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개의 장면으로 돌아본 바티칸 시국
내 여행의 목적은 하나이다. 음악이 탄생한 곳에 음악을 되돌려주기 위해서이다. 그것으로 그 장소와 음악 그리고 어쩌면 내가 완성된다. 내가 가는 곳에 음악이 있다. 2017년 4월 이탈리아에서 들었던 음악을 회고한다.
직전에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고 전해부터 계속해서 이탈리아 반도 중부 내륙에 지진이 잇따랐지만, 안팎 따질 것 없이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를 만들어 내는 나라에서 온 탓인지 충격에 무디다.
로마 피우미치노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공항을 통해 이탈리아에 첫발을 디뎠다. 4월 초 저녁 공기는 조금은 찬듯하지만 잔인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달리는 차창 밖으로 눈에 익은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1942년 로마 만국 박람회를 앞두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조성한 행정 구역과 그 대표 건물 이탈리아 문명 궁전(Palazzo della Civiltà Italiana)이다. ‘사각 콜로세움’이라고 불리는 이 표식을 나는 여러 영화에서 보았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보카치오 70>, 줄리 테이머의 <티투스>, 그리고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이퀼리브리엄>이 대표적이다. 대개 무솔리니가 만든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느낌을 차용한 장면들에 등장한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희곡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가 원작인 <티투스>는 앤소니 홉킨스와 제시카 랭이 열연한 잔혹극으로 인상 깊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검은 천이 창문 밖으로 던져지던 이 건물을 지금은 잡화 브랜드 펜디가 사옥으로 쓰고 있다.
호텔에 여장을 푸니 어느덧 밤이 이슥하다. 이튿날 본격적인 일정을 위해 일찍 잠자리를 청하나 7시간의 벽을 그리 쉽게 넘을 수는 없다. 밤새 말똥말똥하다가 잠깐 눈을 붙인 듯한데 어느덧 창밖이 밝아온다. 여독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첫날은 많이 걸어야 한다. 바티칸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단체 패키지에 합류하는 것이다. 요즘엔 인터넷으로 현지에서 운영되는 한국인 가이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생면부지의 한국인들이 삼삼오오 약속된 장소에 모여든다. 능숙한 가이드를 따라 마치 새치기라도 하는 기분으로 바티칸에 입성했다. 개별로 입장했다면 두어 시간은 줄을 서야 했을 것이다. 톰 크루즈 같은 재주가 없다면 말이다.
이던 헌트 요원처럼 담을 넘지 않았다면 지상 최소국 바티칸 시국의 관광은 대개 피나코테카(Pinacoteca)에서 시작한다. 회화관이라는 뜻의 이 이탈리아어는 뮌헨의 미술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시스티나 예배당이나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 이미 내 눈동자의 조리개는 가장 크게 열렸다. 그리고 그 눈은 쏜살같이 귀를 재촉했다.
멜로초 다 포를리(1438-1494)가 그린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들>은 르네상스 바로크 음반에서 익히 보았던 것들이다. 조물주의 천지창조 뒤에 천사들이 연주했던 음악, 하이든이 쓴 것과 같았을까?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던 천사들의 노래, 바흐의 오라토리오를 떠올려야 할까?
해리 크리스토퍼스가 이끄는 ‘더 식스틴’이 포를리의 그림들을 쓴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의 음반으로 호평을 들었다. 마침 내가 찾았던 2017년이 몬테베르디 탄생 450주년이 되던 해였다. 몬테베르디야말로 바로크 음악의 시작이고, 오페라의 창시자이며, 바흐 이전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뽑을 사람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의 삶의 궤적은 바흐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포를리 또한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 선배이다. 바로크의 선구자 몬테베르디의 음반에 더없이 어울리는 그림인 셈이다.
복원을 거쳐 과거에 비해 더욱 밝고 선명해진 포를리의 천사들처럼 더 식스틴의 연주와 노래도 그 짜임새가 햇살을 머금은 듯하다.
천사들 바로 옆에 역시 포를리가 그린 또 다른 걸작 프레스코화(아래 맨 오른쪽)가 있다. 교황 식스투스 4세가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장면이다. 그 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중앙에 붉은 사제복을 입은 교황의 조카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다. 뒷날 교황 율리오 2세가 될 사람이다.
영원한 ‘벤허’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를 연기한 <고뇌와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라는 고전 영화가 있다. <제3의 사나이>의 캐럴 리드 감독이 어빙 스턴의 동명 전기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히긴스 교수로 영화팬 가슴에 각인된 렉스 해리슨이 율리오 2세 교황을 맡아 미켈란젤로인 헤스턴과 용호상박의 카리스마를 겨룬다.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를 불러 그 유명한 ‘천지창조’의 천장화를 그리게 한다. 그때 한 말이 걸작이다.
“내 숙부의 이름을 딴 이 시스티나 예배당이 마구간 같은 꼴이어야 되겠는가!”
시스티나라는 명칭이 바로 포를리의 그림에 나오는 식스투스 4세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 중요한 과업을 부여받은 미켈란젤로는 영광으로 알기는커녕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자신은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3차원을 다루는 조각가는 2차원을 다루는 화가를 하수로 본다. 사람 잘못 봤으니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것이다.
포를리의 <도서관장 임명화>에서 인물 못지않게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인테리어이다. 기둥을 휘어감은 상수리나무와 천장을 장식한 꽃잎, 그 사이의 섬세한 문양이 화려하다. 앞선 천사의 그림에서 바로크 전반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떠올렸다면 이런 반복된 인테리어 패턴은 바로크를 완성한 바흐의 스타일과 연결된다. 바흐의 눈부신 장식음과 반복 음형은 바로 이런 실내장식과 직물로 짠 벽지 문양을 묘사한 것이다. 그 전형이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의 하프시코드 카덴차이다. 바로 근대적인 피아노 협주곡의 효시로 꼽는 부분이다. 선율을 따라가는 것으로 곧 장식이 완성되는 느낌을 받게 되지 않는가!
아직 바티칸에 들어온 지 채 10분이 되지 않았다.
오늘날 유럽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상당수가 19세기 초 시민사회의 성숙과 더불어 탄생했다.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예술작품을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 대략 그 무렵이었다. 바티칸 궁전의 많은 미술품은 나폴레옹의 침공과 더불어 파리로 옮겨졌다가 그가 몰락한 뒤 빈 조약에 따라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수장품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1932년 새로운 건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피나코테카에는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그려진 성화들이 방마다 전시되어 있다. 포를리의 그림을 뒤로 한두 개의 방을 지나니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안내된다. 각기 아기 예수를 안은 모습과 대관식을 갖는 장면의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 사이에 승천하는 듯한 그리스도의 그림이 예사롭지 않은 빛을 뿜어낸다. 공중부양이지만 아직 승천하는 예수는 아니다.
두려워하는 바닥의 세 사람과 예수 옆의 두 노인으로 비춰볼 때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장면을 그린 것이다. 두 노인은 구약에 나오는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이다. 그리스도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바닥의 세 사람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다.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고 올 동안 깨어 있으라고 한 스승의 말을 따르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데 대한 부끄러움과 기도 뒤 그리스도의 봄에서 광채가 나는 것에 대한 놀라움으로 바닥에 붙어 있다.
하단의 군상은 한 아이에 시선이 집중된다. 간질에 걸렸다가 그리스도의 변용을 보고 치유된 어린 환자와 그 가족, 나머지 제자들이다. 서로 떨어진 에피소드를 아래 위로 이어 붙인 것이다.
베토벤은 교향곡 2번의 작곡과 더불어 오라토리오 <올리브 산의 그리스도>를 작곡했다. 들어보면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모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쓴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과 더불어 초기 베토벤을 완성하는 기초가 된 중요한 곡이다. 그리스도와 프로메테우스의 결합으로 ‘에로이카’, 곧 ‘영웅’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용이라는 말은 나라마다 조금씩 해석이 다르다. 영어(Transfiguration)는 한문처럼 ‘모습이 바뀌었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독일어(Verklärung)는 ‘정화되었다’는 식으로 풀이한다. 때문에 같은 곡이 종종 다른 제목으로 번역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가 <죽음과 변용Death and Transfiguration> 또는 <죽음과 정화Tod und Verklärung>로 소개된다. 제목 번역이 뭐가 되었든, 음악은 죽음의 문턱에서 본 극도의 황홀경을 그린다.
라파엘로의 그림이 슈트라우스 곡의 후반을 그린 것이라면, 바로 옆방에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은 전반부 죽음의 묘사이다. 십자가 위에서 절명한 그리스도의 주검을 내려 입관하려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마리아가 망연자실한 가운데 요한과 니고데모가 시신을 안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의 다리를 든 니고데모의 시선은 그림 밖의 사람을 향하고 있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성서는 아기 예수가 이집트로 피신해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이야기를 싣지 않았다. 이어 나사렛에서 제자를 두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3년의 행적이 공관복음을 통해 전한다. 그리고 마지막 사흘의 긴박한 흐름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무덤에 묻히고 부활할 때까지 사흘이다. 나는 그 사흘이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천국 여행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탄과 또는 아버지라 부른 분, 그리고 자기 자신과 전에 없는 치열한 대립을 벌이지 않았을까! 슈트라우스의 ‘죽음’ 부분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활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라파엘로는 불과 37세 되던 해 자기 생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교황 레오 10세는 판테온에 시신을 안장하도록 했다. <변용>이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카라바조 또한 38세에 불길 같은 젊은 생을 마감했다. <그리스도의 입관>은 카라바조의 32세 때 작품이다. 베토벤도 32세 언저리에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면서 오라토리오 <올리브 산의 그리스도>를 완성했다. 슈트라우스는 채 26세가 되기 전에 <죽음과 변용>을 직접 초연했다. 이미 22세에 이탈리아를 다녀와 교향시 <이탈리아로부터>를 쓴 뒤였다. 의학이 훨씬 발달한 덕인지 나는 아직 죽음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