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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7. 2020

미스터 차 죽음의 미스터리

아재 개그로 마무리

<비창 교향곡>의 초연을 둘러싼 차이콥스키의 사인(死因)은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끓이지 않은 물을 먹고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는 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병상의 엿새 동안 경련과 복통, 설사, 신장 기능 정지 따위의 묘사는 읽기만 해도 매우 고통스럽다. 환자는 어머니가 콜레라를 앓을 때 온욕(溫浴)했음에도 살지 못한 것을 상기하며 의사의 목욕 처방을 따르지 않았다. 차이콥스키는 음악을 좋아하는 주치의 바실리 베르텐손Vasily Bertenson이 <탄호이저>를 보러 가지 않고 자기에게 왔음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마지막엔 목욕도 했지만 이미 늦었다. 치유의 목욕은 <탄호이저>가 아니라 <파르지팔>에 나오지 않는가, 빌어먹을!

필리프 조르당의 아버지 아르맹 조르당이 직접 목욕 장면을 촬영했다

콜레라 설에 대한 반박도 나왔다. 물을 마신 시점에 대해서도 많은 추측이 있지만, 적어도 문학 카페가 위생법을 어기고 끓지 않은 물을 냈을 리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다.

넵스키 대로의 사랑방 문학 카페

콜레라가 수인성 전염병임은 이미 39년 전에 밝혀졌다. 어머니의 전례를 두려워해 목욕도 거절한 차이콥스키가 끓이지 않았음을 알면서 물을 마셨을까?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일반적인 콜레라 환자가 죽었을 때와 달리 모데스트의 아파트가 개방되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문상 왔고, 술 취한 동료 교수 베르주빌로비치Verzhbilovich가 차이콥스키의 주검에 입을 맞췄다고 자서전에 썼다.

알렉산드르 세로프의 아들 발렌틴이 그린 림스키코르사코프 초상

1979년 알렉산드라 오를로바Alexandra Orlova라는 소련 음악학자가 서방으로 건너와 유력한 설을 전했다. 스텐보크 페르모르Stenbok-Fermor라는 공작이 차이콥스키가 조카 블라디미르와 불륜 관계라는 고발장을 차르에게 보냈다. 차르는 상원 검찰관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야코비Nikolay Borisovich Jacobi에게 조사를 명했다. 대중적인 소란을 원치 않은 야코비는 차이콥스키와 그의 법률학교 동창들을 서재로 불렀다. 다섯 시간 동안 열린 명예 재판 결과 차이콥스키는 자결을 강요받았다. 차이콥스키는 비소를 먹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 증세가 콜레라와 비슷했다. 오를로바의 주장은 명예 재판이 10월 31일에 열렸다는 내용 때문에 힘을 얻었다. 차이콥스키의 행적이 비밀에 싸인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오를로바에게 도달하는 데는 몇 다리를 걸쳤다. 야코비가 아내 엘리자베타 카를로브나Elizaveta Karlovna에게, 그녀는 남편의 제자 알렉산드르 보이트로프Alexander Voitrov에게, 보이트로프가 끝으로 오를로바에게 전한 말이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과학수사대가 재구성한 듯한 과도한 추론은 다시 수수께끼로 묻히고 만다.

색안경은 벗자

나는 솔직히 표트르 일리치의 사인에 큰 관심은 없다. 그는 죽을 때가 되어 죽었다. 몇 해 더 살아서 교향곡 E플랫장조와 피아노 협주곡 3번,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따위를 완성했으면 좋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체레비츠키>나 <차로데이카>는 물론이고, <오를레앙의 처녀>나 <마제파>가 더 주목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나는 확고한 사실이 눈에 띈다.     

1893년 6월 3일 콘스탄틴 실롭스키 사망
1893년 7월 7일 블라디미르 실롭스키 사망
1893년 8월 29일 알렉세이 아푸흐틴 사망
1893년 10월 8일 알렉세이 플레셰예프 사망
1893년 11월 6일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사망
1894년 1월 13일 나데즈다 폰 메크 사망     

마치 초신성 폭발로 블랙홀이 생기며 그 앞뒤를 빨아들인 듯한 연속된 죽음이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전 재산과 그 분배권을 조카 블라디미르 르보비치 다비도프에게 남겼다. 블라디미르는 어머니처럼 모르핀 중독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끝에 1906년 35세 나이로 권총 자살했다.

나 다시 돌아갈래!

한편, 1877년 20여 일의 짧은 신혼생활을 끝으로 우리 관심에서 사라진 안토니나 차이콥스카야는 법적으로 계속 차이콥스키의 아내였다. 그녀는 차이콥스키로부터 꾸준히 연금을 받으며, 알렉산드르 시리코프라는 변호사와 사이에 세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은 모두 유년에 죽었다. 표트르 일리치 사후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그녀는 결국 정신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모데스트의 쌍둥이 아나톨리의 도움으로 요양 생활하던 그녀는 1917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아는 페트야의 이야기는 대부분 동생 모디야가 정리한 그의 편지와 일기, 그리고 전기에 바탕을 둔다. 형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동생은 그동안 형의 모든 작품을 출판했던 표트르 유르겐손Pyotr Ivanovich Yurgenson을 견제했다. 그는 사후 제자 타네예프가 완성한 작품의 판권을 유르겐손이 아닌 맞수 미트로판 벨라예프에게 줬다. 모디야는 191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일랴 레핀이 그린 미트로판 벨라예프

마리스 얀손스의 추모 공연이 열린 날 나는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나와 마린스키 근처 호텔까지 걸어왔다. 30분 정도 거리이다. 홀 바로 건너 건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특급 호텔, 벨몬드 그랜드 호텔 유럽이다. 얼마 전 러시아 관광청이 한국 영향력자 다수를 무료로 러시아에 초대했다. 이 호텔에 재우고 가장 좋은 레스토랑과 관광명소를 돌며 그저 각자의 소통망에 올려달라는 조건이었다. 차이콥스키를 취재하러 와 혼자 힘으로 돌아다닌 나와 비교된다.

대략 이런 거다

우리나라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장군쯤 되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이름을 딴 대로로 나오면 돔 크니기Dom Knigi라는 유명한 서점이 있다. ‘책의 집’이라는 뜻인데, 원래 건물 이름은 싱어 하우스Singer House이다. 재봉틀 회사 싱어가 뉴욕 사옥과 같은 마천루를 지으려다가 도시 계획에 맞지 않아 아르누보 스타일의 아름다운 건물로 대신했고, 러시아 혁명 직후 서점이 되었다. 입구부터 “BTS!”라고 적힌 특별 진열대가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한다. 차이콥스키 자료는 찾아봐도 딱히 눈에 드는 것은 없다. 음반과 DVD 코너는 얼마 전부터 아예 사라졌단다.

서점 바로 건너는 표트르 일리치의 장례식이 열린 카잔 성당이다. 그 앞에 나폴레옹을 쫓아낸 쿠투조프 장군 동상이 섰다.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상, 맨 처음 내가 봇킨스크에서 꺼내 든 그림 <필리의 군사회의>에 나왔던 주인공이다. 쿠투조프 덕분에 <1812년 서곡>이 있다. 카잔 성당 뒤로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무대가 펼쳐진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집, 전당포, 센노이 시장 따위이다. 요승 라스푸틴을 죽인 유수포프 가문의 궁전도 있다.

분명한 것은 머지않아 방탄 소년단의 인기와 한국 영향력자의 존재감이 사라진 뒤에도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남으리라는 점이다. 차이콥스키가 ‘러시아 5인조’에 들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러기엔 너무 컸다. 그는 나의 5인조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 그리고 표트르 일리치. 페트야가 하늘에서 얘기할 것이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아직도 3악장 끝나고 박수 치네요.”

도스토옙스키는 뭐라고 말할까?

“죄에는 벌을 달게 받아야지. 4악장이면 되겠지?”
"그냥, 3악장 들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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