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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Dec 19. 2018

34abc. 요한 계시록

제34장: 그림으로 보는 요한 계시록


이 시기 아드리안은 자신의 처지를 인어 아가씨 외에 또 다른 인물에 비유했다. 그는 기름 솥에 들어앉아 순교하는 요한에 대해 얘기했다. 그의 묘사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 연작 <요한 계시록>(Apocalypsis cum Figuris) 가운데 첫 번째 그림(아래)이었다.

끓는 기름 솥에서 순교하는 요한 성인

그것은 그만큼 아드리안의 고통이 컸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가 실제로 『요한 계시록』을 가지고 음악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 비유도 무리가 아니다. 작곡 동안 그가 겪은 육체적 고통은 어쩌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창작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자청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류 최후의 심판을 다룬 『요한 계시록』은 헨델의 <메시아>부터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까지 다양한 음악에 가사를 제공했다. 그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것은 이 성서 안에 묘사된 표현을 제목으로 쓴 프란츠 슈미트의 <일곱 개의 봉인을 한 책>(Das Buch mit sieben Siegeln, 1935–37)이다. 합창과 독창, 대편성 교향악단을 위한 이 음악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8번이나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Gurrelieder>에 비할 만한 규모이다.

말러와 슈트라우스 이후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슈미트의 대작 <일곱 개의 봉인을 한 책>

아드리안은 <그림으로 보는 묵시록>을 작곡하면서 『요한 묵시록』뿐만 아니라 『시편』과 『예레미아서』의 비가들도 접목했다. 때문에 아드리안의 작품을 에른스트 크레네크(Ernst Krenek, 1900-91)가 쓴 <예레미아 비가>(Lamentatio Jeremiae prophetae, 1941–2)나 스트라빈스키의 <시편 교향곡>과 연결할 수 있다. 구스타프 말러의 사위이기도 했던 크레네크는 12음 기법을 도입해 무반주 합창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아드리안 레버퀸은 착수 여섯 달 만인 1919년 8월 말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  

아드리안의 작풍과 유사했을 크레네크의 <예레미아 비가>

제34장(계속) 


세레누스는 <묵시록>의 작곡에 대해 설명한 장(章)을 계속 연장한다. 작곡 당시 판화가이자 북디자이너인 식스투스 크리트비스(Sixtus Kridwiß)의 집에서 있었던 대화가 이 장의 내용이다. 식스투스라는 이름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가운데 악역인 베크메서 외에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동아시아 목판화와 도자기 수집가이기도 한 크리트비스의 응접실에서는 지적인 모임이 종종 열리곤 했다. 그 가운데는 당연히 르네상스를 전공한 헬무트 인스티토리스 교수도 있었다.


세레누스는 대화의 주제에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 필연적이었다는 생각이다.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이라는 참신한 정치적 시도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시대를 단순화해서 이해하기 위해 문화의 업적을 포기하고 야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이는 곧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붕괴한 뒤 중세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기 전 암흑기를 재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히에로니무스(제롬, 제로니모)가 번역한 불가타 시편에 붙인 스트라빈스키의 교향곡

제34장(맺음) 


세레누스는 사실상 크리트비스 살롱의 논의들이 아드리안의 음악 속에 형상화되었음을 발견한다. 아드리안은 ‘수많은 이교도 무리가 옥좌에 앉아 있는 이와 어린 양 앞에 경배하는 장면’을 소재로 송가를 작곡하던 중에 편지를 보냈다. 이는 뒤러의 판화 가운데 ‘어린 양을 경배함’(위 오른쪽 그림)에 대한 것이었다. 

뒤러의 연작 가운데 일곱 번째 그림

그는 이 편지 끝에 ‘위대한 페로티누스Perotinus Magnus’라고 서명했다. 페로티누스, 또는 페로탱은 12세기 노트르담 성당의 음악 감독이었다. 세레누스는 바그너가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Parsifal>을 쓰면서 ‘고등종교재판관Oberkirchenrat’이라고 서명했던 것을 떠올린다. 아드리안의 회귀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퇴행과 진보, 옛것과 새것, 과거와 미래가 얽히고설킨 시대의 모습은 아드리안의 <요한 계시록>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이 작품에서는 기악과 성악,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양자는 서로 상대편에 용해되어 있어서, 합창은 기악화되고 오케스트라는 성악화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은 야만적인 것으로 비난받았지만, 세레누스가 보기에 그것이 바로 작품의 본질이기도 했다. 가장 낡은 것과 가장 새로운 것의 통합이야말로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이기도 했다.


아드리안의 의도는 실제 공연에서 더욱 효과를 보았다. 192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토 클렘페러의 지휘로 초연되었을 때, 확성기 효과는 하나의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전면에 부각하고 다른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밀어내는 입체적인 음향을 구현했다. 지옥의 장면을 묘사한 재즈 음악 또한 그의 음악이 띄고 있는 아방가르드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레미아 비가>를 쓴 크레네크의 대표작이 재즈를 도입한 <조니는 연주한다Jonny spielt auf>이다.

재즈 오페라의 대명사인 <조니는 연주한다>

세레누스는 <요한 계시록>이 “영혼을 상실한 음악”이라는 세간의 비판에 대해 터무니없는 억측이라 치부한다. 그들이 이 음악의 서정적인 악절과 인어 아가씨의 애처로운 구원의 갈망을 제대로 들었다면 절대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친구로서 갖는 친밀감과 이해와 별로도 지옥을 묘사한 음악에서 아드리안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듣는 것 같아 섬뜩했다. 감각을 마비시킬 듯이 속삭이는 천사의 합창까지도 지옥의 웃음소리와 상응하는 것이야말로 아드리안 음악의 참모습이었다.

크레네크의 <예레미아 비가>와 또 다른 히에로니무스인 보슈의 그림을 표지로 쓴 아르농쿠르의 슈미트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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