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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28. 2023

단눈치오와 ‘80세대’

미케티가 그린 <봄과 사랑 Primavera e amore, 1901>

19세기 세기말 20세기 초 이탈리아에 자타가 반신(半神)이라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행적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 시인으로 로맹 롤랑,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각국 동료 작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고, 이탈리아 최고의 배우를 비롯해 눈에 드는 모든 여인을 사로잡을 정도의 마성을 지녔다. 자동차 속도광이며 비행사로 적지를 폭격함과 동시에, 군대 사령관으로 친위대를 이끌고 실지(失地)를 점령해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했다. 그런 그를 무솔리니가 멘토로 삼았고, 히틀러가 감시할 여간첩을 곁에 붙일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오늘날 이탈리아 밖에서는 파시즘의 부싯돌쯤으로나 겨우 기억되는 그의 이름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863-1938)이다.

932쪽. 보는 데 넉 달, 정리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원서 가운데 한국은 영국(가운데)이 아닌 미국(오른쪽) 표지를 따랐다.

단눈치오는 이름부터 남달랐다. 성모 마리아의 수태를 고지한 가브리엘 천사를 뜻했으니 말이다. 1863년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초의 페스카라에서 태어난 그는 열한 살 때인 1874년부터 피렌체 인근 프라토의 치코니니 기숙학교로 유학했다. 학창 시절에 발표한 첫 시집 『이른 봄 Primo vere』부터 문단의 주목받은 그는 로마 대학으로 진학해 소설까지 발표한다.

페스카라의 생가 박물관과 일곱 살의 단눈치오, 위키피디아

귀족 태생이 아닌 단눈치오는 1883년 갈레세 공작의 딸 마리아 아르두앵과 결혼해 신분 상승에 성공한다. 그녀와 결혼 생활을 이어가며 세 자녀를 뒀지만, 숱한 여성 편력은 그칠 날이 없어 7년 만에 파경에 이른다. 1887년 만난 바르바라 레오니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레오니 백작의 아내였던 그녀는 단눈치오에게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권한 뮤즈였다. 단눈치오와 바르바라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소설 『쾌락 Piacere』으로 출간되었다. 

을유 세계문학 표지는 엉뚱한 경우가 많지만, 번역된 것이 어디냐! 문지의 표지는 영국 화가 마커스 스톤의 <사랑 In Love>.

여색 못지않게 단눈치오가 밝힌 것은 사치였다. 그의 물욕은 끝도 없어서 집 앞에 빚쟁이가 끊일 날이 없었다. 빚 독촉을 피해 나폴리로, 또 그 반대편 프랑카빌라로 도망 다니면서도 여성은 수없이 바뀌었다. 공작부인 마리아 그라비나를 만난 1892년 무렵에는 『무고한 존재 L’innocente』를 발표했고, 1894년에는 니체의 영향을 받은 『죽음의 승리 Trionfo della morte』도 빛을 보았다.

잔 카를로 잔니니를 기용한 비스콘티 감독의 <무고한 존재> (우리말 DVD는 <순수한 사람들>)

1895년 단눈치오는 평생 가장 큰 교감을 나눈 대배우 엘레오노라 두세(Eleonora Duse, 1858-1924)와 관계를 시작한다. 그녀는 동시대 프랑스의 사라 베르나르 정도나 겨룰 정도의 독보적인 배우였지만, 사이렌과 같은 단눈치오의 연가(戀歌)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피렌체 인근 세티냐노에 자리 잡은 두 사람에게 전 이탈리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릴린 먼로에게 베르나르와 두세를 비교하며 동의를 구하는 시빌 손다이크. <왕자와 무희> 가운데

같은 해 동향의 절친한 화가 프란체스코 파올로 미케티(Francesco Paolo Michetti, 1851-1929)가 <요리오의 딸 La figlia di Iorio>로 제1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대상을 탔을 때 단눈치오가 라 페니체 극장에서 축사했다. 이 그림은 1904년에 단눈치오가 희곡으로 발표할 소재였고, 그때는 두세를 명중했던 사랑의 화살이 그가 ‘니케’라 부른 알레산드라 디 루디니 후작부인을 겨누고 있었다. 이렇게 단눈치오는 늘 애인을 직접 지은 애칭으로 불렀다. 주세피나 만치니 백작부인은 ‘아마란타’, 나탈리 드 골루베프는 ‘캅카스의 디아나’였다. 나탈리와 그는 빚 독촉을 피해 파리로 이주했다.

<요리오의 딸>. 단눈치오 책은 미케티를 표지로 써야 한다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고도 산업사회가 된 20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는 새로운 질서를 주장하는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기계문명을 예찬한 이들에게 자동차, 비행기, 폭약 따위가 찬양 대상이었고, 단눈치오는 그들에게 선구자였다.

미래파가 보았다면 환호했을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모차르트 <레퀴엠> 연출

일찍이 가리발디 장군이 나폴리에서 외세를 쫓아내며 이룩한 이탈리아 통일은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알프스 이남 트리에스테 지역의 수복으로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단눈치오는 전쟁만이 통일을 완수할 유일한 길이며, 그를 통해 전통과 단절하고 모든 부패함과 열등감을 쓸어 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참전을 머뭇거리는 정부를 압박했고, 여론에 떠밀린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영국 편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웠다. 몇십 년 뒤에 이 나라는 역시 어느 쪽이 유리할지 셈을 굴리다가 반대편에 붙을 것이었다.

잡지에 실린 단눈치오 삽화. 트리에스테에 전단 살포 중이다. 위키피디아

단눈치오는 뒷짐만 지지 않고 직접 비행기를 타고 트리에스테 폭격에 앞장섰다. 그는 폭탄에 그치지 않고 직접 쓴 전단을 뿌려 오스트리아를 맹폭했다. 단눈치오는 겉멋만 든 이카로스가 아니었다. 당시 비행은 죽음을 각오한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 착륙 사고 끝에 동료는 사망하고, 그는 한쪽 눈을 실명했다. 군중은 한눈을 잃은 그를 바그너 신화에 나오는 주신(主神) 보탄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단눈치오는 이렇게 거구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알프스 이북의 일이었다. 파리 강화 조약이 열리던 중에 단눈치오는 그를 추종하는 2,600명의 군대와 함께 트리에스테 너머 피우메(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리예카)로 진격했다. 도시는 열광했고, 단눈치오는 친위대 아르디티를 앞세워 공화국을 통치했다. 광기가 이성을 지배한 카르나로 이탈리아 섭정국은 연합국과 이탈리아 정부의 개입으로 1년여 만에 막을 내렸지만, 베로나 인근 가르다호숫가로 낙향한 단눈치오의 존재감은 꺾이지 않았다.

피우메의 단눈치오(지팡이)와 친위대 아르디티. 위키피디아

집권 전후 기반이 취약했던 무솔리니는 끊임없이 단눈치오의 지지를 촉구했고, 그가 실제로 나서지는 않으면서 자신을 후원하기만을 바랐다. 입헌군주국에서 단눈치오는 원하기만 하면 대통령이든 뭐든 될 수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한정된 자리에 만족하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결국 그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게 단물을 다 빨린 뒤에 허세만 남은 노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가르다호숫가 단눈치오의 저택, 비토리알레 델리 이탈리아니 (Vittoriale degli italiani: 이탈리아 승리의 신전)

이렇게 근대에 파란만장한 삶으로 단눈치오와 겨룰 사람은 나폴레옹 정도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의 존재감은 강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밖에서 (심지어 세월이 지난 지금 이탈리아 안에서도) 단눈치오에 대한 평가는 우리말로 옮긴 그의 전기 제목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시인, 호색한, 전쟁광’. 원제목은 『The Pike: Gabriele d’Annunzio』이다. ‘창끝’쯤의 의미로 그를 은유했으니 무엇의 정점인지 상상은 자유이다. 어쩌면 그에게 악평보다 무서운 것은 망각이었을 터이니 차라리 오명이 나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음악에 관심을 둔 우리에게 단눈치오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영감의 원천이다.

베자르 발레단의 이 공연이 좀 제대로 출시되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드뷔시의 극 부수음악 『성 세바스티앙의 순교 Le Martyre de saint Sébastien』를 통해 그를 처음 알았다. 드뷔시는 단눈치오보다 한 살 많은 동년배로 시인이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 합작으로 이 곡을 썼다. 단눈치오야 말할 것도 없이 불어에 능했고 드뷔시 또한 젊은 시절 로마에 유학했으므로 둘 사이 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단눈치오와 이탈리아 음악을 논하기에 드뷔시의 작품은 주인공이 고대 로마인이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


단눈치오는 20세기에 활동한 많은 이탈리아 작곡가에게 토양을 제공했다. 그의 시를 가장 적극적으로 작곡한 사람은 역시 아브루초 태생의 선배 음악가 프란체스코 파올로 토스티(Francesco Paolo Tosti, 1846-1916)였다. 가장 유명한 연가곡 <아마란타의 네 칸초네 4 Canzoni di Amaranta> 말고도 다섯 곡의 <우울 Malinconia>과 여섯 곡의 <저녁 La sena>, 여덟 곡으로 된 <위안 Consolazione> 같은 연작, 그 밖에 여러 단편까지 40곡을 헤아린다.

미케티의 그림을 제대로 사용한 베이스 미켈레 페르투시의 토스티/단눈치오 앨범

단눈치오는 단순히 시인에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음악에 탁월했다. 그는 오케스트라가 조율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 토스카니니를 놀라게 했으며, 로맹 롤랑은 “누구도 그보다 음악을 잘 들을 수는 없다”라고 썼다. 그는 후배 작곡가 잔 프란체스코 말리피에로(Gian Francesco Malipiero, 1882-1973)와 함께, 바로크 시대의 문을 연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묻힌 작품을 발굴했다. 

Jean Rondeau plays Frescobaldi: Toccata Settima

단눈치오가 얼마나 음악에 탐닉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베네치아의 카세타 로사 Casetta Rossa에 살았는데, 인근에 화려한 바로크풍의 피사니 궁전이 있었다. 어느 날 집에서 작업하던 단눈치오는 음악원으로 쓰이던 피사니 궁전에서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의 ‘칸초네’가 연주되는 것을 ‘느꼈다’. 느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은 운하를 두 굽이 돌아서, 직선으로는 500미터가량 떨어진 거리였기 때문이다. 궁전으로 간 그는 유명 연주자 고프레도 자르다(Goffredo Giarda, 1886-1973)가 연주하는 것을 보았고, 연주가 끝난 뒤에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프레스코발디가 바흐에게 미친 영향을 깊이 토론했다.

그 뒤로 단눈치오는 종종 여인을 동반하고 자르다의 연주를 들으러 갔다. 공습이 있던 하루는 두려워하는 여인을 위로하며 프레스코발디를 스물네 번이나 반복해 청해 들었다. 그 사이 그의 집 앞에는 폭탄이 떨어졌다. 오스트리아는 그를 잡지 못해 혈안이었다. 이처럼 전쟁통에 그가 벌인 도락(道樂)은 마치 헬기에서 바그너의 <발퀴레의 비행>을 틀고 베트남 밀림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던 영화 <지옥의 묵시록> 속 광인을 떠오르게 한다. 

두발 없는 전쟁광 듀발

단눈치오의 문학이 음악에 미친 영향은 ‘1880년대생 Generazione dell’Ottanta’ 작곡가, 알프레도 카셀라(Alfredo Casella, 1883-1947), 잔 프란체스코 말리피에로, 일데브란도 피체티(Ildebrando Pizzetti, 1880-1968) 그리고 오토리노 레스피기(레스피기는 정확히는 1879년생이다)에 들어서 본격화된다. 이들 ‘80년대생’ 작곡가를 싸잡아, 그중 특히 레스피기를 가리켜 오페라를 쓰지 않은 이탈리아 작곡가라고 부르는데 이는 오류이다. 오페라 이외의 관현악 작품을 많이 썼다는 뜻이지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레스피기는 십여 편의 오페라를 썼고, 이는 결코 묻힐 수준이 아닌 그의 대표작들이다. 레스피기의 오페라 중 단눈치오의 희곡을 쓴 것은 없지만, 그 또한 여러 편의 가곡으로 시인이 이탈리아어에 미친 업적에 호응했다. 마찬가지로 많은 오페라를 남긴 말리피에로도 여러 가곡에 단눈치오의 시를 썼다.

Zandonai: Francesca da Rimini (Sara Jakubiak / Jonathan Tetelman / Deutsche Oper Berlin)

단눈치오의 희곡 중 가장 뛰어난 오페라가 된 것은 리카르도 찬도나이(Riccardo Zandonai, 1883-1944)가 1914년에 곡을 붙인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Francesca da Rimini>이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비운의 인물에 대한 20세기의 관찰이다.


<요리오의 딸>은 1906년 알베르토 프란케티가, 1954년에는 피체티가 오페라로 썼지만 둘 다 들을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피체티의 <대성당의 살인 Assassinio nella cattedrale>(T. S. 엘리엇의 희곡에 붙인)이나 그가 단눈치오의 <페도라>를 가지고 쓴 오페라를 들어보면 <요리오의 딸>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다.

루제로 라이몬디가 주연한 <대성당의 살인>

‘80년대생’ 작곡가 가운데 레스피기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은 그동안 거의 간과되었다. 간과라기보다는 금기시되었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이들은 파시즘에 순응한 작곡가로 치부되었다. 레스피기도 비슷한 처지였지만, 실제로 그가 무솔리니가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낼 무렵에 세상을 떠났고, 그가 로마로 진주할 때 유일하게 찬양하지 않은 작곡가라는 평가 때문에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전체주의가 가시화되었던 1930년대 중반에도 나라 안팎의 외국인까지 그가 합리적인 대화상대라고 굳게 믿었다.

아름다움에 목숨 건 할머니들이 무솔리니에 속을 뻔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레스피기의 많은 작품 가운데 오늘날에도 연주되는 곡은 몇 곡의 ‘로마 연작’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나치와 어느 정도 협력한 전력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전후 독일 안팎에서 받는 평가에 비하면 지나치게 인색한 대접이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가 독일에 비해 좌파, 특히 공산당의 입김이 훨씬 센 나라이기 때문이다.


(레스피기의 오페라 <루크레치아> 전곡. 스위스의 레스피기 전문가 아드리아노의 귀중한 앨범)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로 대표되던 이탈리아 공산당은 파시즘과 대척점에 있었고, 전후에도 중요 정치세력이었기에 낙인찍힌 작곡가가 복권되기는 쉽지 않았다. 또한 전통적인 오페라의 나라에서 이들은 미운 오리 새끼 신세였다. 그러나 설령 정치적으로 미성숙하다거나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다고 해서 그 작품마저 묻어버린다면 이들 이전 시대 예술가도 숱하게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예술에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잊힌 작품을 재고해 시대정신이 도달한 수준을 가늠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려고 한다.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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