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를 구출한 미녀

로마 근현대미술관

by 정준호

노블레스 매거진 2026년 2월호 게재


유독 미술관 뉴스가 잦았던 2025년. 10월 루브르 미술관 보석 도난 사건과 한 주 뒤 이집트 대박물관 개관 소식이 특히 화제였다. 파리의 수모는 카이로발 문화재 반환 요구의 직격탄으로 이어졌는데, 불똥은 엉뚱하게 베를린 신박물관으로 튀었다. 이집트는 독일이 불법 반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네페르티티 황후의 흉상을 돌려달라고 공식 요구했다. 독일은 그동안 이집트의 허술한 관리를 탓하며 반환을 거부했는데 루브르의 안일함이 기름을 부으면서 명분을 잃었다. 약탈 문화재들이 살아서 박물관을 나서지 않는 한 해결되기 힘든 문제이다.

image.png 살아나라

‘모뉴먼츠 맨’(Monuments me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활약한 미국 특공대이다. 나치가 강탈해 간 서유럽 미술의 보물을 추적해 제자리에 돌려놓고자 자원한 대원을 ‘문화재 전담반’쯤으로 불렀다. 조지 클루니가 감독 주연한 동명 영화로도 꽤 알려졌다. 히틀러가 고향 린츠에 거대한 미술관을 세우려고 모은 걸작 가운데는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브뤼헤의 미켈란젤로 <성모자상>, 헨트 성 바프 대성당의 반 에이크 제단화처럼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미술품이 많았다. ‘라이언 일병’ 아닌 ‘미술사 구하기’쯤 되는 작전이었다. 라이언이거나 미술사이거나 몇 사람이 목숨 걸 일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의 몫일 터. 특공대의 활약 덕에 수많은 문화재가 광산이나 고성 같은 은닉처를 나와 제자리로 돌아갔다.

논픽션과 영화 <모뉴먼츠 맨>에서 미국은 문화재의 수호천사처럼 미화되었지만, 사실은 그들도 문화재 반출에 누구 못지않게 열을 올렸다. 수완 좋은 미술사가 버나드 베런슨은 피렌체에 터를 잡고 미국 부호들에게 이탈리아 걸작을 중개해 막대한 돈을 챙겼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 개발 과정에서 엄청난 미술품이 쏟아져 나왔고, 신대륙에서 큰손이 왔다는 소문에 재정난에 허덕이던 이탈리아 귀족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을 경매에 넘겼다. 베런슨의 고객은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피츠버그의 앤드루 멜론, 볼티모어의 헨리 월터스 그리고 뉴욕의 헨리 클레이 프릭, J. P. 모건, 로버트 리먼 등이었다. 오늘날 그들 이름을 딴 미국 대도시 미술관이나 기증관을 통해 그 값어치를 어림할 수 있다.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의 경제력 차이와 정보의 불균형 사이에서, 영악한 미술 중개상이 개입한 예술품 유출로 미국은 단번에 문화적 열등감을 극복했다.

image.png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드 가드너 박물관의 중정

고대 그리스-로마와 르네상스 유산을 물려받은 이탈리아 근현대 미술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카라바조의 후예인 프란체스코 아예츠, 조반니 세간티니, 프란체스코 파올로 미케티의 이름을 대는 사람은 흔치 않다. 로마 근현대미술관까지 왔다면 그런 목마름은 단번에 해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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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츠가 중세 외세에 대한 민중 봉기를 그린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에 베르디도 오페라로 화답했다. 대부분의 오페라 애호가는 조반니 볼도니의 초상화로 작곡가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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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주의 작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연인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카사티 후작부인을 그린 볼도니의 초상화도 발길을 멈추게 한다.

Giovanni boldini, ritratto della marchesa casati con penne di pavone.JPG

단눈치오와 동향의 친구이던 미케티의 <맹세>는 축일을 맞은 시골 성당의 종교적 황홀경을 포착했다. 하층민들이 성유골함을 향해 땅을 기고 바닥에 입을 맞춘다. 초와 향냄새가 화면을 뚫고 코에 들어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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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당하는 성 안토니오>를 그린 도메니코 모렐리가 미케티의 스승이다. 주세페 데 니티스의 <불로뉴 숲의 경마>에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오드리 헵번이 외칠 것 같다. “궁둥이 들고 달려, 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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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의 <태양>과 가에타노 프레비아티의 <타락한 천사들>은 이탈리아 분리파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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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파괴를 부르짖은 미래파가 멀지 않다. 현대로 가기에 앞서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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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마 부카렐리(Palma Bucarelli, 1910~1998)는 신화 속 피그말리온의 살아난 조각 갈라테이아처럼 아름다웠다. 미술사를 전공한 그녀는 문화부 미술 검사관 공모전에서 우승해 23세의 나이에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에 배정되었다. 이후 나폴리로 전근해 현대 철학의 거장 베네데토 크로체와 교류하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와 1939년 국립근현대미술관에서 일했다. 2년 뒤 관장이 된 부카렐리는 1975년까지 34년 동안 이탈리아 현대미술을 대변했다.

Palazzo_Farnese_(Caprarola).jpg 빌라 파르네세

근현대 미술은 고미술만큼 국외 유출이 심하지 않았지만, 1941년 이탈리아도 폭격을 피할 수 없자 미술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부카렐리는 소장품을 포장해 직접 구한 스물일곱 대 트럭에 실었다. 아무도 믿지 않고 손수 피아트를 몰고 트럭 뒤를 따른 그녀가 도착한 곳은 로마 60㎞ 북쪽 카프라롤라의 여름 휴가지 빌라 파르네세였다. 2년 뒤 그곳도 위험해지자 다시 로마로 돌아와 산탄젤로성(城) 지하에 미술품을 숨겼다. 황제 카를 5세의 로마 약탈(1527년) 당시 성안에서 클레멘트 7세 교황을 위해 포병으로 싸우며 금세공했던 벤베누토 첼리니의 활약 이래로. 산탄젤로는 두 번째로 예술의 방패가 되었다. 그 사이 가수 플로리아 토스카는 그곳에서 화가인 연인 마리오 카바라도시의 총살을 막지 못하고 자신도 투신했으니!

DSC04426.JPG 산탄젤로를 바라보는 강변의 노천 바

무솔리니 집권 당시 발탁되었고, 그를 위해 일했던 전력은 부카렐리에게 짐이었다. 그녀는 무솔리니가 전국의 미술 감독관을 소집했을 때 불응했지만, 무솔리니 정권의 문화 정책을 책임지던 주세페 보타이가 그녀의 뒤를 봐줬다. 또한 부카렐리는 무솔리니의 정부(情婦) 클라레타 페타치의 살롱에 출입했다. 누구보다 부카렐리를 지지했고, 서로 신뢰했으며 결국 30년의 교재 끝에 1963년 결혼에 이른 언론계 거물 파올로 모넬리(Paolo Monelli, 1891~1984)가 그녀의 혐의를 벗겨준다.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즘의 관계와 달리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와 파시즘은 동전의 양면일지언정 동일체는 아니었다. 파시스트 보타이에게 부카렐리의 선처를 부탁했던 절친 모넬리는 파시즘의 패악을 성찰하고 비판한 지식인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이다.

DSC04739.JPG 보르게세 정원에서 본 미술관 전경

전후 부카렐리는 통일과 독립의 낡은 이미지로 각인된 미술관을 모더니즘의 전당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1953년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를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가 열렸다. 당시 보수적인 이탈리아 화단에서 피카소는 ‘예술의 식인종’으로 불렸지만 부카렐리는 거침없었다. 이어 예산을 늘린 그녀는 프랑스 인상파 작품을 대거 사들였다. 칭찬받을 일일 법 하지만 공금 낭비로 의회 청문회에 소집된 것이 당시 세태였다. 1959년 알베르토 부리의 자루를 내걸었을 때 원로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마저 그녀를 “쓰레기의 아마조네스”라고 조롱했다.

DSC04584.JPG 키리코 (위), 이탈리아 문화궁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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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명품 펜디의 사옥으로 쓰이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문화궁전이 키리코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에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근현대미술관의 방 하나가 그런 키리코에게 할애되어 있다. 부카렐리의 진격은 1971년 개념 예술가 피에로 만초니의 전시에 이르렀을 때 극에 달했다. 대변을 깡통에 밀봉한 <예술가의 똥>은 만초니가 자기 작품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침이었다. 자신에게 피부가 벗겨지는 독을 준 시종을 내던지는 카노바의 헤라클레스 조각처럼 부카렐리도 세상을 향해 일갈했다. 아니 그보다는 세간티니의 그림 앞에 활을 메고 선 디아나 여신이나, 뱀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는 클레오파트라와 더 닮았을까? 그녀 덕에 저작권 때문에 지면에 미처 다 소개하지 못하는 이탈리아 현대미술이 고대와 고전의 짓누르는 압박감에 밀려 예까지 온 관람객에게 뜻밖의 신선한 공기를 맡게 한다.

DSC04613.JPG 클레오파트라

부카렐리는 그레타 가르보를 닮았다는 미모를 두고, 가르보가 자신을 닮았다고 답했다. 미술관 앞 30미터 남짓 짧은 길에 그녀 이름이 적혀 있다. 운전면허를 딴 최초의 이탈리아 여성 가운데 하나였던 그녀는 미술관 최상층과 보르게세 공원 건너편의 플로라 호텔 스위트룸을 오가며 집 없는 삶을 살았다. 달팽이인 나는 그녀가 부럽다. 다음 달엔 지중해 끝 몰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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