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베누토 첼리니
이제 카스텔 산탄젤로의 진짜 주인공을 만날 차례이다. 그럼 여지껏은 들러리였느냐고?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사람이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이 글을 빌어 각광을 비추고자 한다. 벤베누토 첼리니가 그의 이름이다.
첼리니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온 지 1500주년을 기념하던 해에 피렌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앞으로 유럽 대륙의 절반을 통치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그와 같은 해에 났다. 두 사람이 27세 되던 1527년 교황과 황제가 충돌한다. 당시 교황은 메디치 가문의 클레멘스 7세였다. 황제는 자신을 견제하려고 교황이 불러들인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이때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한 군대는 로마를 약탈하기에 이른다.
놀란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부터 지하 비밀통로를 통해 카스텔 산탄젤로로 대피한다. 그 과정에서 교황을 호위하던 스위스 근위대가 전멸하고 말았다. 수의 열세에도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킨 충실한 희생이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교황청 근위대는 스위스 젊은이만이 지원할 수 있다.
열아홉 살에 로마에 온 첼리니는 벌써 주위에 소문이 자자한 금세공사였다. 또한 음악가였던 아버지 때문에 마지못해 익힌 플루트 수준도 빼어났다. 첼리니가 교황의 지근거리에서 일하던 중 황제의 로마 침공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저격수로 변신한다. 그런데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대포를 다루었다. 화약을 다루고 대포를 조준하는 그의 실력은 대단했다. 사정거리 내에서 원하는 목표는 여지없이 가루가 되었다. 첼리니는 이때 전장에서 적장 부르봉의 필리프 3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이, 그리고 오랑주의 필리베르 드 샬롱 공에게 중상을 입힌 사람이 모두 자신이라고 적었다.
대포 저격 외에 첼리니는 본업으로도 교황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였다. 교황은 만일에 있을지 모를 함락에 대비해 모든 귀금속을 모아 보석을 떼어내 안주머니에 숨기고 금붙이는 녹여 몰래 금괴로 만들게 했다. 첼리니는 골방에 숨어 간이 용광로로 금괴를 만들면서도 적들을 물리칠 방법에 골몰했다. 결국 이 난리는 교황이 항복하면서 끝이 났고, 세상은 황제의 휘하가 교황을 욕보였다는 사실에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이 해에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음악감독이 된 아드리안 빌레르트는 세간의 풍자적인 가사에 곡을 붙였다.
이 일을 계기로 첼리니는 교황의 신임을 얻는 장인이 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망토의 단추를 만드는 일과 교황청 금화 주조를 차례로 첼리니에게 맡겼다. 감식안이 뛰어난 교황은 평범한 장인들을 능가하는 첼리니의 재주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서른이 채 되지 않아 승승장구하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교황의 조폐 책임자인 자코포 발두치는 첼리니가 금은보화를 빼돌리고 위조화폐를 만든다는 혐의로 첼리니를 모함했다. 교황이 첼리니에게 위조 금화를 만들 담력이 있느냐고 물었다. 첼리니의 답이 걸작이다. 그는 “목숨을 담보로 위조화폐를 찍는 것보다, 보잘것없는 재주로나마 본업에 충실하는 쪽이 더 수입이 크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동생의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첼리니를 사면할 만큼 그의 충성심과 재주를 높이 샀다.
첼리니가 34세 되던 해, 곧 1534년에 클레멘스 7세에 이어 바오로 3세가 교황에 오른다. 새 교황은 파르네세 가문 태생이었다. 그의 누이 줄리아 파르네세는 일찍이 보르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情婦)가 되어 그의 딸 루크레치아의 멘토 역할을 했다. 또 바오로 3세는 피렌체에 유학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인문학 교육을 받았다. 그가 교황에 서임되기 전부터 짓던 가문의 궁전은 성 베드로 대성당처럼 뒤에 미켈란젤로를 거쳐 델라 포르타가 완성했다. 이 파르네세 궁전이 바로 토스카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른 곳이며, 지금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 3세는 전임 클레멘스 7세만큼 첼리니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결국 측근들은 첼리니가 로마 약탈 당시 교황의 보석을 빼돌려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카스텔 산탄젤로에 수감했다. 첼리니가 포병으로서 로마를 구하는 데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 일갈했지만 소용없었다.
억울하게 천사성에 갇힌 첼리니는 탈옥을 계획한다. 에드몽 당테스나 장 발장, 쇼생크의 탈옥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첼리니는 금세공사답게 철물(鐵物)에 능통했고 감방문의 경첩에서 못을 빼내고 그 자리에 녹으로 색을 위장한 밀랍을 채웠다. 침대보를 찢어 성벽 높이만큼의 밧줄도 만들었다.
감옥소장은 첼리니를 동정했지만, 자신의 책무에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울증에 따른 환각과 발작을 주기적으로 겪었다. 소장은 자신이 진짜 박쥐이고 첼리니는 가짜 박쥐라서 그가 도망치면 자신이 잡을 수 있다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축제날 밤 첼리니는 정말 배트맨이 되었다. 그는 미리 만든 밧줄을 가지고 성루로 기어올라 다시 성벽을 타고 내려가는 탈옥을 구상했다. 밧줄을 잡은 손이 피범벅이 되었고 그는 소변으로 자신의 손을 씻었다. 중간에 간수와 마주치자 그는 밧줄을 풀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배트맨처럼! 그러나 아뿔싸, 착지할 때 다리에 꽂은 단도 때문에 그만 정강이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다리를 싸매고 5백 걸음 이상을 기어가, 근처를 지나던 새벽 일꾼에게 유력한 보호자의 궁전까지 업어달라고 청했다. 이렇게 첼리니의 첫 번째 탈옥이 이뤄진다.
첼리니의 보호자는 그를 사면하도록 교황을 설득했지만, 귀가 얇은 바오로 3세는 마음을 바꾸어 첼리니를 산탄젤로로 돌려보낸다. 물웅덩이에 독충이 우글거리고 볕도 들지 않는 지하 감방에서 첼리니는 이가 다 빠지도록 혹독한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숯으로 벽에 천사에 둘러싸인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그리고 시편 130편 ‘주님 깊은 구렁으로부터 주님을 부르나이다De profundis’를 부르면서 견뎠다.
00:08 1. Aus der Tiefen rufe ich, Herr, zu dir (Chorus)
04:58 2. So du willst, Herr (Arioso)
09:26 3. Ich harre des Herrn (Chorus) <- 진짜 수렁에서 부르는 듯하다.
13:29 4. Meine Seele wartet auf den Herrn (Aria)
19:08 5. Israel hoffe auf den Herrn (Chorus)
첼리니는 자신을 구렁에서 볕이 드는 방으로 옮겨준 수염 난 은인이 성 베드로라고 믿었다. 첼리니를 아끼던 파르네세 추기경과 파르마 추기경이 교황을 설득한 끝에 그는 마침내 지긋지긋한 산탄젤로를 벗어났다.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벤베누토 첼리니가 직접 적은 그의 자서전으로부터 그가 산탄젤로에서 겪었던 일을 간추렸다. 첼리니의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회고에 비하면 부끄러운 요약이다. 이를 소설이나 영화로 다시 만든다면 흥행은 따놓은 일일 터이다. 나와 같이 생각한 두 사람이 있다. 첼리니의 자서전을 독일어로 번역해 소개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그 영향을 받은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이다.
베를리오즈는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를 통해 그가 교황의 재정담당관 발두치의 딸과 벌인 사랑의 도피와 살인, 그리고 교황과 창작의 소신을 놓고 밀고 당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전곡 가운데서 가져온 <로마의 사육제> 말고는 잊혔던 걸작이 21세기 들어 화려하게 재조명받고 있다. 그 눈부신 음악은 목마른 사람에게만 허락된 선물이다.
카스텔 산탄젤로에서 첼리니 삶의 극히 일부를 얘기한 나는 그의 진정한 걸작 이야기는 피렌체를 위해 아껴두련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