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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

생텍쥐페리 & 달라피콜라

by 정준호

앙투안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 Vol de Nuit, 1931>은 남미 아르헨티나의 항공 우편 회사에서 일했던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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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다 먼저 나왔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우편집중국의 본부장 리비에르는 부하직원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상관이다. 날씨와 같은 불가항력에도 에누리 없다. 그가 매정해서가 아니라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분하는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부하직원들은 바로 그런 성격 때문에 상관을 존경한다. 비행기가 모두 도착하면 리비에르는 우편물을 취합해 머뭇거림 없이 유럽행 비행기에 실어 보내야 한다. 그는 야간 우편 비행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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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파타고니아(남), 칠레(서), 파라과이(북)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날아온다. 기상 예보가 좋지 않다. 가까운 칠레발 비행기는 안데스를 넘어 도착했지만, 파타고니아와 파라과이에서는 아직 오는 중이다. 파타고니아발 비행기는 사이클론 폭풍에 위협받고 있다. 젊지만 의욕과 책임감이 넘치는 조종사 파비앵은 교신이 끊겨 겁에 질린 무선사를 달래며 비행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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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과 싸우며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이 빠져갈 때쯤 희미한 별빛이 등대처럼 파비앵을 이끈다. 찬란한 구름바다 위로 올라선 그와 무선사는 한결 마음이 누그러졌고, 황홀경마저 느꼈다. 마치 죄수를 풀어주고 잠시 꽃밭을 걷게 해 준 듯이. 파비앵의 비행기는 가까스로 무선이 닿았고 릴레이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교신한다. 연료가 30분 비행할 만큼밖에 남지 않았다고. 집에서 기다리다가 안절부절못하며 본부에 왔던 파비앵의 아내는 어떤 희망적인 얘기도 듣지 못한 채 남편의 죽음만 예감하고 돌아갔다. 6주 전 결혼한 신혼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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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에르는 보물섬이 있다는 얘기만 듣고 배를 만들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 “목적이 아무것도 정당화해 주지 못한다 해도 행위는 죽음으로부터 놓아준다. 그들은 배 덕분에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 무전은 끊긴 채였고 연료는 이미 바닥났을 시간이 되었다. 동요하는 직원들에게 리비에르는 더 기다리지 말고 유럽발 항공기를 준비하라고 시켰다. 파라과이발 비행기는 무사히 도착했다. 리비에르는 다시 힘을 낸다.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승리라는 무거운 짐을 졌을 뿐.

부에노스아이레스 실황

리비에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일까? 선배 앙드레 지드가 생텍쥐페리에게 써준 서문에서 보듯이 “인간의 행복은 자유가 아니라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으며 그런 점에서 리비에르는 영웅이다. 루이지 달라피콜라가 1934년 이 소설을 오페라로 만들기로 마음먹은 이유도 바로 리비에르로부터 쉽게 드러나지 않는 영웅의 면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페라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이탈리아가 이번에는 편을 바꿔 참전할지 주판알을 놀리던 무렵에 작곡되었다.

20220930_092811.jpg 총화단결: 로마 문명궁

개인의 희생에 개의치 않고 야간 비행을 강행하는 리비에르의 모습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파시즘과 일맥상통한다. 마지막에 반발하던 직원들이 그의 한 마디에 마치 종교적으로 개심(改心)한 듯 돌아서는 장면은 무솔리니의 선동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오페라가 작곡 중일 때 유대인이던 달라피콜라의 아내 라우라가 인종법에 따라 피렌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해고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을 파시즘과 연결하는 것은 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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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야 무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야간 비행 Volo di notte>을 통해, 나도 모르는 사이, 살면서 처음으로 선택했다. 승리를 거두는 자들보다 고통받는 자들을 선호하는 쪽을.” 오페라는 1940년 피렌체 오월 음악제 때 페르골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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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부터

달라피콜라는 한 시간 남짓한 단막 오페라 <야간 비행>를 모두 여섯 장면으로 구성했다. 원작을 해체 구성한 달라피콜라의 문학적 감수성이 탁월하다. 여섯 장은 각기 대칭을 이룬다. (1-6, 2-5, 3-4). 첫 장과 마지막 장에서 리비에르는 고독하게 성찰한다. 제2장에서 파비앵은 난관에 부딪히고, 제5장에서 그는 죽음에 이른다. 가운데 장면은 갈등의 핵심을 이룬다. 제3장에서 직원들은 야간 비행의 실효성에 대해 의심하고, 제4장에서 파비앵의 부인은 그 중심에 선다.

20240910_010237.jpg 구획 정리

오페라 <야간 비행>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지만, 음악은 시작부터 고풍스럽고 선율적이다. 달라피콜라는 전작인 <세 찬가>에서 음악의 뼈대를 가져왔다. 제1장의 서주부터 첫 곡 ‘가장 높은 빛 Altissima luce’의 선율로 시작한다. 이 빛의 아우라는 제5장 별의 출현에 다시 나타난다. 파비앵이 본 별빛을 무대 뒤 보칼리제 음성이 이 가락으로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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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3_200019.jpg 별이다, 아니 달

<세 찬가>의 두 번째 곡 ‘모두 기뻐하라 Ciascun s’allegri’는 제2장에서 칠레발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을 때 나온다. 파비앵의 아내가 제4장에서 리비에르에게 “돌아올까요?”라고 물을 때 참회를 촉구하며 슬프게 부르는 세 번째 ‘성모 마리아 Madonna sancta Maria’가 인용된다.

(<세 찬가>에 대해서는 뿌리부터 뽑고)

피날레에서 리비에르가 ‘무거운 승리의 사슬을 끌 것입니다’라는 파비앵 부인의 말을 떠올릴 때 파비앵이 본 백열광이 짧지만 강렬하게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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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비행기에 진심이다

달라피콜라는 각 장에 드라마의 연속성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개별 형식을 도입했다. 첫 장에는 ‘블루스’가, 제3장의 급박한 정황에선 복잡한 리듬이 전개된다. 제5장은 ‘변주와 피날레를 가진 코랄’로, 제6장은 ‘찬송가’로 각각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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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0_102223.jpg 정적만이 남아 있죠

무대 작품의 한계상 장소가 공항에 국한되는데, 이를 위해 파비앵의 대사는 모두 그와 무선사의 목소리만으로 전해진다. 단순해진 구성을 보완하기 위해 그는 파비앵 부인의 역할을 확대했다. 그녀는 단순히 남편을 걱정하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리비에르에게 사태의 본질을 질문하는 중요 인물이다. 생텍쥐페리가 결말에서 제시한 주제는 이미 달라피콜라의 오페라 제4장에 모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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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앵 부인은 리비에르에게 “당신이 무슨 권리로 직원들의 행복을 빼앗아 가나요?”라고 묻는다. 리비에르는 스스로 그런 권리가 있다고 답한다. “목적이 정당한지 아닌지는 의미 없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넘어서 살 가치가 있는 위대한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말한다. 파비앵 부인은 절망하며 이렇게 말하고 돌아간다. “저는 여자이고 사랑합니다. 저는 커다란 사랑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저는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오늘 밤 비행기들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항상 리비에르, 위대한 인물, 승자로서 자신의 무거운 승리의 사슬을 끌 것입니다.”

DSC03669.JPG 놔라

다음 장에서 리비에르는 파비앵과 마지막으로 교신한다. 급박한 상황을 전하던 무선사의 눈앞이 갑자기 밝아진다. 소프라노의 보칼리제와 함께 파비앵은 “별이 보입니다!”라고 감탄한다. “다시 내려올 수 없을지라도 별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모두 밝아집니다. 제 손, 제 옷, 제 날개” 리비에르는 그의 최후를 직감한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제 아래 모두 닫혀 있습니다. 더는 연료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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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름답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파비앵의 죽음을 전해 들은 직원들이 리비에르에게 몰려온다. 무리한 운항에 대해 항의와 거부의 뜻을 전하려 온 그들에게 리비에르는 차분하게 야간 비행의 당위를 강조하며 유럽행 비행기의 출발을 명령한다. “패배는 진정한 승리에 가까워지는 경험이다”라는 그의 말에 직원들은 감동해 그의 이름을 연호한다. 홀로 남은 리비에르가 파비앵 부인이 남기고 간 말을 되뇌며 막이 내린다. “리비에르, 위대한 인물, 승자로서 자신의 무거운 승리의 사슬을 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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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레온 봇스타인의 전곡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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