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의 방
이제 양탄자와 지도가 걸린 회랑을 따라 그 유명한 ‘라파엘로의 방’으로 간다. 네 개의 방은 교황 율리오 2세가 기거하던 곳인데, 그 가운데 특히 ‘서명의 방’에 관람객이 붐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걸어 나오는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것은 이 그림이지만, 사실 ‘서명의 방’만 해도 4면의 벽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방이 세 개가 더 있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 ‘엘리오도루스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이 그것이다. 이 많은 그림을 하나씩 뜯어보자면 우리는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가기 전에 질식할지 모른다. 몇 가지만 들여다보자.
‘라파엘로의 방’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1500년 전후 교황들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먼저 스페인 발렌시아 태생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이다. 그의 세속 이름은 로드리고 보르자이다. 로드리고의 자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체사레와 루크레치아이다. 특히 체사레와 루크레치아는 서로를 아끼고 보듬은 오누이였다. 로드리고는 전임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하자 다른 추기경들을 매수해 교황에 오른다. 그 오른팔 역할을 체사레가 맡았다. 원래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였던 오르시니 추기경은 뒤에 독살되었고, 또 한 사람의 유력자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로마 밖으로 피신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직에 오른 과정도 순탄치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문제가 산적했다. 이탈리아가 아닌 스페인 태생이면서 유대인의 피가 섞였고, 성직자이면서 코르티산(매춘부)과 사이에 네 자녀를 두었으며, 교황에 오른 뒤에도 공공연히 줄리아 파르네세라는 젊은 유부녀를 정부(情婦)로 삼았기 때문에 수많은 정적들의 반발을 샀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아들 체사레로 하여금 권모술수를 아끼지 않게 했고, 루크레치아를 비롯한 자녀들을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알렉산데르 6세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1492년에 즉위해 1503년 선종할 때까지 재위했다. 교회력으로 1500년을 보냈던 뜻깊은 시기였다. 그는 바티칸에 자신의 처소(Appartamento Borgia)를 꾸미는 데 많은 돈을 들였다. 보르자 아파트에 프레스코화를 그린 사람은 핀투리키오이다. 우르비노 태생인 그는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나 브라만테와 같은 연배였다.
핀투리키오의 프레스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녀 카타리나의 논쟁>이다.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성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집트 총독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학자들을 보내 카타리나의 신앙을 돌리려 했지만, 도리어 학자들이 그녀에게 설복되어 기독교로 개종했을 만큼 성녀는 명민했다. 결국 그녀는 참수되어 뒷날 성인에 추대되었지만, 화가는 여기에 기지를 녹인다. 카라리나 성녀의 모델은 교황의 딸 루크레치아였고, 옥좌에 앉은 총독은 그녀의 오빠 체사레를 본떠 그렸다. 그들 사이에 터번을 쓴 사람은 남매와 절친했던 오토만 튀르크의 왕족 젬이다. 그는 술탄 계승에게 밀려난 뒤 교황에 의탁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중앙에 두고 새 교황의 선정을 바라는 마음을 성녀의 이야기에 녹인 것이다.
1503년 8월 알렉산데르 6세가 죽고, 피콜로미니 가문의 프란체스코가 비오 3세로 즉위하지만 그 또한 채 한 달이 못되어 죽으며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재임한 교황이 된다. 1503년 11월, 마침내 알렉산데르 6세의 정적이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율리오 2세로 새 교황에 선출된다.
율리오 2세는 보르자 아파트를 폐하고 그 곁에 새로운 처소를 꾸몄다. 그것이 바로 <아테네 학당>을 비롯한 라파엘로의 걸작이 있는 곳이다. 또한 율리오 2세는 숙부였던 식스투스 4세가 만든 예배당에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천장화를 그리게 하는 것이다.
로마에 온 어지간한 위인이라면 이 방을 들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귀공자와 같았던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유려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림에 찬탄을 금치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 가운데 분명 젊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초청을 받아 이탈리아에 온 헨델이 로마에 도착한 것이 1707년이었다. 라파엘로의 방이나 시스티나 천장화가 완성된 지 200년 뒤의 일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너무도 유명하니 여기서는 그에 가린 다른 걸작을 짚어본다. 그쪽이 오히려 우리가 들을 음악과 일맥상통한다. 먼저 <아테네 학당>의 오른쪽에 있는 <파르나소스>이다.
가운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아폴론 곁으로 아홉 뮤즈가 둘러서 있다. 그 다음으로 고금의 시인들이 신들의 낙원 파르나소스를 예찬하는 그림이다. 뮤즈 왼쪽에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호메로스이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아 나무 아래 소년에게 <일리아드> 또는 <오디세이아>를 받아쓰게 한다. 고개를 든 호메로스의 모습이 막 발굴된 라오콘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호메로스의 좌우로 <신곡>을 쓴 단테와 <에네이드>를 쓴 베르길리우스가 자리한다. 아폴론을 비롯해 시인 모두가 월계관을 쓰고 있다. 태양신이 사랑했지만 그를 피해 월계수가 된 다프네. 바로 파르나소스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다.
헨델이 이 시기에 쓴 칸타타 <아폴론과 다프네Apollo e Dafne>가 떠오른다. 40분 길이의 이 세속 칸타타는 앞으로 청년 헨델이 30년 동안 매진할 오페라의 시대를 압축한 것이다. 그 또한 라파엘로가 그랬듯이 종교와 신화, 그리고 역사 속 인물이 빚은 많은 이야기들을 음악으로 수놓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폴론은 앳된 목동 같은 모습이지만 헨델의 아폴론은 묵직한 베이스인 것인 재미있다. <파르나소스> 그림 속의 월계관과 월계수를 바르르 떨게 만들 음악이다.
<아테네 학당> 맞은편에는 황금 옥좌를 두고 성삼위일체가 나란히 있는 그림이 보인다. 그들 주위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셉 그리고 구약성서의 주인공들이 자리한다. 구름 아래 제단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노인들은 그레고리오 교황을 비롯한 로마의 교부들이다.
로마에 온 헨델이 콜론나 가문의 후원으로 쓴 첫 음악이 시편 110편에 붙인 성가곡 <주님께서 말씀하시니Dixit Dominus>이다. 프랑스 지휘자 마르크 밍콥스키가 지휘한 멋진 음반이 바로 라파엘로의 그림을 표지에 썼다.
3중 푸가의 마지막 가사,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이 바로 이 그림의 메시지인 것이다.
앞서 본 보르자 처소는 율리오 2세가 폐쇄했다가 19세기 말에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핀투리키오의 프레스코 가운데 <부활>에도 헨델이 쓴 오라토리오 <부활La resurrezione>이 오버랩된다. 1708년 부활절에 루스폴리 후작의 궁전에서 이 곡이 연주될 때 바이올린 파트는 당대 제일의 아르칸젤로 코렐리가 이끌었다. 헨델보다 서른두 살 위였던 코렐리는 후배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동갑내기 바흐가 이탈리아 양식을 배울 때 비발디를 모델로 했다면, 헨델은 코렐리를 따라갔다. 가장 두드러진 영향이 똑같이 작품 번호 6번으로 출판된 합주 협주곡이다. 오라토리오 <부활>의 초연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부른 마르게리타 두라스칸티는 앞으로 런던 시대까지 헨델의 주역이 될 메조소프라노였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클로파스의 마리아가 부르는 <부활>의 이중창이다. 앞서 본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입관> 가운데 두 팔을 쳐들고 오열하던 여인이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이다.
우리 시대 두라스칸티의 계승자인 체칠리아 바르톨리는 천사의 아리아 ‘열려라, 아베르누스의 문(門)Disserratevi, o porte d'Averno’을 부른다. 이 기막힌 문을 나서면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