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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Dec 20. 2018

35-36. 여인의 초상

제35장: 클라리사의 죽음 


연극 배우였던 클라리사 로데는 재능이 야망을 따르지 못하는 예술가였다. 무대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이 부족했던 그녀는 도리어 현실을 무대로 과장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그녀가 실생활에서 보인 여배우 특유의 콧대 높은 자존심은 뭇 남성을 감질나게도 했지만, 악의적인 적대감을 유발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실제로 형편없는 포르츠하임의 변호사에게 엮이고 말았고, 이들의 관계는 점점 꼬여 클라리사가 끌려 다니는 종속관계로 악화되었다.


때마침 그녀는 알자스 태생의 젊은 사업가와 사랑에 빠져 혼담이 오가게 되었지만, 원치 않는 정부(情夫)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변호사는 그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저질의 인간이었고, 클라리사는 벗어나려 할수록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변호사는 클라리사의 애인에게 그녀의 치부를 고발하는 편지를 썼고, 이에 애인은 크게 동요해 클라리사에게 경위를 묻는다.


평소 연극과 같은 삶을 동경한 클라리사는 늘 곁에 두었던 극약을 마시고, 애인에게 진실한 사랑의 변을 남긴 채 숨을 거둔다. 평범한 몰락보다는 극적인 죽음을 택하는 클라리사의 자조적인 태도, 그리고 동생의 비극적인 자살을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수치심을 숨기기 급급해 애써 태연한 척 자존심을 세우는 이네스의 모습이야말로 토마스 만이 『부덴브로크 일가』 이래 조명했던 당대 시민사회의 나약하고 병든 군상을 대변하는 것이다. 결국 이네스 또한 뒤에 동생 못지않은 파국을 야기하고 만다.

취리히 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

제36장: 톨나 부인 


1920년대 후반, 30대말에 접어든 아드리안 레버퀸은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부상한다. 뮌헨과 같은 보수적인 분위기의 대도시에서는 그를 적대했지만, 1921년 도나우에싱겐 음악 축제와 1922년 국제 현대 음악 협회(ISCM) 창립 공연에서는 그의 음악이 진지하게 수용되었다. 특히 그때까지 아드리안의 작품은 마인츠의 쇼트(Schott)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신생 출판사인 우니베르잘 에디치온(Universal Edition)은 『요한 계시록』을 눈여겨보았다.


쇼트는 19세기 이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출판사로, 바그너의 작품 대부분을 냈다. 바그너의 라이벌인 브람스는 짐로크(Simrock)소속이었다. 1901년에 빈에서 문을 연 우니베르잘은 당시 주목받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에 접근했고, 이는 쇤베르크와 베르크, 베베른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우니베르잘은 현대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출판사가 되었다. 반면에 쇼트는 쇤베르크의 라이벌인 스트라빈스키의 주요 작품을 내놓았다. 우니베르잘에 대한 토마스 만의 언급은 음악사에서 아드리안이 속한 위치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논란의 한 가운데에 있던 젊은 작곡가에게 마치 운명과 같은, ‘영원한 여성성’(Das Ewige-Weibliche)에 이끌린 듯한 호재가 잇따른 것(헝가리 평론가의 호평과 출판 계약)은 사실 숨은 후원자의 조건 없는 배려 덕분이었다. ‘톨나 부인’으로 알려진 후원자와 아드리안은 편지로 모든 속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부유한 미망인인 톨나 부인은 아드리안에게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이 도처에서 공연되도록 은밀히 주선했고, 아드리안의 지난 행적을 마치 순례하듯이 다녀갔다. 부헬 농장과 팔레스트리나, 심지어 ‘수도원장실’의 창문 아래까지 다녀갔지만 그녀와 아드리안은 일절 만나지 않았다.

십자가를 진 예수 아래 그의 피와 땀을 닦아주기 위해 베일을 든 베로니카 성녀가 보인다. 히에로니무스 보슈

아드리안은 <요한 계시록>을 작곡하는 동안 그녀에게 받은 큰 에메랄드 반지를 왼손에 끼고 작업했고, 이는 마치 다른 세상, 곧 마성의 영역과 연결되는 예식을 치르는 듯했다. 아드리안은 톨나 부인의 초대에 딱 한 번 응해 슈베르트페거와 함께 그녀의 영지에 머문다. 물론 부인은 집을 배운 상태였다. 귀족과 같이 여유로운 생활 속에 그들은 악마의 땅과 같이 피폐한 주민들의 삶을 목격한다.


톨나 부인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는 반사적으로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와 나데주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 철도 거부의 미망인인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를 아낌없이 후원했고, 차이콥스키는 그녀에게 교향곡 4번을 헌정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차이콥스키의 만년까지 만나지 않은 채 오직 은밀한 편지로만 대화를 나눴다.

차이콥스키가 폰 메크 부인에게 "우리 교향곡이 완성되었다"고 말한...

두 사람의 결별은 차이콥스키의 동성애가 알려진 것이 원인이라는 설과 부인의 자녀들이 유산을 지키기 위해 헤어짐을 강요했다는 설이 있다. 현실의 토마스 만과 소설 속의 아드리안 레버퀸 또한 동성애 성향을 가졌던 예술가라는 점에서 이 실화와 강한 연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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