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관에 바침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20세기 Novecento>(1976)는 한 노동자의 얼굴 그림으로 시작한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애잔한 오보에 선율과 더불어 그림이 페이드아웃 되면 노동자를 따르는 군중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가운데 하나일 이 그림은 주세페 볼페도가 그린 <제4계급 Il Quarto Stato>이다. 저마다 사연 가득한 남녀노소의 얼굴은 20세기가 노동자의 시대라고 도도하게 주장한다.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물 그림을 보고 싶을 것이다. 나도 처음 밀라노에 갔을 때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못지않게 이 그림을 갈망했다. 허나 실제로 <제4계급>을 본 것은 한참 뒤의 일. ‘노베첸토’라는 영화 제목에 이끌려 밀라노 대성당 바로 옆의 20세기 박물관(Museo del Novecento)부터 찾아도 매번 허탕이었다. 여러 도록에 그곳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뭔가 공개하지 못할 사정이 있나 짐작했다. 진작 물었어야 했는데, 아뿔싸! 그 그림은 근대 미술관(Galleria d’Arte Moderna)에 있었다. 당장 지도를 열어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후 내 ‘밀라노 1번지’는 브레라 미술관도 라 스칼라 오페라도 아닌 근대 미술관이 되었다.
볼페도의 <제4계급>은 크기부터 압도적이다. 높이가 3미터 가깝고 폭은 5미터 반이 넘는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이 크기 때문에 20세기 박물관에 잠시 머물다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한참을 서서 영화 속 인물들을 본다. 그 안에 버트 랭커스터가, 로버트 드 니로가,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도널드 서덜랜드가 있다. 한마을에서 자란 가족 같은 사람들이 알량한 이념 때문에 반목한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다. 어쩌면 ‘네 번째 계급’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앞선 세 계급(성직자, 귀족, 평민)을 대신할 현대인 전체를 말한 것이 아닐까!
18세기말, 귀족의 저택으로 지은 빌라 레알레(Villa Reale)는 1920년부터 시 소유가 되었고, 이듬해 근대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건물 2층에 자리한 전시 공간은 프란체스코 아예츠(Francesco Hayez, 1791-1882)의 그림들로 시작한다. 이 지면을 통해 몇 차례 얘기했듯이 아예츠는 주세페 베르디가 음악으로 한 일을 미술에서 이뤘던 거장이다. 그는 많은 인물화와 역사화를 통해 이탈리아 독립과 통일에 상징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이 방안에도 19세기 이탈리아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알레산드로 만초니(베르디가 그를 애도해 <레퀴엠>을 썼다)를 비롯한 여러 인물의 초상화가 가득하다. 근대 미술관에서 인상적인 점은 회화와 조각을 어우러지게 전시했다는 것이다. 방마다 벽에 걸린 그림과 그림 사이, 절묘한 공간에 조각이 서 있다.
아예츠의 방에도 안토니오 탄타르디니의 <파우스트와 마르게리타>가 입을 맞추고, 안토니오 카노바의 <헤베>는 신들에게 넥타르를 따르며, 카밀로 파체티의 <미네르바>가 프로메테우스의 자동인형에 영혼을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