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 달라피콜라
20세기 전반 이탈리아 음악가에게 12음 기법은 두 가지 면에서 금기시되었다. 첫째, 이탈리아는 선율의 나라이다. 아름다운 가락이야말로 르네상스 이래 이 나라 청중이 누려온 특혜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12음 기법이 주는 청각 경험은 그 범주 밖에 있었다. 둘째, 파시스트 정권에게 12음 기법은 지양해야 할 퇴폐 음악(Entartete Musik)이었다. 이탈리아의 사정이 나치 독일만큼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무솔리니도 히틀러의 인종 정책을 받아들였기에 유대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12음 체계는 달갑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 마당에 루이지 달라피콜라는 가지 않은 길을 갈 마음을 먹었다. 그러기까지 10년 동안 고민했다. 인생의 방향은 1924년 4월 1일에 결정되었다. 그는 피렌체 피티 궁전에서 쇤베르크가 지휘하는 <달에 홀린 피에로 Pierrot lunaire>를 보았다. 1912년에 베를린에서 초연된 쇤베르크 무조음악의 결정체가 이탈리아에 오는 데에 12년이 걸렸다.
청중의 반응은 조롱과 냉소를 오갔지만, 이탈리아 음악의 대부라 할 자코모 푸치니는 웃지 않았다. 단지 그가 건강이 악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그는 그해 11월 사망한다). 푸치니(1858년생)는 후배 알프레도 카셀라(1883년생)에게 작곡가(1874년생)를 소개받는 영광을 달라고 부탁했다. 피렌체의 학생 달라피콜라(1904년생)는 푸치니와 쇤베르크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두 작곡가는 분장실 한구석에서 약 10분간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도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몰랐지만, 그들을 본 모든 사람에게는 솔직한 대화라는 인상이 남았다. 아직 반대되는 방향과 이상을 가진 두 인물이 예술을 향한 공통된 사랑 속에서 접점을 찾던 시대였다.”
푸치니마저 이탈리아 음악이 더는 나아갈 곳이 없음을 절감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달라피콜라의 느낌은 아직 막연했다. 10년 뒤, 1934년에 달라피콜라는 베네치아에서 헤르만 셰르헨의 지휘로 쇤베르크의 제자 알반 베르크(1885-1935)의 <포도주 Der Wein>를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서른이던 나에게 베르크의 오케스트라는 거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견을 가능하게 한 대체 불가능한 중재자는 헤르만 셰르헨이었다.”
이듬해 그는 역시 쇤베르크의 제자이자, 음렬음악의 궁극인 안톤 베베른(1883-1945)을 만난다. 이탈리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프라하에서 열린 제13회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페스티벌에 참석한 달라피콜라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저녁 하인리히 얄로베츠가 안톤 베베른의 <협주곡, Op. 24>을 세계 초연했다. 나에게는 너무 복잡한 작품이라 명확한 인상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나타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우리 앞에는 상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가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미학적, 양식적 통일성을 발견한 것 같았다.”
1936년 달라피콜라는 피렌체에서 <현대음악의 한 측면>이라는 자신의 첫 공개 강연을 통해 굳은 결심을 발표했다. 쇤베르크와 무조성, 그의 청중 및 비평과의 관계, 베르크와 극장에 관한 내용이었다. 동시에 그는 <세 찬가 Tre laudi>의 작곡에 착수했다. 첫 번째 12음 선율이었다. 고음 성악과 열세 악기의 실내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찬가>는 ‘신 빈 악파’(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를 향한 동경의 실현이었다. 가사는 1266년 모데나에서 나온 모음집 <바투티의 찬가 Laudario dei battuti>에서 가져왔다.
바투티란 ‘채찍질당한 사람들’, 또는 ‘고행자들’이란 뜻이다. 바투티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모방해 피가 흐를 때까지 자신을 가죽 채찍으로 때리며 행진했고 이때 찬가를 불렀다. 이들 평신도 형제회 찬가의 대표적 작자는 약 100곡을 남긴 야코포네 다 토디(1230-1306)였다. 토디가 바로 우리가 아는 <슬픔의 성모 Stabat Mater dolorosa>의 원작자이다. 수도회의 찬가는 이탈리아 전역에 파고들었고 전하는 약 200개의 모음집이 그 파급력을 설명해 준다.
20세기 들어 르네상스와 중세 발굴에 대한 열풍이 불면서 1930년에는 토디에서 야코포네의 탄생 700주년 기념 전시가 열렸다. 1935년에는 피렌체 대학 교수 페르난도 류치(Fernando Liuzzi, 1884-1940)가 기념비적 연구 <찬가와 이탈리아 선율의 기원>을 발표했다. 류치는 역시 피렌체 태생의 작곡가 마리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1895-1968)와는 동서지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