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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l 11. 2022

‘추락하는 천사들의 도시’는 어떻게 지내나?

베네치아의 어제와 오늘

1년 전에 출판산업진흥원 칼럼에 기고한 글인데, 안 올린 줄 몰랐다.


존 베런트의 논픽션 『추락하는 천사들의 도시』는 베네치아 1500년의 보고서이다. 2005년에 발간되어 세계적인 호평을 들었고 이듬해 국내에도 번역 소개되었다. 나는 운 좋게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어렵지 않게 헌책을 손에 넣었다. 500페이지를 단숨에 읽었을 만큼 흥미진진했다.

중고로 5천 원에 산 건 맞지만 읽는 데는 한 달 걸렸다

미국인 베런트는 이탈리아에서 유년을 보낸 덕에 이탈리아 말로 소통이 가능했다. 그는 1996년 한 해를 보낼 생각으로 베네치아에 갔는데, 마침 도착 사흘 전에 라 페니체 극장이 사고로 전소했다. ‘불사조’라는 뜻의 라 페니체 극장은 1792년에 문을 연 이래 1836년에 한 번 화재를 만났고, 재건축 160년 만에 형태를 알 수 없이 다 타버렸다. 베런트는 화재 사건을 취재하며 계획보다 훨씬 오래 베네치아에 머물렀고, 그러는 몇 년 사이 도시의 명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베네치아는 서기 8세기 무렵부터 독자적인 국체를 세웠고,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내내 지중해 무역으로 전성기를 보내다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역사를 마감했다. 물 위에 세운 이 도시는 가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독특한 곳이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도 국보 1호를 화재로 잃었지만, 라 페니체 극장 화재에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방화인지 실화인지부터가 중요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재건 사업 이권을 노린 마피아가 문화유산에 방화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관련 공무원은 방화로 결론 나는 편이 책임을 벗을 수 있지만, 배상 능력이 없는 사람의 방화일 경우 복원 경비 조달이 요원해지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모든 것이 돈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무라노의 세구소 공방

베런트는 라 페니체 극장 바로 옆에 살던 유리장인 아르키메데 세구소부터 만났다. 베네치아의 무라노섬에서 평생 유리 공예를 해온 노인은 불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지녔다. 그는 극장이 다 탈 것이지만, 바람의 방향 덕분에 자신은 무사할 것을 예감했다. 베런트는 세구소 가족을 통해 베네치아 유리 공예 전통이 직면한 어려움을 들여다본다. 외부인에게는 단순히 세구소의 유산을 둘러싼 두 아들의 상속 다툼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세구소와 장남은 회사가 있는 그대로 유지되길 바란 반면, 차남은 아버지의 유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싶어 했다. 어느 한쪽 주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첨예한 갈등은 무라노 유리공방에만 그치지 않는다. (책이 나온 지 20년이 되어 가는지라 추가 취재가 필요하다.)

안토니오 만치니가 그린 커티스의 초상

베런트는 19세기 말 베네치아에 정착한 미국 커티스 가문의 4대손들을 찾아간다. 대니엘 사전트 커티스(1825-1908)는 사소한 분쟁으로 조국에 환멸을 느끼고, 베네치아로 건너와 바르바로 궁전을 매입한다. 커티스 가문의 살롱은 영미권은 물론이고 많은 예술가의 사랑방이 되었다. 화가 존 싱어 사전트와 휘슬러, 모네, 작가 헨리 제임스가 대표적인 인사이다.

헨리 제임스 원작 <애스펀 페이퍼즈>. 베네치아 현지 로케이션. 본인이 직접 자막 제작 중 ㅜㅜ

커티스 가문과 특히 가까웠던 헨리 제임스는 『애스펀 페이퍼즈』라는 소설을 통해 다음 이야기와 연결된다. 시인 에즈라 파운드와 그의 연인이던 올가 러지의 일생이 제임스의 소설처럼 애틋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다듬어 준 파운드는 파시즘과 반유대주의에 일면 동조한 것을 추궁당해 전후 불우한 삶을 살았다. 기혼인 그는 올가 러지와 살림을 차렸지만, 아내도 남편을 떠나지 않았기에 세 사람은 일생 어색한 관계를 유지했다.

파운드의 소개로 올가를 만난 앤타일이 그녀에게 헌정한 소나타

올가는 파운드에게 영감을 준 뮤즈였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베일에 가렸던 베네치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작품을 발굴하고 알린 선구자였다.

회사가 망할 정도로 열성인 이 전집의 상당 부분이 올가 러지와 에르자 파운드의 노력에 기댄 것이다

파운드가 세상을 떠난 뒤, 100세가 넘어서도 살던 집을 떠나지 않던 비운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바로 옆 페기 구겐하임 재단의 이사 라일랜즈 부부가 접근한다.  (도보 3분 거리이다)

이들은 나이 든 올가의 편의를 봐주며 호의를 얻고는 뒤로 파운드 재단을 세워 유품을 빼돌렸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라일랜즈 부부의 흑심을 눈치챈 올가의 친구들은 그녀가 파운드와 사이에 낳은 딸 메리에게 알렸다. 그러나 알프스 티롤 산중에서 아버지를 연구하며 살던 메리가 베네치아에 왔을 때는 손을 쓰기에 너무 늦었다. 라일랜즈 부부는 많은 유품의 소유권을 예일대학으로 넘긴 뒤였고 메리는 작은 보상만 받을 수 있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고인과 상속자의 뜻에 반한 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베런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천재와 그의 가족이 이용만 당한 씁쓸한 결과를 묵묵히 목격했다.

베네치아에서 무라노로 가는 길에 산 미켈레가 있다

올가는 죽어서 파운드가 영면한 산 미켈레 묘역에 나란히 묻혔다. 20세기 전위 예술의 대표자인 세르게이 댜길레프와 그의 친구이던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소련에서 추방되어 서방으로 건너와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던 유대인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가 묻힌 바로 그 ‘묘지 섬’이다. 이들에게는 베네치아가 곧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고향이었다.

실제로 찾기는 매우 어렵다 ㅠㅠ

오보에 협주곡으로 유명한 작곡가 마르첼로의 후손 지롤라모 백작은 토박이도 들어가기 힘든 빽빽한 묘역에 브로드스키가 안장되도록 주선했다. 그는 17년 동안 겨울마다 베네치아를 찾아와 물의 도시의 안팎을 시(원제목은 ‘워터마크’, 국내에 『베네치아의 겨울빛』으로 번역)로 쓴 브로드스키야말로 진정한 베네치아인이라고 생각했다.

156쪽인데 13,000원. 장당 100원에 가까운데 열라 어렵다.

마르첼로 백작의 아내 레사는 미국에 본부를 둔 ‘세이브 베니스’ 재단의 이사이다. 보수가 필요한 도시 구석구석을 복원하고 점차 수위가 높아지는 베네치아의 근본 문제 해결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 세이브 베니스가 복구한 가장 중요한 곳이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이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도 제임스의 또 다른 소설 『비둘기의 날개』와 동명 영화에 소개된다. 베런트가 커티스 가족의 상속 분쟁을 취재할 때 헬레나 본햄 카터가 주연한 영화는 무사히 현지 촬영을 마쳤다. 그러는 사이 세이브 베니스도 회원 간의 자존심 다툼 끝에 양분되고 만다.

빅토리아 시대 전형적인 작가 헨리 제임스의 <비둘기 날개>

‘라 세레니시마’, 고요한 도시라는 별명과 달리 베네치아가 쉴 새 없이 마주하는 난제가 결국 하나로 뒤엉켜 있음을 베렌트가 파악하는 동안 라 페니체 화재의 수사와 재판이 윤곽을 드러냈다. 극장 보수를 맡았던 하도급 회사 대표, 그와 사촌 사이이자 직원인 두 사람이 피의자로 유죄 선고받았지만, 재판 과정도 법 집행도 썩 개운치 않았다. 공개 입찰로 선정된 복원 시공사도 우여곡절 끝에 교체된 끝에 말 많고 탈 많은 라 페니체 극장은 2003년 성대하게 재개관했다. 일찍이 거장 루키노 비스콘티가 영화 <센소>에 자세히 포착한 덕분에 극장은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구되었고, 리카르도 무티가 바다의 도시와 인연이 깊던 바그너(그 또한 여기서 죽었다), 스트라빈스키, 칼다라의 곡을 지휘했다.

스트라빈스키 <시편 교향곡>. 대견하게도 라 페니체 극장이 나머지 곡도 다 올려놓았다

베렌트는 쥐약 전문가도 만났다. 그는 인간의 식성을 따르게 마련인 쥐들이 플라스틱을 즐겨 먹는 세태를 통해 환경오염을 경고한다. 동성애자임을 밝힌 시인 마리오 스테파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아무도 그의 자살 암시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뜻밖의 자산가임이 드러나자 출판사와 친구들은 갑자기 드러난 상속인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는 그저 시인에게 친절했던 청과물상이었을 뿐이다. 베네치아의 문제는 사람들이 플라스틱을 너무 먹은 탓일까?

살루테 성당 앞에 흉물을 세워놓았다

책에 등장하는 50명이 넘는 인물은 베런트가 어서 자신들을 엮어주기만을 기다렸던 듯이 이야깃거리를 차곡차곡 제공한다. 베런트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거대 문명의 민낯을 그토록 속속들이 알지 못한 채 무심한 관광객의 대열에 합류했을 것이다. 이는 그저 베네치아라는 독특한 존재감을 가진 도시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사라진 많은 문명이 겪었고, 세상을 호령하는 문명이 언젠가 겪을 일이다. ‘추락하는 천사들의 도시’라는 제목은 현지 단골 술집 주인인 치프리아니가 살루테 성당 옆 자신의 집에 붙인 경고 문구에서 가져온 것이다.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숱한 화보의 얼굴인 아름다운 성당이 낡아서 외벽의 조상이 부서져 내리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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