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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5. 2020

마린스키여 영원하라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마리스 얀손스의 영웅 구스타프 말러는 차이콥스키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891년 서른한 살의 말러는 함부르크 오페라를 이끌었다. 함부르크는 차이콥스키가 베를린 다음으로 자주 방문한 독일 도시였고, 음악 총감독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초연한 한스 폰 뷜로였다. 오페라 극장장 베른하르트 폴리니Bernhard Pollini도 차이콥스키 팬이었다. 폴리니는 1892년 2월 <예브게니 오네긴>의 독일 초연에 작곡가를 초대했다. 독일어로 공연한 탓에 지휘는 말러가 맡았다. 차이콥스키는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에게 편지했다.     

여기 지휘자는 그저 그런 이류가 아니고 정말 천재란다. 타오르는 열정으로 (오네긴) 첫 공연을 지휘했지. 어제는 그가 지휘하는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들었는데 놀라웠어. 성악가, 악단, 폴리니, 무대 감독, 지휘자(이름이 말러야) 모두 <예브게니 오네긴>을 좋아해. 하지만 청중이 그렇게 즉시 사로잡힐지는 모르겠어.     

그의 걱정처럼 함부르크 청중의 반응은 미지근했지만, 말러는 열 달 뒤 <욜란타>의 러시아 밖 초연을 지휘했다. 1893년 11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두아르트 나프랍니크가 12일 전에 세상을 떠난 차이콥스키를 추모하는 음악회에서 <비창 교향곡>을 지휘할 때, 함부르크의 말러도 <욜란타>를 무대에 올렸다. 그는 추모의 뜻으로 <예브게니 오네긴>의 ‘편지의 장면’과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함께 연주했다. 1897년 빈의 궁정 오페라 감독으로 부임한 말러가 가장 먼저 연주한 작품 가운데에도 <예브게니 오네긴>은 빠지지 않았고, 1902년에는 <스페이드의 여왕>을 빈 초연했다. 그는 이 오페라가 차이콥스키의 전작 가운데 “가장 성숙하고 예술적으로 탄탄하다”라고 평가했다. 1910년 3월 5일 <스페이드의 여왕>은 말러의 손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미국 초연되었다.


호두까기 인형     

함부르크에서 말러의 연주를 보고 돌아온 직후인 1892년 3월 차이콥스키는 <호두까기 인형>을 완성했다. 러시아 황실 극장 감독 이반 프세볼로시스키의 의뢰를 받은 지 1년여 만이었다. 1881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감독으로 부임한 프세볼로시스키는 1885년 이미 차이콥스키에게 푸시킨의 <대위의 딸>을 오페라로 쓰라고 제안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프세볼로시스키는 188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 극장도 책임지게 되었다. 1888년 그의 위촉으로 빛을 본 발레가 <잠자는 숲속의 미녀>였고, 이제 <호두까기 인형>이라는 발레의 걸작이 탄생했다.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무대 작품 <욜란타> 또한 프세볼로시스키의 책임 아래 진행되었다. 그리고 프세볼로시스키에게는 누구보다 발레 마스터 마리위스 프티파가 있었다.

프세볼로시스키, 프티파, 이바노프

1818년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프티파는 차이콥스키가 만년에 교류한 인물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고, 심지어 그보다 17년이나 더 살면서 만년의 걸작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티파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발레 마스터가 된 것은 1871년의 일이나, 차이콥스키와는 1886년에야 처음 만났다. 그러고 보면 <백조의 호수>로 재미를 보지 못한 차이콥스키가 프티파와 만나면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한 것이다. 프티파가 아니었다면 차이콥스키도 발레 작곡가로서 위상이 오늘날과 같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길러낸 황실 발레 학교의 제자들이 결국 20세기 발레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미하일 포킨, 안나 파블로바, 타마라 카르사비나, 바츨라프 니진스키는 러시아어의 나라 밖 한계를 온몸으로 극복한 영웅이었다.

또 한 번 최고이지만, 초연은 망하고 만다!

<호두까기 인형>의 줄거리를 뜯어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음악이 문학을 완전히 넘어섰기 때문이다. 드로셀마이어 삼촌은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다. 주인공 클라라는 호두까기 인형을 받았다. 밤이 깊어 쥐 떼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방해한다. 클라라는 호두까기 인형의 도움으로 크리스마스를 악몽으로부터 구출한다. <오즈의 마법사>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뿌리인 셈이다.


차이콥스키의 많은 음악이 민요를 토대로 한다. 모스크바 음악원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868년부터 1869년 사이 차이콥스키는 <쉰 개의 러시아 민요집>이라는 피아노 이중주곡을 편곡했다. 전곡 길이가 30여 분에 불과한 짧은 곡들이지만, 그 의미는 작지 않다. 첫 두 오페라 <보예보다>와 <오프리치니크> 그리고 <눈 아가씨>의 춤곡이 상당수 여기에 뿌리를 둔다. 또 교향곡 2번 2악장의 ‘돌아라 물레, 나의 물레야’는 여섯 번째 민요이다. <체레비츠키>의 러시아 춤곡은 민요집의 제11곡 ‘내 푸른 포도원’을, <차로데이카>의 아름다운 쿠마의 아리오소는 제21곡 ‘소리가 울리지 않네’를 토대로 썼다. <현을 위한 세레나데>의 4악장은 제28곡 ‘푸른 초원에서’와 제42곡 ‘푸른 사과나무 아래’를 담았다. 47번부터 49번까지 세 곡은 더 유명하다. ‘바냐가 앉았네’는 현악 사중주 1번의 ‘안단테 칸타빌레’을 열고, 48번 ‘문 옆에서’는 <1812년 서곡>에 나오며, ‘볼가강의 배 끄는 노래’는 러시아 제2의 국가라 불릴 정도로 사랑받았다.

나는 제8곡 ‘문 옆에 흔들리는 소나무’를 처음 들을 때 숨이 멎을 듯했다. 이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출세작 <불새>의 피날레 선율이 아닌가! 나는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삽산 열차에서 차창 밖 풍경을 동영상 촬영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과 간간이 눈에 띄는 호수 위로 석양을 찍었다. 그런데 잠깐, 아무리 낮이 짧은 러시아의 겨울이지만 벌써 해가 지는가? 그리고 내가 찍는 방향은 서쪽이 아니라 동쪽이다. 그것은 해가 아니라 달이었다. 창백한 보름달이 밤과 낮의 경계를 흐른다. 나는 찍은 동영상에 차이콥스키의 민요 ‘문 옆에 흔들리는 소나무’를 덧입혔다. ‘겨울의 백일몽’이 되었다. 차이콥스키의 민요집을 녹음한 사람들은 그 가치를 잘 알았을 터이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발렌티나 리시차와 겐나디 로주데스트벤스키의 아내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의 피아노 독주 전곡집에 들었다.

로주데스트벤스키 부부의 차이콥스키 <50개 러시아 민요집> 가운데 6-10번

음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민요는 사라진다. 무슨 소리이냐고? 경작지가 숲을 잠식하듯이 작곡된 음악은 자연 발생한 민요를 흡수하고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한다. 풋풋한 흙내음은 사라지지만 세련된 양식이 자리 잡는다. 헝가리의 벨라 버르토크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채록했지만, 자코모 푸치니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저잣거리에서 누구나 ‘여자의 마음’ 같은 아리아를 부르면 민요는 설 자리가 없다. ‘테스형’을 두고 누가 ‘아리랑’을 찾겠나? 타란텔라와 살타렐로 따위 리듬은 기악에 흡수되었고, ‘오 솔레미오’나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나폴리 전래 민요가 아니라 디 카푸아Eduardo di Capua나 데 쿠르티스Giambattista De Curtis가 작곡한 가요이다.


러시아의 차이콥스키는 그 경계에 섰다. 그는 우크라이나 흑토(黑土)처럼 아직 비옥한 민요를 발판 삼아 전 유럽으로부터 흡수한 세련된 양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호두까기 인형>에 이르면 인공미는 극에 달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마저 만든 듯하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이은 ‘캐릭터 퍼레이드’는 애어른 할 것 없이 사로잡는다. 차이콥스키는 아라비아와 중국의 춤까지 만들어내며, 갈잎의 노래와 러시아의 ‘호팍’을 잇는다. ‘풀치넬라’의 경쾌한 리듬으로 행진을 마치면, 요한 슈트라우스의 어떤 화려한 원무에 뒤지지 않는 ‘꽃의 왈츠’가 나온다. 사탕 요정이 등장할 때 차이콥스키는 첼레스타를 사용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박물관에 이 영롱한 악기가 전시 중이다. 아마도 봇킨스크에서 처음 만난 자동악기 오케스트리온의 소리를 떠올리진 않았을까? 초연이 망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다.     

<호두까기 인형>의 무대는 좋았습니다. 아낌없이 쏟아부었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렇지만 청중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루해했죠.

2020년 1월 11일 내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본 <호두까기 인형>도 훌륭했다. 심지어 이날 호두 까는 왕자는 우리나라의 김기민이 췄다. 초연을 망쳤기 때문인지 마린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은 1934년 천재 안무가 바실리 바이노넨Vasili Ivanovich Vainonen의 무대를 상연한다. 그래도 80년이 넘었다. 누레예프의 안무를 사용하는 빈 국립 발레단이나 피터 라이트의 안무를 쓰는 코번트가든 로열 발레단이나 조지 발란신이 제작한 뉴욕 시티 발레단이나 모두 마린스키의 초연 무대를 지향한다. 민요가 전승되듯이 이들의 전통은 충실하게 전승된다. 모두 자신들이 적통(嫡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전통이 없는 발레단은 자기 안무를 만들어야 한다. 모리스 베자르의 로잔 발레단, 장 크리스토프 마요의 모나코 왕실 발레단, 크리스티안 슈푸크의 취리히 발레단, 매슈 본의 발레단이 그런 예이다. 이들은 차이콥스키와 프티파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엎어 대개 자전적인 이야기로 버무리고 심지어 음악의 순서로 바꾼다. 내가 아무리 존 크랑코의 <예브게니 오네긴>이나 마츠 에크의 <줄리엣과 로미오> 같은 발레를 ‘철학 없는 잡탕’이라고 싸잡아 비난했지만, 별 반향은 일으키지 못하리라. 다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만일 모나코나 취리히의 새로운 안무가 마린스키나 뉴욕의 전통과 경쟁해 인정받는다면 레퍼토리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차이콥스키에 잠시 기생했던 무대로나 기억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호두까기 인형>이 초연 때 인정받지 못한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어쩌면 그날 함께 무대에 올린 <욜란타> 때문에 사람들이 지친 것은 아닐까? 이제 표트르 일리치의 마지막 무대 음악을 들을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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