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노 비스콘티의 마지막 영화 <무고한 존재 L’innocente, 1976>는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쓴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이 영화는 국내에 <순수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DVD로 출시되었는데, 최소한 단수여야 맞는다. 여기서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소설 제목을 따랐다. 참고로 소설의 영불 번역 제목은 ‘불청객 The Intruder’, 미국 번역 제목은 ‘희생양 The Victim’이다)
툴리오 헤르밀은 아내 줄리아나와 함께 간 파티에서 아내를 두고 정부(情婦) 테레사를 따라 나간다.
가운데가 테레사, 왼쪽 입구 부부가 도착한다.. 드레스 코드는 빨강..
며칠 뒤. 툴리오의 동생 페데리코가 친구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 형수 줄리아나가 들어와 쓰러진다. 손님 중의 저명 작가 다르보리오가 그녀를 안아 누인다. 아내가 다르보리오와 가까워진 것을 안 툴리오는 질투하고 테레사는 이를 비웃는다.
다르보리오, 우리 형수야!
툴리오는 기분전환 겸 아내와 피렌체 근교 어머니 집을 방문한다. 아내와 애정을 되돌릴 생각에 함께 신혼집에 다녀온 그에게 어머니는 줄리아나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좋아한다. 툴리오는 아내에게 다르보리오를 소개한 동생을 몰아붙이고, 아내에겐 아이를 지우라고 다그친다.
신혼 기분인 줄 알았더니 악몽일세
툴리오는 테레사도 다르보리오에 호감을 느끼는 것을 보고 더욱 언짢아한다. 그때 아프리카를 다녀온 다르보리오가 전염병으로 급사한다. 툴리오는 아내에게 연적(戀敵)의 죽음을 전하며 묘한 승리감을 느끼지만, 아내는 경멸하듯 그를 바라본다. 줄리아나가 낳은 아이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고 세례를 받는다. 줄리아나는 남편 몰래 아이를 보고 흐뭇해한다. 그런 아내에게 폭력과 폭언을 행사한 툴리오는 더욱 초라해진다.
원작에서는 죽었다고 나오지 않고,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전해 듣는다
모두가 성탄 미사를 보러 간 크리스마스. 빈집에 홀로 남은 툴리오는 아이를 추운 창밖에 두었다가 다시 들이고 시치미 뗀다. 결국 무고한 아이는 숨을 거둔다. 줄리아나는 남편을 증오한다.
엄마가 바람피웠으니 너도 잠깐 바람 쏘이자
결국 아내를 떠나 연인에게 돌아온 툴리오. 그는 호기심을 잃은 삶은 더는 무의미하다며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테레사는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온다.
인간아, 심심하다고 진짜 죽냐!
비스콘티 감독은 소설의 배경이 된 로마와 피렌체의 빌라에서 직접 촬영하며, 작품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감독은 원래 부부 역에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를 원했지만 여의칠 않았다. 그러나 잔 카를로 잔니니와 라우라 안토넬리, 그리고 팜파탈인 제니퍼 오닐이 비스콘티의 의도를 잘 살린 연기를 보여준다. 누구보다 뛰어난 예술 감식가였던 단눈치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만큼 영화의 미술도 눈을 즐겁게 한다.
라일락 필 무렵...
그런데 ‘무고한 존재’의 의미는 뒤로 하고, 원작 소설을 아는 이에게 영화는 묘한 이질감을 준다. 『무고한 존재』는 심리 소설이다. 툴리오의 내면을 따라가는 서술에,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화려한 공간 묘사는 없다. 대공 부부의 파티, 경매장 따위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아이가 없는 듯 보이는 부부도 원래는 두 딸이 있다.
경매장에 왔으나 아내는 다른 곳으로... 빨간 옷의 테레사만 있네
또한 인물의 심리도 원작과는 오히려 상반된다. 단눈치오의 줄리아나는 툴리오에게 외면받으면서도 줄곧 순종적이다. 툴리오는 그런 아내를 어려서 죽은 여동생처럼 대한다. 신혼집을 찾았을 때도 매달리는 쪽은 툴리오가 아닌 줄리아나이다. 그녀는 남의 아이를 가진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 영화처럼 묘한 보복심을 내비치는 아내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줄리아나는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예요"라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대사를 되뇐다
또 툴리오가 아이를 창밖에 두었지만, 그날로 아이가 죽지도 않는다. 처음에 툴리오는 헛물켠 것으로 생각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결국 아이는 며칠 뒤 숨을 거둔다. 그러니 툴리오의 행위가 직접 원인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가장 큰 차이는 결말이다. 소설 속 툴리오는 죽지 않는다. 아내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자기 죄 때문에 무고한 존재가 죽었다고 자책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스콘티는 왜 이렇게 날조한 것일까?
어쩌면 앞선 영화 <베네치아에서 죽음>에 답이 있다. 그때도 감독은 토마스 만의 원작 소설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주인공을 소설가에서 작곡가로 바꾼 것이야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러나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뜬금없이 추가된 부분이 많음을 눈치챌 것이다. 비스콘티는 토마스 만의 음악 소설 『파우스트 박사』를 끌어왔다. 그렇기에 작곡가가 주인공이 된 것도 자연스럽다.
영화 <무고한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은 단눈치오의 전작 『쾌락 Il piacere』이다. 『쾌락』은 『무고한 존재』, 『죽음의 승리 Il trionfo della morte』와 더불어 그의 ‘장미 삼부작’을 이룬다. 세기말 데카당스와 니체의 초인 사상을 결합한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쾌락』의 주인공 안드레아 스페렐리도 『무고한 존재』의 툴리오 헤르밀처럼 탁월한 예술적인 안목과 준수한 용모로 주목받는 상류층 귀족이다. 젊고 미혼이라는 점에서 툴리오보다는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떠오르게 한다. 스페렐리는 엘레나 무티(트로이 전쟁을 불러오는 미인 ‘헬레나’와 같은 이름)라는 팜파탈과 뜨거운 관계이지만 그녀가 재혼하며 돌연 사라지자 허탈해한다.
영화의 테레사가 엘레나에 해당한다
그 뒤로 스페렐리에게 나타난 연인은 엘레나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며 이름도 성모(聖母)를 연상케 하는 ‘마리아’ 페레스라는 정숙한 유부녀이다. 스페렐리는 음악취향이 일치하는 마리아에게 급속도로 빠져든다. 그의 다소 성급하지만, 선을 넘지 않는 고백에 마리아도 마음이 요동친다. 결국 그녀도 그에게 마음을 여는데, 그 무렵 재혼한 엘레나가 스페렐리 앞에 나타나며 다시 삼각관계가 된다.
다르보리오를 만나러 나갈 준비하는 줄리아나에서 마리아 페레스의 모습을 본다
‘헬레니즘’을 대변하는 엘레나와 ‘헤브라이즘’의 상징인 마리아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던 스페렐리는 끝내 허무한 파국을 맞는다. 밀회 중 마리아를 마음속의 엘레나로 잘못 부른 것이다. 세속적인 아름다움의 대명사 헬레나와 지고지순한 그레트헨(결국 성모 마리아에 의지한다)을 대비시킨 괴테의 『파우스트』나 비너스와 엘리자베트라는 상반된 여인상을 오가는 바그너의 <탄호이저> 모두 단눈치오의 모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와 소설의 공통된 라이트모티프인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가운데 'Che farò senza Euridice'
비스콘티가 영화 <무고한 존재>에 끌어들인 귀족적 묘사는 대부분 단눈치오가 『쾌락』에서 제시한 것이다. 스페렐리와 마리아가 살롱 콘서트에서 교감하는 부분은 원작자와 감독의 비범한 음악 수준으로 거듭난다. 무엇보다 『쾌락』의 시작과 끝이 경매장에서 이루어지는 설정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인생사의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