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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Dec 16. 2020

차이콥스키 키워드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 푸시킨

푸시킨은 불과 37세를 살다 갔지만, 차이콥스키뿐만 아니라 러시아 사람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첫 손꼽는다. 차이콥스키는 그의 작품 가운데 『예브게니 오네긴』, 『폴타바』, 『스페이드의 여왕』을 오페라로 썼고, 몇 편의 시를 가곡으로 남겼다. 차이콥스키뿐만 아니라 글린카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다르고미시스키가 『석상의 손님』을, 러시아 5인조 작곡가 가운데 무스륵스키가 『보리스 고두노프』를,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살탄 차르 이야기』와 『황금닭』을 오페라로 썼다. 푸시킨이 없었다면 러시아 오페라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가운데 셋을 꼽으라면, <루슬란과 류드밀라>, <보리스 고두노프>, <예브게니 오네긴>를 들겠다. 다시 하나를 택하라면 역시 <예브게니 오네긴>이다. 여기에는 ‘자연’, ‘민속’, ‘허영’, ‘시대의 우울’과 같은 차이콥스키와 그의 시대 가치가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잘난 체 하기는...

♠ 모차르트

차이콥스키는 1886년 쓴 일기에서 모차르트를 ‘음악의 그리스도’라고 일컬었다. 음악으로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구세주라는 의미였다. 1887년에 쓴 모음곡 4번 <모차르티아나>는 ‘복되신 성체Ave verum Corpus’를 비롯한 모차르트의 선율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이었다.

모차르트에 네빌 매리너가 빠질 수 없다

표트르 일리치는 1888년 프라하를 처음 방문했을 때 볼프강 아마데우스가 <돈 조반니>를 작곡했던 빌라에 들른 것만으로 감격했다. 빌라 베르트람카는 현재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단장했다.

오, 모차르트!

밀리 발라키레프의 후원자이던 외교관 알렉산드르 울리비셰프는 세 권으로 된 모차르트를 전기를 펴냈다(1843). 1888년 차이콥스키의 출판업자 유르겐손이 불어와 독어로 된 책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달라고 청했다. 시간에 쫓긴 차이콥스키는 이 일을 모데스트에게 넘겼지만, 동생의 번역을 검수하고 서문을 쓸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유르겐손은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이 낸 모차르트 전집을 차이콥스키에게 선물했다. 차이콥스키를 어린이처럼 기쁘게 했던 이 전집은 현재 클린 박물관에 꽂혀 있다.

유르겐손의 크리스마스 선물, 책장도?

 생애 마지막 시기에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의 <환상곡, K475>의 일부를 직접 가사를 쓴 4중창 <밤>으로 편곡했다.

이 곡의 유일한 녹음. 보체스 8이 불러주면 좋겠다
6:37부터가 위 노래이다. <허공에의 질주> 가운데 리버 피닉스의 18번

차이콥스키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 <비창 교향곡>을 지휘했을 때 청중에게 함께 들려준 곡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 가운데 발레였다.     

뮌헨의 바이에른 선제후를 위한 발레

♠ 동성애

차이콥스키가 편지나 일기를 통해 자신의 동성애를 털어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사실을 털어놓는가? 그냥 사랑을 얘기할 뿐이다. 차이콥스키도 친구와 가족과 연인을 사랑했다. 아푸흐틴, 키레예프, 실롭스키, 데지레, 밀류코바, 폰 메크, 코테크, 알료샤, 블라디미르 등이다. 때로는 남자였고, 때로는 여자였고, 하인이거나 가족이거나, 짝사랑이거나 열애이거나, 아니면 플라토닉이었다. 상기할 것은 이 시대에는 사촌 사이 결혼이 금기가 아니었다. 같은 연배의 삼촌이나 이모에게 연애 감정을 갖는 일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에 더욱 가혹했던 소련 시대나 오늘날을 살았더라면 지금 우리가 듣는 작품은 남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랬더라도 그는 가족과 친구를 매우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페트야였을 것이다.

번스타인의 <플라톤 향연에 붙인 세레나데>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 폰 메크 부인

차이콥스키가 1876년부터 1890년까지 폰 메크 부인에게 쓴 편지 가운데 768통이 남아 있다. 메크 부인의 편지 가운데 남은 것은 451 통이다. 그러나 부인에게 헌정한 작품은 단 세 곡에 불과하다. 교향곡 4번과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실내악 <소중한 장소를 추억하며Souvenir d’un lieu cher> 그리고 모음곡 1번이 차례로 1877년, 1878년, 1879년에 헌정되었다.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안무한 <소중한 장소를 추억하며>. 부디 전곡을...

두 사람의 우정의 끈이 끊긴 이유는 많은 이유가 얽혀 있지만, 결과적으로 더는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중단된 것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운명의 여신이 이끈 것이었다. 1879년 이후 10년 동안, 그 뒤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차이콥스키가 쓴 작품 모든 작품 가운데 폰 메크 부인을 생각하지 않고 쓴 곡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능가하는 음악의 우정을 나눈 사람은 요하네스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밖에 없다.     


♠ 셰익스피어

낭만주의 시대 들어 뒤늦게 유럽에 전해진 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많은 작곡가의 친구였다. 차이콥스키가 모차르트만큼이나 좋아했던 작가가 셰익스피어이다. 발라키레프의 권유를 받은 29세의 차이콥스키는 ‘환상 서곡’을 작곡했다. 이듬해 수정본을 내놓았고, 1880년 최종본이 나왔다. 오늘날 대부분 최종본을 연주하지만, 블라디미르 유롭스키와 조프리 사이먼처럼 초판본을 녹음한 지휘자도 있다.

초판본도 한번 들어보자

차이콥스키도 베를리오즈나 구노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을 오페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완성은 못 했지만, 환상 서곡을 바탕으로 한 연인의 이중창은 사후 제자 타네예프가 완성했다. 쿠어트하인츠 슈톨체는 이 이중창을 발레 <오네긴>의 마지막 곡으로 고안했지만, 존 크랑코는 이 곡을 안무하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가렸지만, 1873년에 스타소프의 제안으로 쓴 환상곡 <템페스트>과 1888년에 작곡해, 1891년 극 부수음악의 서곡이 된 <햄릿>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걸작이다.     

스톡홀름의 선박 박물관에서 연주된 <템페스트>

♠ 마린스키 극장

글린카의 <차르에게 바친 목숨>과 <루슬란과 류드밀라>, 베르디의 <운명의 힘>은 볼쇼이 카멘니 극장(‘거석巨石 극장’이란 뜻이다)에서 초연되었다.

<운명의 힘> 1862년 버전을 지휘한 게르기예프. 아스미크의 아버지 이름이 보인다

1860년에 ‘해방 황제’ 알렉상드르 2세의 황후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의 이름을 딴 마린스키 극장이 개관했다. 개관 무대는 또 <차르에게 바친 목숨>이 장식했다. 1869년 차이콥스키는 <대장장이 바쿨라>를 이 극장에서 공연했다. 1874년 <보리스 고두노프>의 초연으로 마린스키 극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페라의 중심이 되었다. 1876년 <체레비츠키>로 이름을 바꾼 <대장장이 바쿨라>가 재연되었고, 1881년에는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로 빛을 잃은 <오를레앙의 처녀>가 초연되었다. 1886년 안전문제로 볼쇼이 카멘리 극장이 문을 닫으며 마린스키는 명실상부 황실 극장으로 거듭났다. 1887년 <차로데이카>, 1890년 <스페이드의 여왕>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1892년 <욜란타>와 <호두까기 인형>을 초연했고, 1895년 <백조의 호수>가 다시 빛을 보기까지 차이콥스키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무대였다.     


♠ 발레

차이콥스키 당대에 발레는 진지한 예술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덴마크를 거쳐 러시아에 건네진 발레는 남성 위주의 귀족 사회에서 관음증을 해소하는 배출구였다. 대표적인 예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마음을 흔들었던 마틸데 체신스카야Mathilde Kschessinska였다.

깡마른 안나 파블로바가 나오기 이전 황실 발레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통통한 요정

그런 눈요깃거리를 예술의 경지로 높인 사람은 황실 극장 감독 이반 프세볼로시스키와 프랑스 태생의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였다. 프세볼로시스키는 차이콥스키에게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호두까기 인형>을 위촉했고, 프티파는 이를 성공적으로 안무했다. 프티파는 더 나아가 사장되었던 <백조의 호수>를 재공연해 발레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이들 뒤로 러시아 발레단Ballets Russes을 창단한 세르게이 댜길레프와 그가 발탁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통해 러시아 발레는 20세기를 장악하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가 가장 존경한 선배는 말할 것도 없이 차이콥스키였다.     


♠ 크리스마스

오늘날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두 음악을 꼽자면 헨델의 <메시아>와 푸치니의 <라보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녀에게 크리스마스 공연 선물을 주었던 부모라면 <호두까기 인형>을 본 결과가 훨씬 좋았다고 기억할 것이다. 아이가 자라면 더는 <호두까기 인형>을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 진가를 알기 전에 이미 익숙했던 것과 결별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차이콥스키가 쓴 크리스마스 음악이 <호두까기 인형>뿐만은 아니다. 어릴 적 좋아하다가 잊고 지낸 <호두까기 인형>에게 미안하다면, 같은 날 공연했던 오페라 <욜란타>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블빌

그에 앞서 <대장장이 바쿨라>의 원작이 고골이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체레비츠키>가 같은 작품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자. 차이콥스키가 남긴 놀라운 종교 음악 가운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곡이 있다. <예브게니 오네긴>과 함께 작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 전례 음악Liturgy of Saint John Chrysostom >, 그리고 <마제파>와 나란히 쓴 <철야기도All-Night Vigil >이다. 다른 기악이나 무대 음악에 이따금 드러나는 신앙심의 원천이 바로 이 두 곡이다. 라트비아 라디오 합창단의 최근 두 음반은 나만 알고 싶은 보물이다. 이 구절을 읽은 행운의 독자에게 특별히 소개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구세주의 피 위에 세운 성당'을 표지로 쓴 라트비아 합창단
혼자만 들어야 하는데 아깝다

♠ 콩쿠르

1958년 소련 예술의 긍지를 내걸고 시작된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첫 우승자는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었다. 우리에겐 멀고도 높기만 했던 냉전의 벽이 허물어져 가던 1990년 바리톤 최현수가 1위를 했다. 성악 부문 첫 외국인 수상자였고, 차이콥스키 특별상까지 가져왔다.

우리나라 음악 방송의 특징은 자막을 빨리 흘리는 것이다. 음악을 망치는 만행이다

최현수의 제자 박종민이 2011년 스승의 뒤를 이었고, 소프라노 서선영도 함께 성악 부문 1위를 했다. 베이스 박종민은 <욜란타> 가운데 르네 왕의 아리오소를 불렀고, 서선영은 <예브게니 오네긴>의 ‘편지의 장면’을 노래했다.

스승의 앙코르를 탐한 제자

그해 피아노 부문 손열음이 2위, 가장 나이 어린 참가자였던 조성진이 3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이니만큼 표트르 일리치의 곡을 주로 겨룸이 당연하다. 피아노 부문은 대개 협주곡 1번을 최종 연주하지만, 2019년 우승자 알렉상드르 캉토로프는 2번을 택했다.

프랑스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장자크 캉토로프의 아들 알렉상드르

같은 해 바리톤 김기훈도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와 <스페이드의 여왕>의 옐레츠키 아리아로 성악 부문 2위를 했다. 2019년부터 시작된 관악 부문에 참가하려면 먼저 <예브게니 오네긴> 가운데 렌스키의 심경을 헤아려야 한다.

대략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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