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딧과 홀로페르네스 (2)
베툴리아는 앞서 살펴본 대로 원래 이름인 세겜을 문학적으로 바꾼 지명이다. 이 사마리아인의 땅은 지대가 높아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을 모두 내려다보는 요지였다.
아시리아(이 또한 원래 바빌론을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심복 홀로페르네스 장군은 수도 니네베(오늘날의 이라크 모술 인근)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도시를 차례로 복종시키고 베툴리아에 이르렀다. 포위된 고지대는 식수난에 고통받게 마련이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을 때 과부 유딧이 나섰다. 남편을 여읜 지 삼 년째 되는 그녀는 유산 덕에 부유했고, 용모는 대단히 아름다웠으며, 하느님을 공경했기에 원망하는 이가 없었다. 부족 원로들은 그녀에게 비를 내려달라 기도하라고 권했다. 그녀는 대신 주님의 손으로 도성을 구하겠다며 자신이 하려는 일을 묻지 말라 하고 자리를 떴다.
간곡히 기도를 올린 그녀는 상복을 벗고 남편 생전처럼 아름답게 치장한 뒤 베툴리아 성 밖으로 나갔다. 경비병에게는 망할 나라를 버리고 왔고 장군께 성을 공략할 방책을 알릴 것이라며 안내를 청했다. 그녀를 보는 병장마다 미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홀로페르네스도 마찬가지였다. 유딧은 하느님이 돌보는 한 베툴리아를 쓰러트리지 못할 것이지만, 성안이 굶주린 나머지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금한 것에까지 손을 대고 있으니 이미 명운이 다했다고 장군을 충동질했다. 유딧의 말솜씨에까지 반한 홀로페르네스는 그녀를 진중에 들였다.
유딧이 근처에서 기도와 목욕재계를 거듭하던 사흘째 홀로페르네스는 그녀를 유혹하려고 술자리를 마련했다. 내시 바고아는 두 사람만 남은 천막에 아무도 얼씬 못 하게 했다. 잔뜩 취한 홀로페르네스가 잠들자 유딧은 적장의 칼로 그의 머리를 두 번 내리쳐 몸과 분리했다. 천막 밖에서 기다리다가 머리를 받은 유모는 그것을 자루에 넣었다.
유딧과 유모는 평소 기도하러 갈 때처럼 진영을 빠져나와 베툴리아로 돌아가 성문을 두드렸다. 원로들은 유딧이 들고 온 적장의 목을 망루에 걸고 그녀의 말대로 아침이 되어 적진을 향해 갔다. 뒤늦게 장수를 잃은 것을 안 적진은 무너졌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버리고 전리품을 챙겼다. 유딧은 하느님께 감사했고, 사람들은 그녀를 칭송했다.
르네상스 이래 이탈리아에서 유딧과 홀로페르네스는 미술의 단골 소재였다. 1460년 피렌체의 도나텔로는 친구였던 국부(國父) 코시모 데 메디치를 위해 유딧과 홀로페르네스의 청동상을 만들었다. 원래 메디치 가문의 리카르디 궁전 정원에 세웠던 청동상은 뒷날 권력을 독점하던 메디치 가문이 쫓겨났을 때 베키오 궁전 앞으로 옮겨 공화정의 본보기로 삼았다.
도나텔로의 후배 미켈란젤로가 바로 곁의 다윗상(像)으로 공화정을 찬양한 것의 선례였다. 좀 더 의미를 확대하면, 도나텔로의 청동상은 피렌체를 옥죄던 교황청과 기독교 세계 전체의 적이던 오스만튀르크에 대한 항거의 뜻으로 읽힌다.
이슬람 세력뿐만 아니라 교황과 황제 양쪽 모두와 더욱 치열하게 대립하던 베네치아의 화가들도 ‘유딧의 승리’를 즐겨 그렸다.
티치아노, 베로네세, 틴토레토의 그림이 모두 레판토 해전(1571) 직전 직후에 나왔다. 기독교 연합의 신성동맹은 서진하던 오스만튀르크를 그리스 레판토 앞바다에서 궤멸시켰지만, 내부의 불협화로 승리를 극대화하지 못한 채 오히려 베네치아가 키프로스를 오스만튀르크에 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16세기가 마감되던 순간 로마에서 등장한 화가가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암살의 시계를 몇 분 앞당겼다. 카라바조는 회화를 드라마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선배들이 모두 홀로페르네스의 머리가 잘린 다음 순간을 그렸다면, 카라바조의 장수는 아직 숨이 붙어 있다.
두 눈이 공포에 사로잡혀 가차없는 유딧을 바라보는 가운데 목에서 피가 솟구친다. 유모는 천막 안으로 들어와 목이 떨어질세라 자루에 담을 기세이다. 바르베리니 궁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폭력적이고 선명한 카라바조의 그림은 종교개혁의 역풍을 맞은 로마 가톨릭이 취한 결연한 태도가 엿보인다. 카라바조의 영향력은 오랜 시기, 폭넓은 지역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피렌체 우피치), 마티아 프레티(나폴리 카포디몬테), 리오넬로 스파다와 트로핌 비고(파르마 필로타), 카를로 사라체니와 시몽 부에(빈 미술사 박물관) 등이 그 예이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걸린 귀도 레니(1575-1642)의 그림이다. 같은 교황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볼로냐 태생의 레니는 카라바조의 부담스러운 리얼리즘이 아닌 고전적인 우아함을 보여준다. 그리스 여신이나 성녀에게 어울릴 법한 옷을 입은 유딧은 메두사의 머리를 벤 페르세우스처럼 하늘을 쳐다보며 인정(認定)을 구한다.
이제 겨우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라 주디타 La Giuditta>와 안토니오 비발디의 <유딧의 승리 Juditha triumphans>를 얘기할 수 있다.
음악칼럼니스트는 다리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