의 첫 장면이 그것이다. 세탁 일을 하는 어머니는 어린 안나를 데리고 마리위스 프티파가 만든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보러 갔다. 엄마는 딸에게 “너도 저 요정들처럼 춤추고 싶은 거지”라고 묻는다. 안나는 “아니요, 엄마, 전 요정이 아니라 저 공주가 되고 싶어요”라고 답한다.

마이클 파월이 만들려다 소련에 빼앗긴 영화 <안나 파블로바>

차이콥스키는 이번에도 한 계단 더 올라갔다. 그는 폰 메크 부인에게 자신했다.     

“이 발레 음악은 제 작품 중 최고가 될 것입니다. 주제는 너무나 시적이고, 음악과 잘 맞습니다. 작곡하며 아주 몰입했고, 열과 성을 다한 결과는 늘 보상받습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프세볼로시키는 대본에 왕자와 공주의 결혼 피로연을 더했다.

러시아 황실 발레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이상적인 출연진

금은,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요정에 이어 동화의 주인공들이 하객으로 등장한다. 장화 신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 신데렐라와 포르투네 왕자, 파랑새와 플로린 공주, 빨간 두건과 늑대, 엄지 톰과 형제들이다. 이어서 오로라와 데지레가 춤을 춘다. 로마, 페르시아, 인도, 아메리카, 터키에서 온 손님들이 사라방드를 춘다. 연회에 참석한 모두 행진한다. 마지막으로 라일락 요정이 결혼을 축하한다. 동화가 늘 그렇듯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산다.

장화 신은 고양이와 흰고양이

놀이동산의 하이라이트는 퍼레이드이다. 어느 테마파크이거나 자신들이 가진 자산을 총동원한 행진에 많은 공을 들인다. 그 원조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이다. 3막의 처음에 등장하는 금과 은, 사파이어, 다이아몬드의 춤은 뒷날 조지 발란신이 <보석>을 안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페로의 다른 동화 속 등장인물은 차이콥스키의 다음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성격 춤곡’과 경쟁한다.

핑크! 핑크! 핑크!

안나 파블로바는 오로라 공주가 되길 바랐지만, 이 발레의 또 다른 주인공은 라일락 요정이다. 라일락의 모티프는 <백조의 호수> 가운데 오데트의 모티프처럼 전곡의 요소요소를 휘감는다. 그러나 백조의 우울한 멜로디와 달리 여기서는 라일락의 연보랏빛 선율은 향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꽃 가운데 하나가 라일락이다. 영화 <안나 파블로바>에도 보라색 꽃이 만발한 공원 장면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제파의 친구 코추베이의 집터도 세월이 무상하게 라일락이 덮이지 않았나! 미하일 브루벨이 즐겨 그린 꽃이기도 하며, 모스크바의 표도르 샬랴핀 집에도 아름드리 라일락 나무가 섰다. 라흐마니노프가 연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사촌인 아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친구 샬리아핀 집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전막

2020년 1월 14일 저녁 7시 나의 마지막 마린스키 극장 공연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이다. 마린스키 공연은 프티파를 토대로 1952년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 세르게예프Konstantin Mikhaylovich Sergeyev가 수정한 안무를 사용한다. 누레예프가 나오는 영화 <화이트 크로우>로 다시 가보자.

나가 있어,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

세르게예프는 애송이 누레예프의 연습을 참관하다가 옆 사람과 얘기를 나눴다는 빌미로 내쫓기는 수모를 당한다. 그는 레닌그라드 키로프 발레단을 이끌고 파리에 갔다가 누레예프가 망명하는 바람에 당국의 질책을 받았다. 그의 아내가 누레예프의 소련 시절 상대역이던 나탈리아 두딘스카야Natalia Dudinskaya이다.

세르게예프와 두딘스카야의 <백조의 호수> 1953년

만년의 두딘스카야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나쁜 요정 카라보스를 맡았다. 프티파의 초연 때 엔리코 체케티Enrico Cecchetti가 맡았던 역할이다. 체케티의 제자는 그대로 댜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원이다. 마린스키의 첫날 <호두까기 인형>을 볼 때도 한없이 촌놈이던 나는 이날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 극장에 온 안나 파블로바나처럼 마냥 신기하고 즐겁고 감동했다.


마린스키가 다섯 차례 공연에서 내게 마련해준 좌석은 단원 가족석이었다. 정식 고정 좌석이 아니라 여유 공간에 임시로 의자를 놓은 것인데 위치는 좋다. 내 옆에는 군무를 추는 발레리노의 아내와 어린 딸이 앉았다. 놀라운 것은 마린스키 극장의 입장 연령이 만 여섯 살 이상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이날 분홍색 발레복을 입은 많은 소녀가 극장에 왔지만, 관람 분위기는 최고였다. 엄마는 여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딸에게 하나, 둘, 세 번째 선 무용수가 아빠라고 가리킨다. 부동자세 같지만, 주역의 춤이 바뀔 때마다 반대로 몸을 트는 집중력과 균형감이 필요하다. 내 옆 소녀가 안나 파블로바만큼 감동했을까?

공주 총출동

이틀 전 예술 광장의 필하모닉 홀에서도 나는 오케스트라 단원을 위한 특별석을 배정받았다. 바로 악단 뒤에 놓인 교회 의자처럼 긴 좌석에 앉은 몇몇 청중이 연주 전 단원과 대화를 나눈다. 유리 하투예비치 테미르카노프Yuri Khatuevich Temirkanov가 지휘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은 구스타프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와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연주했다.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를 초대해 얼마 전 타계한 마리스 얀손스를 추모한 공연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홀의 얀손스 추모 공연

마리스의 아버지 아르비드 얀손스Arvīds Jansons는 이 홀에서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Yevgeny Aleksandrovich Mravinsky를 보좌했다. 라트비아 태생 유대인인 탓에 소련 시절 이동이 제한되었던 소년은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다가 겨우 이곳에 와서 지휘자의 꿈을 키웠다. 최고의 지휘자로 암스테르담과 뮌헨, 빈과 베를린을 오간 만년이었지만, 마리스 얀손스가 2019년 12월 1일 세상을 떠난 도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괴르네의 말러는 고즈넉한 홀 안을 숙연하게 했다. 테미르카노프가 가는 곳마다 즐겨 앙코르로 연주하던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가운데 ‘님로드’가 이날 어울릴 법도 했지만, 그는 브람스 뒤에 두어 차례 박수를 받은 뒤 그대로 사라졌다. 누구도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배우 피터 코요티를 닮으신 테미르카노프의 18번. 지휘의 예술

나는 홀을 나오며 얀손스가 지휘했던 2012년 빈 신년 음악회를 떠올렸다. 슈트라우스 일가의 축제에 그는 왈츠를 교향악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차이콥스키를 추가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가운데 ‘파노라마’와 ‘왈츠’였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독일어 제목은 '가시장미Dornröschen'이다

<스페이드의 여왕>으로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작별을 고한다. “안녕히, 마리스 아르비도비치Mariss Arvidovich!”

구할 수 있는 얀손스 최연소 연주: 1979년 오슬로 필하모닉 창단 60주년 연주회에 첫 수석 지휘자로 취임한 실황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교향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