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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Dec 17. 2018

33. 인어 아가씨와 예술가

제33장: 인어 아가씨 


세레누스는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독일의 운명은 동서전선 모두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은 독일이 볼셰비키처럼 사회주의 혁명으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썼고 그 뜻대로 되었다. 그러나 그 틈바구니에서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오히려 더 좋지 않았다. 볼셰비키가 예술을 파괴한 적은 없지만 나치 치하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퇴폐 음악’(Entartete Musik)이라는 낙인을 받아 탄압되었다. 아드리안 또한 그 희생자 가운데 하나였다.


음악의 경향과 상관없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펠릭스 멘델스존, 아르놀트 쇤베르크, 프란츠 슈레커, 발터 브라운펠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쿠어트 바일, 구스타프 말러, 베르톨트 골트슈미트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또 모더니스트 음악으로 안톤 베베른, 파울 힌데미트와 같은 작곡가도 탄압의 대상이었고, 오로지 허락된 것은 정통 독일 음악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받은 한스 피츠너, 프란츠 슈미트, 카를 오르프와 같은 작곡가들뿐이었다. 사실 모더니스트의 형식주의 비판을 받은 소련 음악계의 사정도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토마스 만은 전체주의 독일의 사정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한 듯하다.


세레누스가 이런 상황을 언급한 이유는 전쟁이 패망으로 치달아감에 따라 국가 권력에 대한 반발로 시민적인 자유가 구속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이것이 꼭 긍정적인 결과만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민주주의는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드리안은 위장병과 두통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세레누스에게 자신이 겪는 고통을 인어 아가씨(Die kleine Seejungfer) 이야기에 비유했다.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다리를 원하고 말 못하는 채로 하얀 두 발을 딛을 때마다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던 인어 아가씨야말로 예술가의 고뇌를 비유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의 요정 ‘운디네Undine’의 설화는 프리드리히 드 라 모트 푸케의 소설로 소개된 뒤 많은 음악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E.T.A. 호프만은 직접 오페라로 작곡했고, 카를 라이네케는 플루트 소나타로 썼다.

브람스 <독일 레퀴엠>의 초연을 지휘한 카를 라이네케의 '운디네'

드보르자크의 <루살카>도 같은 뿌리이다. 

루살카 가운데 '달에게 부르는 노래'

쇤베르크의 처남인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1871-1942)는 대편성 교향시 <인어 아가씨>(Die Seejungfrau, 1905)를 썼다. 쳄린스키는 원래 말러의 아내가 된 알마 신틀러를 가르치며 그녀와 교제했다. 그러나 야심 많은 알마가 말러를 택하자 실연의 아픔을 <인어 아가씨>로 표현한다.

블리디미르 유롭스키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인어 아가씨> 전곡

어느 날 슈베르트페거의 방문을 받은 아드리안은 그로부터 이네스와 관계에 대한 고백을 듣는다. 슈베르트페거는 둘 사이의 밀회는 어디까지나 이네스의 유혹으로 비롯된 것이며 자신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고, 벗어나려 해도 점점 더 빠져드는 구렁텅이 같은 현 상황의 압박을 끝내고 싶은 마음을 토로한다. 그는 이네스로부터 지친 그에게 아드리안의 포용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호소하기 시작했고, 그런 어리광은 자신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을 써달라는 요청으로 이어졌다. 그는 아드리안의 훌륭한 음악과 자신의 정성어린 연주가 만나면 ‘플라토닉한 아기’와 같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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