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전 영화 한 편을 다시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해군 잠수함 함장으로 참전했다가 퇴역 뒤 뜻하지 않게 가족 합창단의 가장이 된 게오르크 폰 트라프란 사람 때문에, 잠수함 영화를 떠올린 것이다.
<유보트>(Das Boot, 1981)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중해와 대서양 바다를 장악하며 연합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독일 잠수함 부대의 이야기이다. 열악한 공간 속에서 극한의 환경을 참아내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잠수함 승조원들은 귀환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당초에 출발한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라로셸이 아니라, 지중해 깊숙한 이탈리아 서해안의 라스페치아(시인 퍼시 비시 셸리가 뱃놀이 중 익사한 곳이다)로 가라는 전신을 받는다. 그러려면 스페인 북부 비고에서 연료와 보급품을 충전한 뒤 지브롤터 해협을 로켓처럼 빠르게 통과해야 한다. 문제는 지브롤터의 수심이 깊지 않고 폭도 좁아 수중이라도 어뢰나 함포 사격에 노출되기에 쉽다는 것이다.
독일 잠수함은 기동성을 위해 소형으로 만들었고, 그 탓에 승조원의 열악한 환경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크리스마스를 라로셸에서 보낼 생각이던 승조원들은 마카로니나 먹을 수 있을까 걱정한다. 마침 잠수함 내 스피커로 구성진 노래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라 팔로마’는 스페인 말로 ‘비둘기’(아프로디테, 비너스의 새이다)라는 뜻이다. 1860년 무렵 쿠바를 방문했던 스페인 작곡가 세바스티안 이라디에르는 마드리드로 돌아와 그 추억을 담은 곡을 썼다.
학창 시절 많은 남학생이 스페인어 관사 ‘라’를 ‘시’로 바꿔 불렀을 것이다, 여학생도?
‘라 팔로마’의 모티프는 고대 페르시아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리우스 왕이 이끄는 대군이 그리스로 가려고 에게해를 건널 때 아토스 인근에서 배가 침몰한다. 그때 수많은 흰 비둘기가 배를 탈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쟁 중 통신에 쓸 비둘기가 침몰하는 배를 떠나는 모습은 선원들이 보내는 마지막 전갈과 실낱같은 희망을 상징했다. 유보트의 대원들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유보트>의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바다 버전이라는 느낌을 준다. 내용은 넷플릭스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역사상 최선의 아킬레우스로 보임
영화감독 볼프강 페터센은 <유보트>의 성공 덕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할리우드에 진출한다. 그의 최만년작이 브래드 핏 주연의 <트로이>(Troy, 2004)이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호불호의 평을 물리고, 꼭 언급할 것이 있다. 바로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올림포스의 신과 인간이 편을 갈라 싸운 사건이다. 그 가운데 절반의 등장인물을 아예 제외한 것이다. 전쟁의 발화점인 ‘파리스의 심판’이 나오지 않으니 아름다움을 뽐낼 세 여인도 없다. 포세이돈의 화를 숨기기 위해 목마(木馬)를 경고하는 제사장 라오콘의 죽음도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운명에 느닷없이 개입하는 ‘기계신’(Deus ex machina)을 없애더라도 그 결과는 충분히 어찌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신이 있으나 없으나 결과가 같다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같은 시기에 나온 많은 판타지 영화에 ‘기계신’이 끼어드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참신하다.
줄리 크리스티가 누군지는 직접 찾아볼 것을 권한다
유일하게 나오는 신은 아킬레스의 어머니이자 님프인 테티스이다. 참전하면 돌아오지 못할 운명임을 아들에게 얘기하는 어머니는 줄리 크리스티가 맡았다. 그녀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냥 어머니일 뿐이다. 자식의 발목을 물에 적시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트로이>의 각본을 쓴 데이비드 베니오프는 뒷날 <왕좌의 게임>으로 명성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