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이집트 기행 (1)
2025년 9월호 노블레스 매거진 게재
이집트 기행을 연재하기에 앞서 수없이 되물었다. 왜 그곳에 가야 했을까? 수많은 사람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어린이들은 뜻밖에 미라에 열광한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나일 살인 사건>에 나오는 낭만적인 선상 여행도 떠올렸다.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이집트 여행을 마치고 돌아보건대 늦었더라도 꼭 필요했다. 결국 서양 문화로 먹고사는 내게, 이집트는 블랙홀처럼 끌어당기기는 미지의 시공간이었다.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 세계 굴지의 박물관은 이집트관을 자랑삼는다. 약탈 능력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 그 유물의 중요함 때문이리라. 그러나 대개 관람객에게 이집트관이 주는 감흥은 르네상스나 인상주의 미술보다 크지 않다. 기대하는 피라미드의 압도적인 장관이나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아니기에. 나 또한 다리 아파 이집트관을 건너뛴 적이 많다. 그러나 피라미드나 황금이 이집트 여행의 목적일까? 내가 갈망하는 장소의 의미는 결국 그곳이 내 안에 얼마나 크게 자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주의 깊게 본 영화는 <로마의 휴일>이었다. 한참 뒤 실제로 영화에 나오는 유적을 가보면서 하루에 돌아다니기에 비현실적인 동선이 의아했다. 돌턴 트럼보가 로마에 가보지 않고 책상에 앉아 대본을 썼기 때문일까? 그런 트럼보의 대사 중 기막힌 부분이 있다. 노숙하던 공주(오드리 헵번 분)를 하숙집에 데려간 기자(그레고리 펙 분)는 침대가 하나이니 카우치에서 자라고 가리킨다. 공주는 ‘카우치’라는 말을 듣고는 뜬금없는 시를 암송한다.
(이미 너무 많이 다룸)
“아레투사가 천둥산 눈 덮인 자신의 카우치에서 일어났다.” 기자가 “셸리”라고 작자를 대자, 처녀는 “키츠”라고 반박한다.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님프 아레투사가 강의 신 알페이오스의 구애를 피해서 바다 건너 시칠리아까지 이른 내력을 읊은 시이다. 영화에서 가리지 못한 정답은 ‘셸리’이다. 공주가 헷갈린 까닭은 키츠도 아르테미스의 연인 엔디미온을 예찬한 시에서 아레투사를 언급하기 때문일 터. 트럼보의 현학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튿날 공주가 젤라토를 먹던 로마 스페인 광장 오른쪽에 오늘날 두 시인을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19세기 영국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존 키츠는 모두 이탈리아에 와서 비운의 생을 마감했고 둘은 로마의 비(非) 가톨릭 신자 묘지에 묻혀 있다. 그런데 무덤 뒤로 웬 피라미드가 보인다.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를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차례로 다녀간 뒤 로마에는 이집트 열풍이 불었다. 묘지의 담이 되어 주는 피라미드의 피장자는 당대 고관 가이우스 세스티우스. <오지만디아스 Ozymandias>를 쓴 셸리가 묻히기 더없이 좋은 곳이 아닌가! 오지만디아스는 람세스 2세(기원전 13세기)의 그리스식 이름이다. 셸리는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그의 거대한 흉상을 보고 시를 지었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들의 왕이다. 강력한 자들이여, 나의 업적을 보고 절망하라!”라고 선언하는 파라오를 두고 시인은 독백한다. “그밖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폐허 주위로 거대한 잔해의, 끝없고 황량하고 외롭고 평평한 모래가 멀리까지 뻗었다.”
마침내 나는 람세스 2세가 세운 아스완의 아부심벨 사원 앞에 섰다. 그런데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1960년대에 아스완하이댐 건설로 사원이 수몰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 주도로 이전 사업이 추진되었다. 1천 개가 넘는 블록으로 자른 아부심벨은 65미터 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셸리의 허망한 시가 더 실감 나는 대목이다. 사원 건축에 권력을 남용한 람세스 2세는 곧 모세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파라오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 시리즈는 괴기 공포 영화를 넘어 인류의 기원을 탐색하는 철학적 세계관으로 넘어갔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신인류(안드로이드)를 창조한 인류는 뿌리를 찾아 우주로 나아간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가 만들었느냐”라고. 구형 안드로이드(데이비드, 곧 다윗)가 무서울 만큼 똑똑하자 신형(월터, 곧 장삼이사)은 다루기 쉽게 감수성을 무디게 만든다.
데이비드와 월터는 일인이역(마이클 파스벤더 분)이다. 마치 <로마의 휴일>을 패러디하듯 데이비드는 월터에게 <오지만디아스>가 “바이런”의 시라고 떠본다. 월터는 “셸리”라고 정정한다. 이 문답으로 월터는 신형인 자신이 데이비드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하고 경계를 늦춘다. 결국 고립된 행성을 벗어나려는 데이비드의 희생양이 되는 월터. 우주선을 독점한 데이비드는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 가운데 ‘신들의 발할라 입성’을 들으며 창조자의 기분을 낸다.
영화는 이렇게 천지창조의 신성을 가지고 아슬아슬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실제로 피라미드를 두고 같은 논박이 진행 중이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구형)는 람세스 2세의 아부심벨(신형)보다 1300년가량 연대가 앞선다. 규모도 훨씬 클뿐더러 정교한 기술력은 현대에도 도달하기 힘든 수준이다. 쉽게 말해 피라미드는 근대에도 꿈꾸지 못한 지구과학의 결정체이다.
절대권력의 파라오가 자신의 무덤으로 2, 30년 동안 국력을 기울여 만들었다고 추정해 왔지만, 대성당을 짓는 데도 수백 년 걸렸던 것과 비교해 불가능한 셈법이라는 반박도 만만찮다. 그런 쪽에서는 수백 년 동안 관측된 천문학에 기반한 신전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전자가 우세하지만, 후자도 무시할 수 없는 틈을 제삼자 개입설이 파고든다. 곧 외계인이나 사라진 고차원 문명(가령 아틀란티스) 덕분이라는 음모론이다. 문제는 알면 알수록 끌리는 게 음모론이라는 점이다.
중세 석공 조합은 대성당 건축의 핵심 인력이었다. 이들은 도제, 직공, 장인이라는 철저한 위계를 통해 그들만의 비법을 전수했다. 이것이 프리메이슨 결사의 시작이다. 뒷날 석공 조합이 쇠퇴하면서 결사는 명예 회원을 들였다. 마침 사회 계층 분화로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가 공존할 공간이 필요했고, 가톨릭과 개신교를 넘어선 중립적인 사교의 장으로 프리메이슨이 안성맞춤이었다. 18세기 초 런던 지부를 기점으로 유럽과 미국의 계몽적 기류 곳곳을 프리메이슨이 파고들었다.
결사가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을 들면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볼테르, 애덤 스미스,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1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벤저민 프랭클린, 조지 워싱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밖에 수없이 많다. 그런 프리메이슨이 가톨릭교회의 엄청난 비판을 받고 이단시된 이유는 그들의 이집트 숭배 때문이다. 교황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신을 기리는 의식을 상징적으로 모방한 프리메이슨을 신성모독으로 낙인찍었다.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대로이다. 세계 최강국의 지폐에는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옆 피라미드에는 호루스의 눈에서 유래한 지혜의 눈이 그려져 있다. 워싱턴 DC와 파리 중심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민족문학’을 넘어선 보편적인 ‘세계문학’이 필요하다는 괴테의 주창대로 수많은 출판사가 고전을 번역 출간하며, 종교와 언어를 초월한 작가에게 권위 있는 문학상을 준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에는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섬기는 현자 자라스트로(조로아스터)가 나온다. 그는 선한 왕자와 공주에게 ‘밤의 여왕’에게 맞설 불과 물의 통과의례를 치르게 한다.
좋은 좌석의 비행기를 타고 5성 호텔에 묵으며 현지 특식을 먹고 유적지에서 인증사진 찍어 SNS에 올리는 여행이라면 더없이 공허하다. 거꾸로, 사서 고생했다고 푸념만 하는 것도 참된 여행자의 자세는 아니다. 지적 허영심의 충족이 전부라면 나보다 더하긴 힘들지 않을까?
고대부터 이어져 온 이집트인의 삶과 그들 곁에 부대끼고 사는 우리 이웃의 삶을 좀 더 살펴보았어야 했다. 그러기에 이집트라는 블랙홀은 너무 어둡고 깊었고, 그 언저리에서 나는 각국에서 밀려든 관광객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자책하자니 룩소르 모래사장 위에 덩그러니 선 멤논의 거상들이 떠오른다. 셸리가 박물관에서 보고 머릿속에 그렸던 흉상의 실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