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사랑 (1)

앙드레 셰니에

by 정준호

2009년 졸저 <이젠하임 가는 길>에서


앙드레 셰니에(André Chénier)는 1762년에 태어나 프랑스 혁명 중인 1794년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의 임지인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프랑스로 건너와 사관학교를 다니기도 한 셰니에는 일찍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친구들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방문하는 등 견문을 넓힌다.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적을 다니고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읽으며 고전에 탐닉했다.

Beaux-Arts_de_Carcassonne_-_Portrait_d'André_Chénier_-_Suvée_-_Joconde04400001220.jpg 동료 수감자 조세프 브누아 쉬베가 그린 처형 직전의 셰니에

1765년에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온 그는 콜레주 드 나바르에서 그리스 고전을 공부했고, 어머니의 살롱에서 사귄 문인들 덕에 당대 문학에도 눈을 떴다. 그 모임에는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도 있었다. 다비드는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릴 때 독배를 마시는 철인을 그릴 계획이었지만, 셰니에가 좀 더 극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면을 조언하자 생각을 바꿨다.

David_-_The_Death_of_Socrates.jpg 자크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림에는 셰니에가 의도한 긴장감이 팽팽하다. “새로운 사상 위에 고전을 만들자”라는 그의 모토는 자신의 작풍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셰니에는 1787년 뤼제른 공(Anne-César de La Luzerne)이 영국 대사로 부임해 갈 때 그의 비서가 되어 런던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밀턴에 관심을 가진 것 외에 영국에서 큰 만족을 얻지는 못했다.

DSC01856.jpg 왜? 영국이 맘에 안 들어?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셰니에는 더 이상 런던에 머무를 수 없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온건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개혁파였다. 혁명은 점차 과격한 양상을 띠고 급기야 1792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투옥되어 국민공회에서 재판받는다. 이때 같은 부르봉 왕가이던 스페인은 국민공회 의원들의 매수를 시도했다. 셰니에는 이때 매수공작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생 라자르 감옥에 투옥되었다.

Beaux-Arts_de_Carcassonne_-_Appel_des_dernières_victimes_de_la_terreur_dans_la_prison_de_saint_Lazare.7,_9_thermidor_1794_-_Charles_Louis_MULLER.jpg <1794년 테르미도르 7일, 9일 생 라자르 감옥에서 테러의 마지막 희생자들이 호소하다>, 중앙이 셰니에. 샤를 루이 뮐러 그림, 프랑스 혁명 박물관

감옥 안에서도 그는 시작(詩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젊은 여자 죄수 La Jeune Captive>라는 시를 옷 보따리에 넣어 감옥 밖으로 보냈다. 이 시는 그가 감옥에서 만난 공작의 딸 에메 드 쿠아니(Aimée de Coigny)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25세의 꽃다운 나이였고, 그는 무자비하게 사형되어야 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처녀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이 시를 마지막으로 7월 4일 셰니에는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졌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이틀 뒤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면서 쿠아니는 단두대형을 면하고 풀려났다. 셰니에의 아쉬운 죽음과 달리, 한때 친구였던 화가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를 열렬히 지지하다가 그의 처형 뒤 투옥되었고, 다시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아 풀려났다. 쿠아니는 셰니에에게 받은 감화를 정열적인 소설 <알바르 Alvare>와 <회고록 Mémoires>에 표현했고, 1820년 세상을 떠났다.

Coigny-aimee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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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화가가 그린 <젊은 여자 죄수>와 아돌프 베르트뮐러가 그린 1797년의 쿠아니

생전에 발표된 셰니에의 시는 ‘당구장 Le jeu de Paume’과 ‘샤토비외의 스위스 경비병 찬가 Hymne au Suisses de Chateauvieux’ 단 두 편뿐이었다. 그가 비운에 세상을 떠난 뒤에 <목가 Bucoliques>, <풍자시 Iambes>와 같은 유고집이 출판되었다. 아직 고전주의 시대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성의 울타리를 넘어 감성의 가능성을 탐구한 셰니에의 시는 빅토르 위고와 같은 낭만주의 시인의 선구로 꼽히며, 그것이 개인적인 열정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시어로 녹여낸 덕분에 ‘예술을 위한 예술 L'Art pour l'art ’을 표방한 테오필 고티에와 후예들의 고답파(Parnasse) 운동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렇게 그의 불꽃 같았던 삶과 뒤에 남은 시는 고스란히 움베르토 조르다노(1867-1948)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Andrea Chénier>(1896)의 소재가 되었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다룬 빼어난 음악 가운데 하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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