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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l 24. 2023

사운드 오브 뮤직의 유효 기한은?

변함없는 가치 (2)

부활절 축제가 열리는 기간 짧은 잘츠부르크 체류에서 바그너의 <탄호이저> 관람 이후 무엇을 해야 할까? 30년 동안 잘츠부르크는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호텔 직원 말을 확인해 보자. 모차르트와 더불어 사람들이 잘츠부르크 하면 떠올리는 ‘좋은 생각 My Favorite Thing’ 대부분은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온다. 훈훈한 가족애와 동화 같은 풍경이 꿈속 같은 음악과 어우러지는 영원한 고전 영화 말이다. 많은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주저 없이 꼽기도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라 생각해 아직 한 번도 보지 않았거나 싫어한다는 사람도 가끔 만난다.

젠장, 또 보고 싶네!

호텔 직원 게오르크의 말대로 잘츠부르크의 겉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영화 촬영 중 줄리 앤드루스(마리아 수녀 역)가 묵었던 자허 호텔은 ‘마이 페이보릿 씽’에 나오는 ‘바삭한 애플파이 Crisp apple strudel’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크리스토퍼 플로머(대령 역)가 머물던 맞은편 브리스톨 호텔은 자허의 유명세가 못마땅한 듯 짐짓 거만하게 보인다.

오스트리아 기가 걸린 자허 호텔과 왼쪽 뒤로 보이는 브리스톨 호텔

두 호텔 옆, 안톤 아이허(1859-1930)가 설립한 잘츠부르크 인형 극장은 또 다른 명물이다. 앤드루스가 여기서 인형극을 보고 영화에 반드시 한 장면 집어넣자고 해서 ‘외로운 양치기 Lonely Goatheard’가 급조되었다. 인형극은 오랫동안 집안을 떠났던 음악을 다시 불러왔다. 내친김에 열린 무도회에서 가정교사는 홀아비 대령과 오스트리아 민속 춤곡 ‘렌들러’를 추다 얼굴을 붉히는데 이때 나온 춤곡이 바로 ‘외로운 양치기’의 세 박자 편곡이다. ‘도레미 송’으로 각인되는 미라벨 궁전 정원에는 잘츠부르크 인형극의 창시자 아이허의 명판이 붙어 있다.

"The Lonely Goatherd" - THE SOUND OF MUSIC (1965)
위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두 자동 인형

가족의 음악성을 알아보고 이들을 축제에 참가시키는 ‘엉클 맥스’는 막스 라인하르트가 모델이다. 그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1920년 잘츠부르크 축제를 창설한 삼인방이다. 나치의 소환에 불응해 야반도주하려던 대령 가족은 암벽을 깎아 만든 바위승마교장(Felsenreitschule) 무대에서 노래해 우승한다. 원래 오페라 극장 박스 역할을 했던 암벽을 거꾸로 무대 전면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라인하르트이다. 

트라프 가족은 합창 경연 우승 뒤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그들이 나치를 피해 숨은 수녀원 묘지는 사실 극장 바로 옆 베드로 수도원 묘원이다. 영화의 배경 가운데 유일하게 실제 촬영되지 않은 곳이다. 영화에서는 알프스를 그려 넣은 세트를 만들었지만, 베드로 묘원은 암벽 아래 아늑하게 자리한 쉼터와 같다. 영화와 달리 가족은 걸어서 알프스를 넘어서 스위스로 탈출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로 가서 미국행 배를 탔다.

이렇게 <사운드 오브 뮤직>을 추억하려는 사람들에게 잘츠부르크는 돌아서는 골목마다 그들만이 공유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마치 단 1초로 아미들을 전율케 하는 BTS의 음악처럼.

잘츠부르크에 처음 왔던 1993년에 현지 방송에서 우연히 독일 영화를 보았다. 마침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을 맞던 1956년 잘츠부르크에서 촬영한 서독 영화 <트라프 가족 Die Trapp-Familie>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3년 뒤 1959년에 나왔고, 그를 토대로 1965년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발표되었으니 <트라프 가족>이 훨씬 앞선 것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뮤지컬은 아니지만, 워낙 음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 이야기라 <트라프 가족>에도 귀에 익은 독일 민요와 가곡이 줄을 잇는다. 텔레비전에서 스치듯 본 것이지만 그 뒤로 이 서독 영화는 내 머릿속 깊숙한 곳에 굳게 자리했다.

루트 로이베리크와 한스 홀트가 주연한 <트라프 가족>. SoM을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막이 필요치 않다.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어 원하는 모든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자마자 영화를 수소문했다. 그 사이에도 <사운드 오브 뮤직>은 셀 수 없이 많이 봤고, 그 만듦새와 배우들의 이면까지 많은 정보를 접했다. 2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트라프 가족>의 등장인물은 내 가족처럼 친숙했다. 새엄마 마리아 수녀의 회고록에 기초한 두 영화를 비교하며 많은 점을 새로 알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의 앞 이야기이다.

이 몸이 새라면.. 할머니는 대령의 누나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트라프 대령은 해군으로만 알려졌을 뿐 자세한 배경은 나오지 않는다. 바다가 없는 오스트리아인데 웬 해군일까? 정확히 말해 트라프 대령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 잠수함 함장이었다. 그 무렵엔 지금의 북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가 면한 아드리아해까지 오스트리아 헝가리 영토였다. 지금도 그 지역 중심도시 트리에스테는 마치 작은 오스트리아에 온 느낌을 준다. 내륙 국가 오스트리아에 아드리아해는 전략 요충지이었고, 트라프 대령의 잠수함은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아이들은 보트에서 물에 빠지는 장면을 찍느라 감기에 걸렸지만, <트라프 가족>의 아이들은 상자에 물을 뿌리며 잠수함 놀이를 하다가 아빠에게 혼난다.

가문의 뿌리를 제대로 아는 아이들. 본인 자막.

게오르크 폰 트라프는 1880년 달마티아의 차라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이어 해군에 복무했고 1911년 영국계 오스트리아인 아가테 화이트헤드와 결혼했다. 영국 조선 기술자였던 아가테의 할아버지 로버트 화이트헤드는 아드리아해에 자리 잡고 자신의 이름을 딴 ‘화이트헤드 어뢰’를 개발해 오스트리아 해군에 납품했다. 영국계 군수 기업 가문이 적성국이 될 오스트리아 해군 장교 집안과 연을 맺은 것이다. 잘 알다시피 황태자의 암살로 비롯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는 패했고, 제국은 해체되었다. 트라프는 고향 차라가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면서, 이탈리아 시민권을 얻었다. 앞서 본 대로 가족이 스위스가 아닌 이탈리아로 간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트라프는 군인인 이상 전쟁을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보수적인 제국주의자였다. 만일 그가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여전히 오스트리아 해군이었다면, 그는 황제를 위해 처가 회사 어뢰로 연합국을 괴롭혔을 것이다. 


2015년 새 영화가 더해졌다. 트라프 가족의 큰딸 아가테의 회고록이 바탕인 <트라프 가족: 라이프 오브 뮤직>이 그것이다.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가테에 따르면 새엄마의 존재감은 전작만큼 크지 않다. 엄마 없는 가족들을 돌보기에 지친 그녀를 대신할 새엄마가 오지만 서로 다른 세상에 살던 이들의 만남이 그리 원만하진 않았다. 아가테는 엄마를 잃은 뒤 다시는 노래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축제에 온 소프라노 로테 레만 눈에 띄어 가족과 경연에 나간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트라프 가족은 어렵사리 순회 합창단으로 생계를 꾸렸다. 마냥 떠돌 수만은 없던 이들은 고향과 자연환경이 비슷한 버몬트에 정착했다. 미국에 온 고향 사람에게 집과 같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호텔(Trapp Family Lodge)을 열어 오늘에 이른다.

서독 영화는 속편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트라프 가족>

이렇게 나는 영화를 처음 보고 거의 40년 동안 이 가족의 이력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많은 여건 궁핍했던 시절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디즈니 영화는 현실 도피처였던 셈이다. 반대로 선진국에서 자라 시청각의 홍수를 사는 MZ 세대는 어떨까? 최소한 영화를 보고 노래를 따라 하거나 잘츠부르크를 가고 싶은 생각이 들까?

모차르트의 미망인이 남편 사후 살던 집은 카페가 되었다. 모차르트를 광고판에 넣은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호프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를 홀대해 쫓아내다시피 했다. 뒷날 그의 고향에서 시작한 음악제는 원래 호젓한 음악의 고향으로 돌아가 세계대전의 상처를 치유하자는 취지였다. 오늘날 축제 기간은 호젓하긴커녕 허영과 허세를 쫓는 물결로 넘실댄다. 그 때문에 진지한 음악가들은 다시 잘츠부르크를 떠나 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새 공간을 열었다. 트라프 가족도 잘츠부르크에 잠시 살았지만, 그들의 고향도 아니고 힘든 추억도 많은 곳이다. 잘츠부르크를 동경하게 만든 것은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장면이었을 뿐이다.

파라켈수스 스파, 새싹 너머 호엔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 거리 끝의 K뷰티샵

공원에서 만난 토박이 노신사는 미라벨 궁전 옆에 짓고 있는 현대식 스파를 가리키며 혀를 찼다. 동대문의 복합 문화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알루미늄 외관의 거대한 스파는 분명 이 도시의 이력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에게 게트라이데 거리 끝에서 ‘K 뷰티’라는 간판을 보았다고 말하긴 부끄러웠다. 밖은 늘 나를 비출 거울이다. 수많은 ‘K’를 내세우며 문화강국임을 자청하는 우리는 청담동에서, 이태원에서, 홍대에서 무엇을 낳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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