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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an 26. 2019

바티칸 (2) - 그리스도는 사흘 동안 어디에?

죽음과 변용

내 여행의 목적은 하나이다. 음악이 탄생한 곳에 음악을 되돌려주기 위해서이다. 그것으로 그 장소와 음악 그리고 어쩌면 내가 완성된다. 내가 가는 곳에 음악이 있다. 2017년 4월 이탈리아에서 들었던 음악을 회고한다.


오늘날 유럽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상당수가 19세기 초 시민사회의 성숙과 더불어 탄생했다.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예술작품을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 대략 그 무렵이었다. 바티칸 궁전의 많은 미술품은 나폴레옹의 침공과 더불어 파리로 옮겨졌다가 그가 몰락한 뒤 빈 조약에 따라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수장품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1932년 새로운 건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피나코테카에는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그려진 성화들이 방마다 전시되어 있다. 포를리의 그림을 뒤로 한두 개의 방을 지나니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안내된다. 각기 아기 예수를 안은 모습과 대관식을 갖는 장면의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 사이에 승천하는 듯한 그리스도의 그림이 예사롭지 않은 빛을 뿜어낸다. 공중부양이지만 아직 승천하는 예수는 아니다.

두려워하는 바닥의 세 사람과 예수 옆의 두 노인으로 비춰볼 때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장면을 그린 것이다. 두 노인은 구약에 나오는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이다. 그리스도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바닥의 세 사람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다.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고 올 동안 깨어 있으라고 한 스승의 말을 따르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데 대한 부끄러움과 기도 뒤 그리스도의 봄에서 광채가 나는 것에 대한 놀라움으로 바닥에 붙어 있다.

하단의 군상은 한 아이에 시선이 집중된다. 간질에 걸렸다가 그리스도의 변용을 보고 치유된 어린 환자와 그 가족, 나머지 제자들이다. 서로 떨어진 에피소드를 아래 위로 이어 붙인 것이다.


베토벤은 교향곡 2번의 작곡과 더불어 오라토리오 <올리브 산의 그리스도>를 작곡했다. 들어보면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모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쓴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과 더불어 초기 베토벤을 완성하는 기초가 된 중요한 곡이다. 그리스도와 프로메테우스의 결합으로 ‘에로이카’, 곧 ‘영웅’이 완성되는 것이다.

<올리브 산의 그리스도> 가운데 할렐루야의 합창

그리스도의 변용이라는 말은 나라마다 조금씩 해석이 다르다. 영어(Transfiguration)는 한문처럼 ‘모습이 바뀌었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독일어(Verklärung)는 ‘정화되었다’는 식으로 풀이한다. 때문에 같은 곡이 종종 다른 제목으로 번역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가 <죽음과 변용Death and Transfiguration> 또는 <죽음과 정화Tod und Verklärung>로 소개된다. 음악은 죽음의 문턱에서 극도의 황홀경을 보고 돌아온 체험을 그린다.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 가운데 '변용'

라파엘로의 그림이 슈트라우스 곡의 후반을 그린 것이라면, 바로 옆방에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은 전반부 죽음의 묘사이다. 십자가 위에서 절명한 그리스도의 주검을 내려 입관하려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마리아가 망연자실한 가운데 요한과 니고데모가 시신을 안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의 다리를 든 니고데모의 시선은 그림 밖의 사람을 향하고 있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성서에는 그리스도가 이집트로 피신해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이야기는 실려 있지 않다. 나사렛에서 제자를 두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3년 동안 있었던 일이 공관복음을 통해 전한다. 그리고 마지막 사흘의 긴박한 흐름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무덤에 묻히고 부활할 때까지 사흘이다. 나는 그 사흘이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천국 여행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탄과 또는 아버지라 부른 분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전에 없는 치열한 대립을 벌이지 않았을까! 슈트라우스의 ‘죽음’ 부분처럼 말이다.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 가운데 '죽음'의 일부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활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라파엘로는 불과 37세 되던 해 자기 생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교황 레오 10세는 판테온에 시신을 안장하도록 했다. <변용>이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카라바조 또한 38세에 불길 같은 젊은 생을 마감했다. <그리스도의 입관>은 카라바조의 32세 때 작품이다. 베토벤도 32세 언저리에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면서 오라토리오 <올리브 산의 그리스도>를 완성했다. 슈트라우스는 채 26세가 되기 전에 <죽음과 변용>을 직접 초연했다. 이미 22세에 이탈리아를 다녀와 교향시 <이탈리아로부터>를 쓴 뒤였다. 의학이 훨씬 발달한 덕인지 나는 아직 죽음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탈리아로부터> 가운데 '푸니쿠니 푸니쿨라'를 인용한 '나폴리 사람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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