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피돌리오 광장의 주피터와 리엔치
오늘날 수도라는 뜻의 영어 ‘캐피털capitol’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캄피돌리오Campidoglio’에서 온 말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곳에 주피터 신전을 세웠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만큼 웅장한 로마의 랜드마크였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이교도의 신이 금기시되자 신전은 철저히 파괴되기에 이른다.
‘주피터’는 모차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에 붙은 이름이나, 작곡가의 뜻에 따른 것은 아니다. 요한 페터 잘로몬이라는 음악가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축제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 흥행을 위해 붙인 별칭이다. 헨델의 이탈리아풍 오페라에도 ‘조베Giove’라는 이탈리아식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는 주피터지만, 그보다는 영국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가 쓴 <행성The Planets> 가운데 ‘목성Jupiter’이 이곳에 가장 어울린다.
‘주피터’의 앞부분은 워낙 유명하지만 실제로 더욱 감동적인 것은 중반 이후이다. 현란한 팡파르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마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홧김에 번개를 날리거나 마음에 드는 여인이면(심지어 동성도) 신인지 인간인지 결혼을 했는지 아닌지 따지지 않고 달려드는 신들의 우두머리를 보여준다면, 뒷부분은 파르나소스 군주의 위엄과 권위를 묘사한 듯하다. 후자는 곧 아담에게 영혼을 불어넣는 미켈란젤로의 하느님과도 같은 모습이다. 앞서 말했듯이 <천지창조> 하느님의 모델은 곧 주피터이다. 또 곡을 쓴 홀스트에게는 20세기 초 대영제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음악이었으리라.
르네상스 시대 캄피돌리오 언덕에 광장과 궁전을 조성한 사람은 미켈란젤로이다. 교황 바오로 3세는 1538년 카를 5세 황제의 방문을 앞두고 새로운 로마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만년의 미켈란젤로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폐허의 흔적을 쓸어내고 그 안에 새로운 시대의 기운을 담고자 했다. 원대한 계획은 황제의 방문 때는 물론이고 그의 생전에도 마무리되지 못했다. 다음 세기에야 미켈란젤로의 구상이 실현되었고, 바닥 포장까지 마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이다.
중앙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을 중심으로 카파렐리 클레멘티노 궁전, 콘세르바토리 궁전, 세나토리오 궁전, 누오보 궁전이 둘러서 있다. 현재 미술과 고고학의 유적을 전시하는 박물관과 관공서로 쓰인다.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거대한 석상이 양쪽으로 서 있다. 쌍둥이 형제 카르토르와 폴룩스이다. 제우스가 백조로 변해 레다와 사랑을 낳은 뒤 레다가 알을 두 개 낳는데, 하나에서는 폴룩스와 헬레네가 나왔고 다른 하나에서는 카스토르와 클리템네스트라가 나왔다. 전자는 제우스의 자식들이고, 후자는 레다와 인간 남편 사이의 자식들이다. 때문에 폴룩스는 나면서부터 불사의 몸이었지만 카스토르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매우 사이가 좋아 카스토르가 죽자 폴룩스는 아버지에게 형과 함께 있고 싶다고 청한다. 제우스는 두 형제를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쌍둥이자리의 유래이다.
프랑스 바로크 시대 작곡가 장 필리프 라모는 오페라 <카스토르와 폴룩스Castor et Pollux>에서 신화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다. 여기서 쌍둥이는 텔라이레 공주를 좋아하는데 그녀가 좋아하는 쪽은 카스토르이다. 카스토르가 전장에서 죽자 텔라이레는 애통해하며 폴룩스에게 청한다. 아버지에게 가서 형을 살려달라 부탁하라고! 환장할 일이다! 그러나 제우스도 동생 하데스가 다스리는 저승의 일은 어찌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 저승에서 카스토르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폴룩스는 카스토르에게 자기 대신 이승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러나 카스토르 또한 텔라이레와 이별하기 위해 단 하루만 이승에 머물겠다고 한다. 우애에 마음이 움직인 제우스는 형제 모두에게 불사의 선물을 주는 것이다. 진작 그럴 것이지.
라모의 눈부신 오페라 가운데 가장 탁월한 부분은 텔라이레가 슬픔에 젖어 카스토르를 찾는 노래 ‘슬픈 망령이여Tristes apprêts’이다.
라모의 오페라 말고 카스토르와 폴룩스 형제를 음악으로 만나는 좋은 방법이 하나 더 있다. 슈베르트가 친구 마이어호퍼의 시에 붙인 가곡 <쌍둥이 별자리로 가는 뱃사람의 노래Lied eines Schiffers an die Dioskuren, D360>이다. 디오스쿠리는 ‘제우스의 아들들’이라는 뜻이다.
디오스쿠리, 쌍둥이 별자리여
내 돛단배 위를 비추네
나를 바다 위에서 지켜주네
온화하고 신중하게
스스로 굳게 믿는 그는
폭풍을 만나도 갈팡질팡하지 않고
그대의 빛에 비추어 그 자신이
용기 있고 축복받았다고 생각하네
내가 모는 이 배
대양의 파도를 가르네
일단 안전하게 육지에 도달하면
그대의 신전 기둥 위에 올리겠네
디오스쿠리, 쌍둥이 별자리여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바라다 보이는 고대 로마의 시가지 포로 로마노에, 세 개의 기둥만 남은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이 서 있다.
미켈란젤로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오른쪽에 망토를 입은 사람의 동상이 보인다. 콜라 디 리엔초(Cola di Rienzo, 1313–1354)이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공화정을 옹호했던 미켈란젤로는 이곳에서 일어났던 민중운동을 되살리려는 숨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14세기에 등장한 호민관 콜라 디 리엔초의 시기를 말한다. 호민관(Tribunus plebis)은 기원전 로마의 공화정 시기에 생겨난 선출직 관료였다. 원로원(Senatus)과 집정관(Consul)을 견제하며 민의를 대변하는 관직이었는데, 로마가 제국으로 바뀌면서 그 권한이 황제에게 흡수되었다.
14세기에 들어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동한 일이 벌어진다. 유대 민족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갔던 것에 비겨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교황의 측근으로 아비뇽에 머물면서 사태를 불식시키고자 애를 썼다. 그런 가운데 로마에서 온 콜라 디 리엔초가 아비뇽의 교황청을 방문한다. 교황의 지지를 얻은 그는 로마로 돌아와 호민관을 자처하고 민중의 힘으로 혁명을 일으켜 부패한 귀족들을 몰아낸다.
콜라는 외세에 의해 찢긴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이상에 불탔지만 그런 가운데 스스로 황제를 자임하고 로마제국을 부활시키겠다며 독재자가 되었다. 결국 반대 세력과 전투 끝에 붙잡혀 처형된다. 애국자이자 선동가라는 극단의 평가를 받은 콜라 디 리엔초는 19세기 혁명의 시기에 다시 조명받는다. 영국 작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은 이탈리아에 건너와 <리엔치: 로마의 마지막 호민관>이라는 소설을 쓴다. 직전에 나온 <폼페이 최후의 날>과 더불어 유럽 곳곳에서 적잖은 호응을 얻었다.
불워 리턴의 원작을 가지고 독일의 젊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리엔치, 마지막 호민관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을 완성한 것이 1842년이다. 그 자신이 1830년 드레스덴 봉기의 선봉에 섰던지라 당시 혼란스러운 독일의 모습이 중세 이탈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민중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리엔치의 한계도 알았고, 결국 작품은 호민관이 민중의 지지를 잃고 화염 속에 죽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20세기 들어 이 바그너의 초기작에 열광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광적인 추종자로 그의 유족들을 친가족처럼 대한 탓이기도 하지만, 리엔치라는 실패한 인물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오늘날 이 작품의 연주는 많지 않다. 심지어 바그너 축제가 열리는 바이로이트에서도 이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풍의 작품은 연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곡과 리엔치의 아리아 ‘전능하신 아버지’는 단독으로 종종 연주된다. 바그너의 탄생 200주년을 맞았던 지난 2013년을 앞두고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가 올린 무대는 나치의 세계지배 야욕을 보여주는 연출로 주목을 받았다. 서곡은 베르크호프라 불리는 히틀러의 알프스 집무실을 암시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또한 찰리 채플린이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에서 보여줬던 무아지경을 패러디한 것이다.
리엔치의 아리아 ‘전능하신 아버지Allmächt'ger Vater’를 보면 히틀러가 어떤 사명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전능하신 아버지, 저를 굽어보소서
먼지 속에 고통받는 제 목소리를 들으소서
힘을 잃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기적이 제게 영향을 주도록
당신께서 제게 힘을 주시고, 강력한 능력을 주시니
하찮은 자들에게 빛을 주시고,
먼지 속에 떨어질 것을 일으키시니
당신은 사람들의 부끄러움도 위대하고 장엄한 영광으로 바꾸십니다
아 하느님, 당신의 영광으로 세우신 것을 허물지 마소서
오 주님, 사람들의 영혼을 에워싼 칠흑 같은 밤을 거두소서
저희에게 당신의 영원한 권능의 빛을 내리소서
주여, 아버지시여, 저를 굽어보소서! 드높은 곳으로부터 굽어 보소서
오 하느님, 강력한 힘을 주시고, 간절한 애원에 귀 기울이소서
캄피돌리오 광장 아래의 리엔치 동상은 그가 죽은 자리에 1877년에 지롤라모 마시니가 세운 것이다.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에 의해 이탈리아가 로마 제국 이래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고 점차 아프리카로 제국주의의 야욕까지 보이던 시점이기도 했다.
끝으로 언덕을 올라가는 완만한 계단과 궁전의 옥상을 장식한 미켈란젤로의 아름다운 난간(欄干)으로 캄피돌리오의 음악 기행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난간이라는 말은 어렵지는 않지만 자주 쓰는 어휘는 아니다. 대개 “난간에 기대어” 정도의 표현에 많이 쓴다. 난간(Balustrade)이라는 건축 용어는 석류꽃(Balaustra)에서 왔다. 짧은 기둥인 난간동자(欄干童子)의 모습이 봉오리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난간동자가 늘어선 것이 곧 난간이다. 이런 사치스러움이 멀리 아르누보에까지 닿아 있지 않겠는가!
나는 ‘밸러스트레이드’라는 말을 조지 발란신의 안무에서 처음 보았다. 발란신이 1941년 스트라빈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붙인 춤이 <난간Balustrade>이었다. 당시 청중에게 이해되지 못한 이 안무는 30년 뒤 스트라빈스키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1972년에 열린 축제에서 부활했다. ‘난간’이라는 제목은 버렸지만 그 기하학적으로 통일된 질서 정연한 춤사위에서 미켈란젤로의 솜씨를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