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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7. 2020

클린 차이콥스키 박물관

데니스 폰 메크와 함께

처음부터 봇킨스크를 갈 계획은 없었다. 겨울 러시아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통과 안전이었는데, 봇킨스크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나에게 봇킨스크를 강권한 사람은 데니스 폰 메크Denis von Meck이다. 차이콥스키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폰 메크 부인을 모르지 않는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에게 거액의 연금을 후원했다. 그동안 한 번도 서로 만나지 않고 편지로만 소통한 사실도 얘깃거리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연은 후원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족의 연으로 이어졌다. 차이콥스키 여동생 알렉산드라의 딸 안나 다비도바와 폰 메크 부인의 아들 니콜라이 카를로비치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안나 다비도바와 니콜라이 폰 메크 부부. 보리스 쿠스토디예프가 그린 니콜라이 폰 메크

데니스는 이 부부의 후손이다. 그러니까 폰 메크 부인과 알렉산드라 다비도프가 데니스의 현조(玄祖, 고조 윗대) 할머니이다. 안나와 니콜라이는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갈리나 폰 메크(Galina von Meck, 1891-1985)이다. 소련 시절 당국의 눈 밖에 나 옥고를 치르기도 한 갈리나는 영국으로 이주해 자서전 『내가 기억하는 그들As I remember them, 1973』을 썼다. 데니스는 갈리나 이후 두 집안의 놀라운 인연을 소개하는 데 가장 열심인 사람이다. 오십 대 나이인 그는 나도 접은 인터넷 소통망을 여럿 쓴다.

차이콥스키가 400명 가까운 지인에게 쓴 5,300여 편지 가운데는 단문 전보도 많다. 작품 구상과 진척에 대한 긴 편지도 많지만, 안부를 묻거나 여행지에서 도착과 출발을 알린 것도 상당수이다. 그러나 단문이라고 덜 중요하지 않다. 그 덕분에 우리는 30대 중반 이후 차이콥스키의 이동 경로를 손바닥 보듯 꿰뚫게 되었다. 구글에 내 인생을 공짜로 넘긴 까닭도 차이콥스키처럼 뒷날 흔적을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나도 2020년 1월 2주 동안 러시아에 머물면서 데니스 폰 메크와 수많은 단문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페이스북과 와츠앱WhatsApp을 사용하는 데니스는 나에게 왜 소통망 계정을 살리지 않느냐고 의아해한다. 차이콥스키라면 페이스북에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여행지마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을까? 데니스와 나는 이메일로 소통했지만, 그것도 몇 년 전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데니스는 한국에 차이콥스키 협회를 설립하길 원했다. 그는 독일과 일본을 예로 들며 법률적인 자문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데니스가 운영하는 폰 메크 재단의 후원이면 음악 경연이나 출판 사업 따위에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 한국에 베토벤 협회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다가 실패한 분을 가까이서 봤기 때문에, 나는 도움이 안 되리라고 거듭 양해를 구했다. 좋은 것을 나눠야 할까, 혼자 즐기면 그만일까?


(폰 메크 재단 홈페이지)

데니스는 낙담했겠지만 어떻게라도 나를 도우려고 애쓴다. 모스크바 외곽 클린의 차이콥스키 박물관까지 동행해 주었다. 혼자였다면 모스크바에서 한 시간 남짓 기차를 타야 하는데, 직접 차로 안내했다. 데니스는 넓은 신작로가 아니라 좁은 국도를 택했다. 차이콥스키가 클린과 모스크바를 오가던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비포장도로였을 터이다. 차이콥스키가 트로이카로 달리던 눈길을 자동차로 달려 한 시간 만에 클린 박물관에 도착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6개월 전인 1892년 5월 9일에 마련한 집이다. 사후 동생과 하인이 박물관으로 꾸미기 위해 노력했고, 20세기 초 조카 유리 다비도프가 애쓴 덕에 현재 모습이 되었다. 이 집에 산 기간은 짧지만, 차이콥스키가 1885년 2월에 이미 근방으로 왔다. 이 집에서 10㎞ 안쪽인 마이다노보Maydanovo에 자리 잡았다가, 1888년 5월에 바로 위 프롤롭스코예Frolovskoye로 이사했다.

모스크바에서 클린으로 가는 길에 봇킨스크를 떠오르게 하는 세네시Senezh라는 큰 호수가 있다. 그곳에서 발원한 세스트라강Sestra이 북쪽에서 긴 퇴적층을 이룬다. 강을 반으로 나누는 500m도 넘는 퇴적층은 꼭 지렛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클린Клин은 러시아 말로 ‘쐐기’(아래 원 안)라는 뜻이다. 마이다노보나 프롤롭스코예 모두 클린의 작은 마을이다.

누구나 이렇게 예습해서 가는 것은 아니다

차이콥스키는 클린의 세 집에 사는 동안 오페라 <체레비츠키>, <차로데이카>, <욜란타>, <스페이드의 여왕>,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교향곡 ‘만프레드’와 5번, 6번, 피아노 협주곡 3번 그 밖의 크고 작은 음악을 구상하고 쓰고 손봤다. 러시아 전역의 여러 차이콥스키 박물관 가운데 클린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차이콥스키의 후손과 함께 왔으니 당연히 입장료는 무료이다. 일반 관람객은 시간별로 나눠 단체로 움직여야 하지만 나는 데니스와 막역한 사이인 갈리나 스테파노바 시즈코Galina Stepanovna Sizko 수석 연구원이 직접 안내했다. 두말할 것 없이 영광이다. 내 뒤의 단체 관람객은 작은 방에서 오디오로 잠시 차이콥스키 음악을 듣고 이동했지만, 갈리나 여사는 차이콥스키가 치던 피아노로 로망스를 연주해 주었다. 박물관 안내 할머니가 피아노 앞 카펫을 밟고 지나갔다고 여사에게 주의 준다. 물론 특별 대우받는 나에게 들으라는 농담이다.

박물관 구석구석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차이콥스키의 서가이다. 셰익스피어, 괴테, 푸시킨부터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따위의 책들이 빼곡하다. 당시 새로 출판된 모차르트 전집은 차이콥스키의 보물 1호이다. 어떤 책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는지 표지가 깨끗하다. “셰익스피어는 잘 안 봤나 보다”라고 물었더니 오히려 반대이다. 너무 봐서 닿은 책은 표지갈이를 했기 때문이란다.

교향곡 5번을 쓰던 무렵 차이콥스키가 <햄릿> 환상 서곡과 극 부수음악을 썼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2막과 3막의 간주곡은 각각 교향곡 3번의 ‘알라 테데스카’와 <눈 아가씨>의 ‘멜로드라마’를 다시 사용했다. 환상서곡 <햄릿>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아꼈고, 보리스 에이프만Boris Eifman이 발레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를 안무할 때 가져다 썼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평가하려면 적어도 그만큼은 원작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작품 가운데 하나인 극부수음악 <햄릿>

박물관 마지막 방은 침실이다. 침대 아래 나이팅게일을 곱게 수놓은 슬리퍼가 눈에 띈다. 남자 신발이 저 정도이니 황후의 신발은 훨씬 예뻤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또 한참을 구경했는데 시간은 쏜살같다. 데니스와 갈리나 여사는 박물관 옆에 지을 야외 음악당 이야기를 나눈다. 갔던 길로 돌아오면서 데니스는 차이콥스키에 대한 자기 생각을 털어놓는다. 그는 원래 소방 관련 사업을 해서 성공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집안의 정신적 유산을 지키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는 생각으로 노력 중이다. 데니스의 계획 가운데 하나는 차이콥스키가 사망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미는 일이다. 표트르 일리치는 클린의 집이 아닌 그곳 동생 집에서 객사했는데 현재 일반 살림집이다.


데니스는 발레리 게르기예프도 만나 상의했고, 내친김에 푸틴 대통령 면담도 애쓰는 중이란다. 게르기예프의 일화는 언제 누구에게 들어도 재미있다. 나는 그가 자신과 닮은 분신을 여럿 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뉴욕, 런던, 뮌헨,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를 수시로 오가며 우리나라도 몇 차례 찾았다. 봇킨스크의 마리아는 몇 년마다 한 번씩 게르기예프가 그곳을 찾을 때면 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에 그의 콘서트를 구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데니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게르기예프를 소개받았는데, 너무 시간이 짧아 미안하다며 그가 다시 모스크바의 자랴드예Zaryadye 콘서트홀로 초대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강가에 새로 지은 자랴드예 콘서트홀은 짧은 시간 만에 명소로 자리 잡았다. 밤낮으로 강변 경치를 보는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게르기예프는 그날 데니스 말고도 여러 사람과 몇 차례 점심을 먹었단다. 푸틴보다 게르기예프가 더 바쁠지도 모른다.

작년 자라드예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알렉산드르 칸토로프

데니스가 나에게 해준 얘기는 어디까지나 후손의 사견이다. 그는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든 근거에 일일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보다는 드러난 사실조차 애써 부인하려는 이유가 더 궁금했지만, 역시 민감한 부분이라 듣기만 했다. 소련 시절은 물론이고 현재 러시아는 동성애자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관련한 험악한 범죄 뉴스도 종종 들린다. 나는 친한 정신과 전문의에게 동성애에 관해 물었다. 돌아온 답은 병이 아니라 배운 적이 없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차이콥스키는 지극히 정상이었고,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성소수자들의 플래시몹

동성애를 부인한 데니스는 차이콥스키의 명예 재판이나 자살설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전문 지식 없는 의학과 약학 이야기를 나눈지라 소통이 쉽진 않다. 데니스는 그가 실제로 전염병에 걸렸는데, 잘못된 처방을 쓰는 바람에 죽었다고 설명했다. 그보다 그가 든 근거가 더 재미있다. 차이콥스키는 E플랫장조 교향곡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E플랫장조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모차르트다운 조성이다. 차이콥스키는 일곱 번째 교향곡의 부제를 ‘삶’이라 지었다. 데니스는 죽기 직전까지 ‘생명’을 노래하던 명랑한 그가 왜 자살했겠느냐고 묻는다. 교향곡 7번은 첫 악장 일부만 완성된 채 뒷부분은 스케치만 남았다. 1950년대 소련 작곡가 세묜 보가티료프Semyon Bogatyrev가 전곡을 완성했다. 차이콥스키를 사랑했던 지휘자 유진 오먼디Eugene Ormandy의 녹음이 가장 믿을 만하다. 헝가리 태생 오먼디의 본명은 예뇌 블라우Jenő Blau이다. 유진이든 예뇌이든 모두 러시아말로는 ‘예브게니’이다.

오먼디의 차이콥스키 7번

러시아의 2일 차, 늦은 밤 데니스 폰 메크와 헤어졌다. 그 뒤로 그는 나를 모스크바 시내 차이콥스키 박물관과 꿈도 꾸지 못한 봇킨스크의 생가 박물관으로 더 보냈다. 미리 전화해준 덕에 VIP 대접을 받은 이야기는 앞서 했다. 나는 데니스에게 정말 ‘후원자 폰 메크’가 맞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정말 폰 메크였다면 나는 전용 기차를 타고 돌아다녔을 것이란다. 전용 제트기여야 하지 않을까? 봇킨스크를 가는 바람에 나는 계획했던 모스크바 인근 아브람체보Abramtsevo 창작촌 방문을 포기했다. 나중에 들은 데니스는 바로 전날 아브람체보 관장과 만나고 왔다며 다음번에 소개하겠단다. 책을 마치며 데니스에게 기쁘고 고맙다고 편지했다. “스파시바, 제니스! 야 류블류 테뱌, 페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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