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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라의 르네상스 궁정문화 (1)

토르콰토 타소와 리스트

by 정준호 Apr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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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르네상스 궁정문화를 꽃피웠던 페라라(Ferrara)이건마는 어쩐지 황량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받은 에스텐세성과 대성당은 어느 정도 복원되었다. 그러나 내부를 장식했던 벽화와 가구까지 되살릴 수는 없었다. 스키파노이아 궁전의 빛바랜 벽화만이 옛 영화를 돌아보게 한다. 더욱이 포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한 농업 도시였던 페라라는 20세기 후반 인구가 많이 유출되면서 전반적으로 침체 분위기이다. 이런 마당에 단테와 페트라르카를 잇는 시인 토르콰토 타소를 떠올릴 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타소 시대 빛나는 페라라의 문화는 로마 인근 티볼리에 있는 빌라 에스테(위 사진)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모셨던 알폰소 2세의 숙부 이폴리토 2세가 세운 여름 별장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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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에서 페라라로 가는 차창 밖 농촌 풍경과 에스텐세성

춘추전국 시대 월나라의 서시(西施)나 구약성서에 나오는 델릴라는 병법에 나오는 미인계의 대명사이다. 십자군 원정을 배경으로 한 토르콰토 타소의 <해방된 예루살렘 La Gerusalemme Liberata, 1575>에도 기사 못지않게 여러 미녀가 등장한다. 기사는 원정의 사명을 잊고 여색에 홀려 죽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정한 사랑에 이르기도 한다. <해방된 예루살렘>의 제3곡에서 기독교 용사 탄크레디는 전장에서 이슬람의 여전사 클로린다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다. 투구를 벗은 그녀가 황금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리는 순간 그는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만다. 

그녀의 무장한 오른손이 가하는 타격은 때로는 빗나가는데, 아름다운 얼굴의 타격은 빗나가지 않고, 언제나 내 가슴을 맞추는구나. 
프란체스코 아예츠가 그린 <아르미다와 리날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프란체스코 아예츠가 그린 <아르미다와 리날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그는 싸우기를 포기하고 차라리 그녀의 손에 죽기를 청한다. 둘 사이 끼어든 양 진영 기사들 때문에 떨어지는 순간, 그녀는 목에 작은 상처를 입고 피를 몇 방울 흘린다. 그때 금발에 떨어진 피는 

마치 탁월한 장인의 손으로 가공된 금이 루비를 빨갛게 비추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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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토레토와 바루팔디가 그린 <탄크레디와 클로린다>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은 <해방된 예루살렘>의 제12곡에 나온다. 클로린다를 모시는 환관은 그녀가 원래 에티오피아(기독교 국가)의 공주라는 출생의 비밀을 말해준다. 검은 피부의 왕실에서 기이하게 얼굴이 흰 그녀가 태어나자, 왕비는 부정(不貞)을 의심당할까 그녀를 환관에게 맡기기로 했다. 꼭 세례를 받게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몇 차례 위기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자라 이슬람 용사가 되었지만 대신 기독교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잊고 만다. 클로린다는 십자군의 공성(攻城) 기계를 파괴하려고 적진에 돌격한다. 탄크레디는 투구를 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결투를 벌이다가 치명상을 입힌다. 그녀는 그에게 세례를 청한다. 세례를 받은 클로린다는 따라 죽으려는 탄크레디를 만류하고 눈을 감는다. 이겼지만 진 것이나 매한가지요, 살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랑의 비극은 타소의 단골 소재이다. 

로마 카라칼라 욕장에서 실감 나게 재현한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결투>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세속 가요집 제8권 <전쟁과 사랑의 마드리갈>에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야속한’ 결투(Combattimento di Tancredi e Clorinda)를 포함했다. 2024년 파르마 베르디 축제 마지막 무대에서는 이 곡을 20세기 작곡가 루이지 노노의 <먼 미래 유토피아를 향한 그리움 La lontananza nostalgica utopica futura>과 나란히 무용으로 연출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지은 파르마 파르네세 극장은 먼 미래에서 기다릴 클로린다를 향한 탄크레디의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과연 그렇게 몬테베르디로부터 노노까지 4백 년이 한 시간으로 압축되었다.

2024 파르마 베르디 축제 무대의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결투> ⓒ Alice Vacondio2024 파르마 베르디 축제 무대의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결투> ⓒ Alice Vacondio

나폴리 왕국 소렌토에서 태어난 토르콰토 타소(1544-1595)는 궁정인(Cortigiano)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았다. 우르비노, 베네치아를 거쳐 파도바에서 대학을 졸업한 타소는 1565년 알폰소 2세 데스테 공작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페라라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10년 동안이 그의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며, 그 결실이 <해방된 예루살렘>이다. 타소는 페라라 궁정에 더없이 어울리는 문학적 재능과 우아한 매너를 지녔다. 그는 알폰소 2세의 두 여동생 루크레치아, 레오노라와 가까웠다. 특히 레오노라와는 뒷날 로맨스 설이 제기될 정도였다. 이는 괴테의 희곡 <토르콰토 타소>에 잘 드러난다.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 중(1786년 10월 6일)에 베네치아에서 곤돌라 사공이 노래하는 타소의 노래를 듣고 매우 감동했다. 

이 노래에 담긴 의미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진실해서 (…) 어느 고독한 자가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 다른 사람이 듣고 응답하도록 저 멀리 드넓은 세상으로 보내는 노래인 것이다.

괴테는 독일에서 이미 타소의 친구 조반니 바티스타 만초가 쓴 전기를 통해 위대한 시인에 대해 잘 알았고, 그의 생애를 희곡으로 쓰는 중이었다. 그는 로마 자니콜로 언덕 아래 성 오노프리오 수도원에 있는 타소의 무덤까지 찾았다. 그러나 진척이 더뎌지자, 해묵은 타소의 원고를 불에 태울 생각까지 했다가 결국 전부 뜯어고치기로 한다. 작품은 여행을 마치고 바이마르로 돌아온 뒤 2년이 지난 1790년에야 완성되었다. 

아예츠의 그림을 표지로 쓴 번역아예츠의 그림을 표지로 쓴 번역

<토르콰토 타소>에서 괴테는 야사(野史)에 불과한 레오노라 공주를 향한 타소의 사랑을 집중적으로 부각한다. 타소는 예술가로서 이룬 성취감에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 레오노라는 시인 타소를 존경하지만 그의 거침없는 고백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이는 클로린다에 대한 탄크레디의 일방적인 연모뿐만 아니라, 괴테의 만년에 등장하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일생에 걸친 연애를 떠올리게 한다. 자존감 드높았던 베토벤도 귀족 여성을 향한 감정을 문제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훨씬 후대의 베토벤도 결국 평생을 독신으로 마칠 수밖에 없었듯이, 타소 또한 관습의 벽을 넘지 못한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정신 병원에 갇힌 타소>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정신 병원에 갇힌 타소>

사실 중세 음유시인과 귀부인의 연애는 암묵적으로 공인된 것이었고, 그 결실은 ‘낭만적 사랑’의 꽃인 기사 문학으로 결실을 보았다. 귀부인을 향한 기사의 사랑은 현실의 벽이 높을수록 숭고하며 그 고통마저 감미롭다고 여겨졌다. <토르콰토 타소>의 주인공이 겪는 사랑의 실패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괴테의 자의적 검열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다만 괴테는 타소를 질책하고 견제했던 귀족 안토니오가 예술가로서 그가 자아를 잃지 않도록 조언하게 한다. 안토니오는 


주변 세상과 균형을 유지하시오. 그대가 무엇인지 인식하시오


라며 타소의 손을 잡는다. 이에 수긍한 타소가, 


저는 양팔로 공을 꼭 붙잡습니다. 이렇게 뱃사람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배를 난파시킬 바위에 매달립니다

라고 말하며 희곡은 끝을 맺는다.


프란츠 리스트는 1849년 괴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바이마르에서 공연될 <토르콰토 타소>를 위한 서곡을 썼다. 이는 1856년까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타소. 비탄과 승리 Tasso: Lamento e Trionfo’라는 제목의 교향시 2번으로 출판되었다. 리스트는 이때 괴테의 희곡보다는 바이런의 <타소의 탄식 The lament of Tasso, 1817>을 참고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바이런은 타소가 에스테 궁정에서 받은 수모와 다툼, 그로 인한 수감의 비통함을 웅장한 독백으로 표현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1

나는 한때 감정이 풍부했었네 — 그것은 끝났네; — 

내 상처는 무감각해졌고, 그렇지 않았다면 햇살이 그것을 비웃으며 비출 때 

이 철창에 내 머리를 부딪쳤을 것이네; — 

내가 견디고 견뎌온 많은 것과 더 많은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네

그리고 나를 이곳에 가둔 둔한 그를 자살로 정당화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수치의 낙인으로 광기를 내 기억에 깊이 새기지 않으리라

그리고 망가진 이름에 동정을 구하지 않으리라

내 적들이 선포한 선고를 확정하지 않으리라.

아니 — 그것은 불멸이 될 것이네! — 그리고 나는

현재의 감방을 미래의 성전으로 만들 것이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라들이 나를 위해 방문할 것이네.

너, 페라라여! 공작들이 더 이상 너에게 거주하지 않을 때, 무너질 것이고

무너지고 갈라진 너의 불모의 전당을 바라볼 것이네

시인의 화환이 너의 유일한 왕관일 것이고

시인의 감옥이 너를 가장 널리 알릴 명성일 것이며

이방인들이 너의 인적 없는 성벽에 경탄할 것이네!

그리고 그대, 레오노라여! — 나 같은 자의 사랑을 부끄러워했던 그대

군주 아닌 자의 사랑을 듣고 얼굴 붉혔던 그대

가시오! 그대 오라비에게 말하시오, 나의 마음은

슬픔과 세월, 피로에 길들지 않았으며 — 아마도

그가 나에게 덮어씌우려 했던 오점조차도 —

이런 감옥의 오랜 감염으로 인해

마음이 심연과 함께 썩어가는 곳에서

여전히 그대를 숭배한다고; — 그리고 더하시오 — 즐거운 시간을 지키는

탑과 성벽이 잊히거나, 지루한 휴식 속에 방치될 때

이곳 — 이곳이 성스러운 장소가 될 것이라고!

그러나 그대는 — 출생과 아름다움이 그대 주위에 던지는

마법이 사라질 때 — 나의 무덤을 덮는 월계관의 절반을 차지할 것이오

죽음 속에서도 우리 이름을 떼어놓을 힘은 없으리라

삶 속에서도 그대를 내 마음에서 떼어낼 힘이 없었듯이

그렇소, 레오노라! 우리 운명은

영원히 얽힐 것이오 — 그러나 그땐 너무 늦으리!

(마지막 9곡)     

Liszt: Symphonic poem No. 2 (Tasso: Lamento e Trionfo)

타소는 페라라 궁정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피렌체로 가길 원했다. 공작의 궁정인들과 다툼 끝에 종교재판소에 출두해 재판받았고 그 과정에서 옥고도 치렀다. 바이런의 시는 이때의 고독한 외침을 담았다. 감옥에서 탈출해 고향 소렌토까지 갔던 그는 다시 페라라로 돌아왔다가 재탈주해 만년까지 사실상 전 이탈리아를 떠돌았다. 마지막 3년을 보낸 로마는 타소에게 월계관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시인은 합당한 영예의 수상을 천국에서 누려야 했다. 리스트는 교향시의 제목을 <타소. 비탄과 승리>라 지으며 일생의 고뇌와 더불어 하늘에서 받을 영예까지 그렸다. 그는 베네치아 곤돌라 사공의 노래로 전해지는 타소의 정신을 음악으로 되살렸다. 1838년 베네치아에서 쓴 <베네치아와 나폴리>의 첫 버전(Venezia e Napoli, S159)에는 이 멜로디들이 들어 있다. 

Liszt: Venezia e Napoli, S. 159: I. Lento. Chant du gondolier 곤돌라 사공의 노래

첫 곡은 뒤에 교향시의 주된 테마가 되며, 세 번째 곡은 베토벤도 편곡한 적이 있는 민요이다(뒷날 <베네치아와 나폴리>가 <순례의 해. 제2년 이탈리아>에 부록(S. 162)으로 추가될 때 이 곡들은 빠졌다). 

베토벤이 편곡한 베네치아 곤돌라 사공의 노래
위 노래의 리스트 편곡. Venezia e Napoli (1st set) , S159/R10d: III. Andante placido

리스트는 곤돌라 사공의 노래에서 가져온 테마를 침울한 C단조로 제시한 뒤, 그것을 후반에 C장조로 바꾸어 월계관의 승리로 마무리한다. 누구나 눈치챌 수 있듯이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이 모델이다. 그것만으로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리스트는 그사이에 먼 조성 G샤프단조의 미뉴에트를 끼워 넣었다. 괴테의 희곡을 낳았던 행복했던 페라라 궁정에 대한 향수이다. <타소. 비탄과 승리>의 출판 10년 뒤인 1866년, 리스트는 <타소의 승리의 장송곡 Le Triomphe funèbre du Tasse>이라는 후기(Epilogue)를 더했다. 

Liszt: 3 Odes funèbres, S. 112: III. Le triomphe funèbre du Tasse

그는 악보에 피에르안토니오 세라시(1721-1891)가 쓴 <토르콰토 타소의 생애 La vita di Torquato Tasso> 가운데 장례식 장면을 적었다. 시인의 죽음에 이탈리아 전체가 비통했으며, 생전에 그를 비난하고 박해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그를 계관시인의 옥좌에 올리는 장례식에 참여했다고. 반음계적인 색채가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음악은 곧 리스트의 자화상이다. 미래 음악에 대한 생전의 몰이해가 사후에 합당하게 평가받으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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