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단테에서 셰익스피어까지

베로나 근대미술관

by 정준호

2026년 1월호 노블레스 매거진 게재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열리는 아레나 오페라 축제로 한 해를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베로나. 원형 경기장은 고대 로마가 2000년 뒤 후손에게 전한 위대한 유산이다.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장’이라는 타이틀 덕에 연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DSC04193.JPG

다음 차례는 무엇일까? 나는 산타 아나스타샤 대성당에 있는 피사넬로의 프레스코를 꼽고 싶다. 르네상스 초기 화가 피사넬로는 피사에서 태어났지만(그 이름이 암시한다), 베로나에서 자라고 배웠다. 그는 베네치아와 만토바 등지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이사이 베로나로 돌아왔고 이 성당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림은 성(聖) 조르조가 귀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용(龍)을 퇴치할 원정을 떠나는 장면이다.

피사넬로의 프레스코2.JPG
피사넬로의 프레스코.JPG

오랜 세월로 빛이 바랬음에도 용사의 기백과 여인의 아름다움, 그리고 배경과 세부 묘사가 마치 막 일어날 일처럼 심장을 뛰게 한다. 기사가 응시하는 건너편의 용은 이슬람 세력 또는 베로나를 겁박한 베네치아라고 추측하지만, 사실이야 어쨌건 이것은 낭만적 출사표의 본보기이다. 베로나가 키운 화가의 존재감이 가장 돋보이는 그림이다.

마사니엘로 Masaniello.JPG 밀라노의 마사니엘로
푸티나티의 미니어처들.JPG 테이블 위에 마사니엘로의 미니어처가 있다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독립운동)를 대표하는 조각가 알레산드로 푸티나티도 이곳 태생이다. 그의 <마사니엘로 Masaniello>는 밀라노 근대미술관의 전시실 입구에서 오늘도 민심의 횃불을 들고 서 있다. 17세기 나폴리 어부 마사니엘로는 총독의 불의에 항거해 민중의 봉기를 이끌었다. 뒷날 프랑스 작곡가 다니엘 오베르는 그랜드 오페라의 효시로 꼽히는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 La muette de Portici>를 통해 어촌 혁명 전사를 다시금 불러냈다.

오베르의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 서곡

비록 원작은 밀라노에 내줬지만, 베로나 근대미술관(Galleria d’Arte Moderna Achille Forti)도 푸티나티의 미니어처들로 관객을 맞는다. 이는 1830년대에 발명된 삼차원 복제기를 통해 조각을 탁상용 소품으로 양산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혁명과 더불어 ‘예술 복제 시대’가 왔다.

곱씹음 La Meditazione.JPG

조각의 <마사니엘로>만큼 리소르지멘토를 상징했던 회화가 프란체스코 아예츠의 <곱씹음 La Meditazione>이다. ‘명상’이라는 오역으로는 의미를 짚지 못한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에서 영감을 받은 <곱씹음>은 1848년 밀라노 봉기의 실패에 대한 실망감과 재기의 결의를 되새긴다. 여인은 ‘이탈리아 역사’라고 적힌 책과 함께 통일의 걸림돌이자 신앙의 상징인 십자가를 들고 있다. 아예츠는 십자가에 보일 듯 말듯이 밀라노 봉기의 날짜 닷새를 새겼다. 베로나는 이 그림을 의뢰했음을 더없이 자랑으로 여긴다.

이긴 내기.JPG

아예츠의 제자 도메니코 인두노는 훨씬 밝은 분위기로 독립을 낙관했다. <이긴 내기>에서 여인은 험한 언덕배기 아래로 손수건을 흔들며 승리의 기쁨을 전한다.


베로나 사람이라면 이곳이 피렌체에서 쫓겨난 단테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망명지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단테는 자신을 받아준 칸그란데 1세에게 <신곡>의 ‘천국편’을 헌정했다. 단테의 탄생 600주년을 앞두고 베로나는 그의 조각상 공모전을 열었다.

광장의 조각상.JPG

광장과 미술관의 단테

청동상.JPG

베로나 안팎의 도전자 일곱 명 가운데 우고 찬노니(Ugo Zannoni)가 뽑혔다. 문제는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트리아가 단테를 이탈리아 문화의 정체성으로 간주하고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전 검열을 피해 동상 제막은 1865년 5월 14일 새벽 4시에 거행되었다. 광장의 조각상을 축소한 미술관 내 청동상이 피에트로 로이의 <베로나의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베로나의 연인.JPG

찬노니에 앞선 또 한 사람의 베로나 천재 조각가가 그의 짧은 생애를 바친 창작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토르콰토 델라 토레(Torquato della Torre)는 비단 작품만이 아니라 생명을 통일에 헌신한 예술가였다. 그는 밀라노 5일 혁명에 직접 가담했고, 가리발디 장군의 붉은 셔츠 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그는 다쳐서 베로나로 돌아와 결혼했지만, 1년 만에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겨우 38세였다. 어쩌면 델라 토레가 요절한 덕분에 베로나가 그의 작품을 상당수 소장했는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밀라노가 그의 성공을 빨아들였을 테니까.

<난교 L’Orgia> 또한 <신곡>의 ‘지옥편’ 가운데 지옥의 입구에 새겨진 “나를 통해 타락한 영혼들 사이로 들어간다”라는 구절의 형상화이다. 해골과 뱀이 새겨진 의자에 타락한 여인이 성경을 밟고 앉았다. 탕녀는 압제 하의 이탈리아이며 성경은 적과 결탁한 교황을 은유한다.

난교 L’Orgia.JPG

이 여자는 분명 아래 두 남자의 변주이다

DSC02532.JPG
DSC05204.JPG
뮌헨 헤라클리온과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의 조각상들

델라 토레의 <신곡> 주인공이 줄을 잇는다.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과 아들 가운데 따로 만든 <가도> 또한 지옥에서 왔다.

토르콰토 델라 토레.JPG
가도.JPG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된 우골리노는 아들 손자와 옥에 갇혔다. 이어 배식까지 중단되자 굶주림의 공포가 이들을 덮쳤다. 손을 물어뜯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기 살을 드시라 했다. 가도가 먼저, 이어 다른 아이들이 모두 죽은 뒤 단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슬픔보다 굶주림이 더했다.” 뒷일은 상상에 맡긴다는 뜻이다.

입맞춤 뒤.jpg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 이후에도 이탈리아에는 통일이라는 지속적인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화풍이다. 베로나에서 가장 반가운 그림 가운데 하나는 조반니 세간티니의 스케치였다. 목동이 앉아서 피리를 부는 옆에 그의 연인이 누워 쉬고 있다. 제목은 <입맞춤 뒤>. 나는 이 목동이 취리히에서 보았던 같은 화가의 <알프스 목초지>에서 잠든 소년과 동일인이 아닐까라고 상상했다.

알프스 목초지.JPG 아 목동아!

어쩌면 화폭 바깥에 여자친구가 누워 있을지도. 세간티니, 지난달 살펴본 <제4계급>의 작가 주세페 볼페도와 함께 분할주의 유파를 이끌던 안젤로 모르벨리(Angelo Morbelli)의 대표작 <나아간다 S’avanza>가 시선을 끈다. 안락의자에서 책을 바닥에 떨군 채 먼 풍경과 마주한 여인. 죽음의 불안과 관조하는 망중한이 공존한다.

나아간다.JPG
나아간다 2.JPG

대중에게 서양 미술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에 앞서 유사한 화파가 탄생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리발디와 전장을 누비던 화가들은 눈부신 자연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고달픈 민중의 삶을 마주하며 보고 느낀 바를 캔버스에 옮겼다.

DSC02044.JPG

안젤로 모르벨리가 그린 마키아이올리의 대표작, <밀라노 중앙역>과 <마지막 나날들>, 밀라노 근대미술관

DSC05400.JPG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는 ‘얼룩’이란 말에서 온 기법이다. 서로 다른 색의 얼룩을 병치해 빛과 그림자를 대조한 기법은 사실상 인상주의와 같은 시도였고, 시기상으로 10년 이상 앞섰다. 알려지지 않은 걸작을 하나씩 만난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무명인 까닭은 여럿이다. 많은 화가가 생활고로 요절했다. 작품도 화상을 통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개인 소장에 머물렀기에 미국이나 부유한 유럽 국가에 팔려나가지 못했다. 뒷날 무솔리니가 민족주의를 독점한 탓에 마키아이올리의 예술성은 오염되고 말았다.

기도 La preghiera2.JPG

드디어 나는 <곱씹음>만큼이나 중요한 미술관의 보물 앞에 섰다. 펠리체 카소라티(Felice Casorati)의 <기도 La preghiera>는 외부에 대여되었다가 재설치 중이었고 한동안 기다린 끝에 관람의 행운이 돌아왔다. 피에몬테 태생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 전후를 베로나에서 보낸 카소라티는 1910년 베네치아에서 본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기도 La preghiera.JPG

장식적이고 상징적인 분리파의 특징에 화가는 이탈리아의 염원을 담았다. 꽃밭 위의 여인은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연인이며, 보티첼리와 아예츠의 모델이자, 베르디와 베리스모 작곡가들이 온기를 불어넣었던 프리마돈나와, 같은 여인이었다.

베로나의 파노라마3.JPG
베로나의 파노라마.JPG
베로나의 파노라마2.JPG

베로나 근대미술관을 유럽 유수의 미술관과 비교할 수는 없다. 밀라노와 로마의 자매 미술관에 견주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곳에는 베로나가 있다. 발다사레 롱고니가 점묘법으로 그린 <베로나의 파노라마>는 실경 그대로인 반면, 비토리오 아반치의 <옛 시장 계단>을 보면 현재 미술관인 라조네 궁전의 계단에 과거에는 지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옛 시장 계단2.JPG
베로나 옛 시장 안뜰.JPG

카를로 페라리의 <에르베 광장>에 서 있는 종탑과 생기발랄한 군중은 반드시 자리를 지켜야 한다.

에르베 광장4.JPG
에르베 광장.JPG
에르베 광장2.JPG
에르베 광장3.JPG

약탈이나 착취한 것이 아니라 작가와 소장자들이 시민을 위해 기증한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아우라에 발목을 잡힌다. 인노첸초 프라카롤리의 <상처 입은 아킬레스>가 된 듯!

상처 입은 아킬레스.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