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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6. 2020

상실과 죽음

차이콥스키, 비창 교향곡

토마스 만의 대작 『파우스트 박사』는 어느 작곡가의 성공과 파멸 이야기이다. 독일 음악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아드리안 레버퀸은 악마와 거래해 사랑을 잃고 창작력을 얻었다. 덕분에 젊은 작곡가는 승승장구한다. 저명한 평론가가 신인에게 이례적인 호평을 해주는가 하면, 유력 출판사와 계약도 맺는다. 사실 숨은 후원자의 조건 없는 배려 덕분이었다. 후원자 ‘톨나 부인’과 아드리안은 편지로 모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부유한 미망인 톨나 부인은 아드리안에게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곳곳에서 공연되도록 은밀히 주선했고, 아드리안이 지나온 길을 마치 순례하듯 다녀갔다. 그렇지만 그녀와 아드리안은 일절 만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작곡하는 동안 그녀에게 받은 큰 에메랄드 반지를 왼손에 끼었다. 마치 다른 세상, 곧 마성(魔性)과 연결되는 예식을 치르는 듯했다. 아드리안은 톨나 부인의 초대에 딱 한 번 응해 그녀 영지에 머문다. 물론 부인은 집을 비운 상태였다. 귀족의 여유로운 생활 속에 그는 악마의 땅처럼 피폐한 주민의 삶을 목격했다.

톨나 부인의 묘한 이야기는 반사적으로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을 떠오르게 한다. 토마스 만이 썼다기엔 누가 봐도 너무 드러나는 설정이다. 그만큼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의 관계는 전무후무했다.

대략 이런 곳

소설처럼 부인은 차이콥스키에게 우크라이나 브라일로프의 별장에 머물게 했다. 자신이 쓰지 않을 때 와도 좋다는 조건이었다. 영화 <차이콥스키>에서 표트르 일리치는 별장 앞 강가에서 수영한다. 폰 메크 부인의 가족이 뱃놀이로 곁을 지나갈 때 그는 수초 사이에 숨어 지켜본다.

멱 감으러 가세

영화는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의 영적인 대화를 아름답게 그린다. 기차 안에서 뒤척이던 차이콥스키가 <오를레앙의 처녀>의 악평을 읽고 괴로워할 때 부인의 환영이 그를 위로한다. “그들이 사라져도 당신 작품은 영원할 것”이라는 말에 차이콥스키가 답한다. “나는 그보다 더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런 장면에서 악마와 거래를 떠올리지 않을 작가는 정말 유혹에 강한 사람이리라.

오리엔트 특급, 유령 대화 편

두 사람은 실제로 만났을 때 벌어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쩌면 편지를 주고받는 내내 그 생각에 번민했을지 모른다. 백만장자 미망인과 그녀가 후원하는 아홉 살 어린 동성애자 천재의 만남은 자의이든 타의이든 행복하진 못했으리라. 더 큰 고통을 피하려고 그들은 덜한 고통, 곧 만나지 않는 정신적 사랑을 택했다.

파훌스키와 율리아

영화는 두 사람의 메신저였던 차이콥스키의 제자 부아디수아프 파훌스키(Władysław Pachulski, 1855-1919)를 잘 그렸다. 그의 아버지는 폰 메크 부인 집안의 일꾼이었다. 부인은 파훌스키의 음악 교육을 차이콥스키에게 의뢰했고, 졸업 뒤에 그는 부인의 비서로 일했다. 뒷날 부인의 건강이 악화했을 때 파훌스키가 대신 편지를 썼다. 1890년, 14년에 걸친 편지의 우정이 그친 데에는 파훌스키와 부인의 딸 율리야의 결혼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딸과 사위는 폰 메크 가문의 큰 유산을 더는 표트르 일리치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마침 부인의 철도 사업도 난관에 이르렀고, 차이콥스키도 2년 전부터 차르 알렉산드르 3세로부터 3천 루블의 종신 연금을 받기 시작했다. 후원 삭감 통보를 받은 차이콥스키는 우정을 돈으로 사지 않았다는 마음을 담은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서운하다는 내용보다 마지막 몇 줄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요약한다.

과장하지 않고,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단 1분도 잊지 않겠습니다. 저 자신을 생각할 때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당신이 떠오릅니다. 

당신 두 손에 입 맞춥니다. 알아주세요. 아무도 (당신처럼) 저를 이해하지 못했고 누구도 (저처럼) 당신의 슬픔을 나누지 못합니다.     

당신의 P. 차이콥스키     

저에 대해, 다음 할 일에 대해 편지하겠습니다. 성급한 악필을 제발 용서하세요. 너무 흥분해서 잘 써지질 않습니다.

괄호 안의 말은 내가 넣었지만, 차이콥스키로서는 굳이 쓸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했고, 이것으로 서신 왕래는 끝났다.


여동생 알렉산드라의 아들 블라디미르 다비도프(Vladimir Davydov, 1871-1906)는 날 때부터 외삼촌을 똑 닮았다. 가족은 아기를 영어로 ‘베이비’라 불렀는데, 정작 블라디미르 자신이 ‘밥Bob’이라 잘못 발음해서 그것이 그대로 애칭이 되었다. 밥은 사실상 표트르 일리치의 양아들이었다. 삼촌은 자신의 닮은꼴을 상속자로 생각했고,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모두가 그를 자신처럼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가 생애 후반 그토록 카멘카를 자주 찾고 오래 머물렀던 이유는 바로 블라디미르 때문이었다. 나이 차이와 무관하게 차이콥스키는 거의 연인을 대하듯 조카를 아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가 성장할수록 애정은 기울었다. ‘그리움’은 어쩔 수 없이 차이콥스키 차지였다. 1891년, 미국 순회공연을 앞두고 지병을 앓던 여동생이 죽었다. 이미 거액을 받은 터라 미국행을 포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이아가라. 이런 구경을 포기할 표트르 일리치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친구들에게 보낸 들뜬 편지를 보면 차이콥스키는 모르핀과 술에 찌든 알렉산드라와 이미 오래전 맘속으로 이별했음을 알 수 있다. 19세 조카도 어머니의 예견된 죽음을 꿋꿋하게 견뎠다.

차이콥스키와 다비도프. 1892년

미국에서 돌아온 차이콥스키는 모데스트, 블라디미르와 함께 애도하고 가족애를 나눴다. 남자만 셋인 가족이지만, 여성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폰 메크 부인에 이어 여동생까지 잃은 차이콥스키가 이 시기 조카에게 보낸 편지는 말 그대로 연서(戀書)이다.

연인에게 편지를 받은 젊은이처럼 나는 부끄러움 없이 네 손이 지나간 자리에 입을 맞췄다. 소중하고 멋진 친구, 사랑한다!     

다시 조카를 끔찍이 사랑했던 『파우스트 박사』의 아드리안 레버퀸이나, 폴란드 미소년 타치오 때문에 죽는 『베네치아의 죽음』의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가 떠오른다. 또 한 편으로 차이콥스키는 죽은 동생의 아들을 놓고 제수와 법정 소송까지 벌일 만큼 조카를 사랑했던 베토벤을 소환한다. 베토벤이 조카 카를을 통해 이루지 못한 가정을 꿈꾸었듯이, 차이콥스키도 블라디미르 다비도프가 자신의 외모 못지않게 예술적인 재능까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편 형을 닮고자 모든 것을 따랐던 모데스트는 형과 같은 음악성이 없었고, 대신 그는 문학에 매진했다. 앞서 <스페이드의 여왕>과 <욜란타>의 대본을 원작과 다르게 바꾼 이유도 자신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블라디미르는 모데스트에게 두 삼촌의 동성애 성향을 안다는 것과 자신도 그와 같다고 고백했다. 블라디미르가 좋아하는 상대는 법률학교 동급생 루돌프(루디) 북스회프덴Rudolph Buchshoevden이었다. 블라디미르는 큰삼촌의 질투에 대해 작은삼촌에게 편지했다.

저와 루디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만화를 생각했어요. 받침대가 있고, 루디가 그 위에 섰어요. 그 아래 불길이 타오르고 제가 거기에 끝없이 연료를 부어요. 연료에는 극장표, 저녁 메뉴판, 페트야 삼촌과 작은 삼촌 작품 따위가 들었어요. 그건 그렇고 페트야 삼촌은 이따금 울적했다가 부글부글하세요.

블라디미르와 루디는 오래전 법률학교의 페트야와 그가 사랑하던 세르게이 키레예프 같은 관계였다. 아니, 페트야는 다시 법률학교 후배를 짝사랑하는 처지가 되었다. 큰 삼촌은 조카를, 조카는 동급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형이 자신을 조카처럼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데, 그 조카가 삼각관계를 자신에게 털어놓는 상황이다. 이 완벽한 ‘사랑의 사중주’를 완성하는 데 여성 연주자는 필요 없었다.

'사랑의 사중주'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헤르만 헤세의 <게르트루드>가 생각나네

1893년 2월 차이콥스키는 조카에게 헌정할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번에도 작품이 목표로 하는 수준은 분명했다.     

온통 새 작곡만 생각해. 이 작품에서 떨어지기 어렵다. 내가 만든 최고가 될 거야. 가능한 한 이 교향곡을 빨리 끝내야 해. 다른 할 일이 많기 때문이야.     
화질 개선을...

차이콥스키는 5월 말 영국으로 향했다. 6월 1일 런던 필하모닉 협회에서 교향곡 4번을, 12일 케임브리지에서는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를 직접 지휘했다. 이튿날 케임브리지 대학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므형이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카메라 고정

클린으로 돌아와 교향곡 E플랫장조와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작곡했다. 협주곡은 첫 악장만 완성되었고, 뒤에 제자 세르게이 타네예프가 E플랫장조 교향곡의 두 악장을 취합해 ‘안단테와 피날레’로 출판했다.


<비창 교향곡>은 아직 작업 중이었다. 8월 29일 절친한 친구 알렉세이 아푸흐틴의 부음을 들었다. 푸시킨을 달달 외우고 차이콥스키에게 「운명」을 써준, ‘세례자 요한’과 같은 시인 친구였지만, 만년에 차이콥스키는 블라디미르에게 아푸흐틴을 경계하라고 주의 줬다. 그는 동성애자 친구가 조카를 유혹할까 걱정했다. 그런 아푸흐틴이 죽고 이틀 뒤 차이콥스키는 <비창 교향곡>을 마쳤다. 이 무렵 차이콥스키의 후원자이자 블라디미르의 연대장이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아푸흐틴의 시를 가지고 ‘레퀴엠’을 작곡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비창 교향곡>에 이어 진혼곡을 쓰는 것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생각하고 사양했다.

차이콥스키가 사망한 모데스트의 아파트

10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라야 모르스카야Malaya Morskaya 거리 13번지의 모데스트 집에 도착했다. 10월 28일 교향곡 6번 ‘비창’을 직접 지휘해 초연했다. 11월 1일 친구들과 문학 카페Literaturnoye Kafe에서 식사한 뒤 이튿날 복통을 일으켰다. 11월 2일 의사는 콜레라로 진단했다. 11월 4일 잠시 호전되던 증상은 점차 악화로 돌아섰다. 11월 6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 새벽 3시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사망했다. 11월 8일 러시아 전역에 애도 예배가 열렸다. 장례식은 11월 9일 카잔 성당에서 거행되었고, 시신은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티흐빈 묘지에 안장되었다.

2020년 1월 13일 오후 4시 43분. 어둠 컴컴

11월 18일 에두아르트 나프랍니크가 지휘한 추모 음악회에서 <비창 교향곡>과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레오폴드 아우에르의 협연으로 바이올린 협주곡이 연주되었다. 차이콥스키보다 한 살 많은 체코 지휘자 나프랍니크는 그동안 <오프리치니크>, <대장장이 바쿨라>, <오를레앙의 처녀>, <스페이드의 여왕>, <욜란타>의 초연을 지휘한 마린스키의 산증인이었다. 두 번째로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펠릭스 블루멘펠트Felix Blumenfeld가 나누어 지휘한 음악회에서는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교향곡 4번이 공연되었다. 당시 16세였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두 공연을 모두 보며 한 해 전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초연 50주년 기념 공연 때 차이콥스키를 멀리서 보았던 추억을 떠올렸다. 42년 전 차이콥스키가 <차르에게 바친 목숨>을 보고 받은 감명만큼이나 인상 깊었다.

 스베틀라노프 동무의 지휘를 보면 공산주의를 설계한 사람이 마르크스나 레닌이 아니라 차이콥스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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