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베데레의 토르소
<라오콘>을 거쳐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벨베데레 토르소>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문제작을 마주한다. 그야말로 몸통과 하지의 윗부분만 남은 그리스 대리석상이다. 짐승 가죽 위에 걸터앉은 것으로 보아 네메아의 사자를 떼려 잡은 헤라클레스로 보는 것이 중론이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아이아스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또한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부서진 곳의 복구를 명했다. 미켈란젤로는 이번에도 교황의 명을 피해 간다. 지금 상태로도 너무나 아름답다나.
대신 그는 뒷날 <최후의 심판>에 거죽뿐인 인간을 든 노인을 그릴 때 이 토르소를 뼈대로 삼았다. 나중에 밀라노에서 보겠지만, 미켈란젤로가 생애 마지막으로 작업한 <론다니니의 피에타> 또한 미완성(Non finito)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오히려 완성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19세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벨베데레의 토르소>를 역설적으로 사용했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고발한 판화 연작 <전쟁의 참상> 가운데 잔인하게 학살된 백성의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완성된 모습을 고집한 율리우스 2세와 그것을 거부한 미켈란젤로의 밀고 당기기 또한 음악사에 빈번한 비굣거리가 있다. 미완성 작품의 완성 욕구이다. 가령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아님에도 중간에 작곡을 멈춰 2악장까지만 완전한 모습이다. 스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아 후속 악장도 계획한 것으로 보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멈추고 말았다. 영국 음악학자 브라이언 뉴볼드는 <미완성 교향곡>의 3, 4악장뿐만 아니라 남아 있지 않은 교향곡 7번과 흔적만 있는 교향곡 10번까지 복원을 시도했다.
스위스 지휘자 마리오 벤차고도 남은 스케치와 가곡을 가지고 만든 3악장에 슈베르트가 같은 시기에 쓴 극부수음악 <로자문데>의 간주곡을 4악장으로 해서 완성판을 만들었다. <로자문데> 간주곡은 이 교향곡과 편성이 같을 뿐만 아니라 슈베르트의 모든 교향곡 피날레가 그렇듯이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슈베르트의 영향을 가장 강력하게 받은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인 안톤 브루크너 또한 마지막 아홉 번째 교향곡을 3악장까지만 쓰고 완성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4악장이 필요하다면 전에 쓴 자신의 <테 데움>을 연주해도 좋다고 유언을 남겼다. 종교 합창곡을 마지막에 넣는다면 베토벤의 선례에 따르는 것일뿐더러 신앙심이 깊었던 브루크너의 뜻에도 부합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여기에도 자기 이름을 걸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윌리엄 캐러건, 니콜라 사말레, 벤야민 군나르 코어스 등이 관심을 보인 끝에 영국 지휘자 대니얼 하딩과 사이먼 래틀이 완성판을 잇따라 공연했다.
사실 미완성 작품을 그대로 두지 못하는 사람은 영국에 많았다. 음악분야에서 대륙에 비해 낭만주의 이후 유독 열등감이 커진 탓일까? 그 뿌리는 엘가의 교향곡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엘가는 세 번째 교향곡에 착수했지만 방대한 스케치만 남긴 채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BBC가 이 곡의 완성에 관심을 보였고 엘가의 유족인 딸이 허락했지만, 첫 번째 시도는 신통찮은 결과물 때문에 무위로 돌아갔다. 1970년 대에 앤소니 페인이라는 학자가 재차 시도했을 때는 유족이 승인하지 않았다. 전례로 보아 어쭙잖은 일은 벌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인이 뜻을 굽히지 않고 완성된 악보를 내놓자, 유족도 마음을 돌렸다. 그러나 전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고, 초연은 1998년에 가서야 이뤄졌다. 앤드루 데이비스를 필두로, 콜린 데이비스, 리처드 히콕스와 같은 영국의 거장들이 차례로 전곡 연주와 녹음을 가졌다. BBC의 영향력이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다.
영국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가지고 맘대로 하는 것을 누가 말리겠느냐마는, 아마도 엘가 음악의 권위자 게오르크 숄티가 살았다면 한 마디 반대의 말을 했을 것이다. 숄티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10번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호없는 교향곡 <대지의 노래>까지 열 개의 교향곡을 남긴 말러의 미완성 곡은 엘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문제였다. 더욱이 남편의 음악에 집착이 많은 아내 알마는 그보다 무려 53년이나 더 살았다. 알마는 남편이 1악장과 3악장의 스케치만 남긴 교향곡 10번을 후배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완성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쇤베르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알마 또한 생각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며 확신을 갖지 못했다.
미국의 클린턴 카펜터, 독일의 한스 볼슐레거 등이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 BBC를 등에 업은 영국 음악학자 데릭 쿡의 압도적인 승리로 말러의 교향곡 10번이 완성을 보았다. 그러나 완성본의 연주를 놓고 말러 전문가는 완전히 둘로 나뉜다. 먼저 지휘한 사람으로 유진 오먼디, 쿠어트 잔더를링, 엘리아후 인발, 제임스 레바인, 미하엘 길렌, 사이먼 래틀, 리카르도 샤이, 대니얼 하딩, 데이비드 진먼, 야니크 네제 세갱이 있다. 대개 영국이나 신대륙을 중심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많다. 물론 대부분 말러 해석에서 빠트릴 수 없는 거장들이다.
그러나 완성판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쪽이 더욱 무게감 있다. 말러의 제자 브루노 발터와 그를 존경한 레너드 번스타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게오르크 숄티,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피에르 불레즈, 마이클 틸슨 토머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여기에 속한다.
데릭 쿡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라이트모티프 분석은 유명하다. 나흘 동안의 음악 드라마를 한 꺼풀 한 꺼풀 해부해 속살을 드러나게 하는 그의 연구는 분명 말러의 교향곡을 재구성한 작업과 맞닿아 있다. 쿡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말러가 티롤의 정상에서, 뉴욕의 호텔 창가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피트에서, 대서양 횡단 여객선에서 보았을 세상의 모습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작곡가들이 엄두를 내지 못한 작업을 음악학자인 그는 창작이 아닌 공부로 해낸 것이다. 어쩌면 정통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말러가 있었고, 지금 쿡의 버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밖에. 팔이 잘려나간 밀로의 비너스 상이 있다. 거기에 누군가 완벽한 비례의 양팔을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팔을 어찌할 것인가? 그와 같은 일이다.
그러나 <벨베데레의 토르소>는 애초에 완성되었던 것이 파괴된 것이니 미완성으로 남은 음악과는 다른 문제이다.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 13번이 좋은 대비가 될 것이다. 원곡은 여섯 개 악장으로 된 장대한 실내악이었다. 특히 마지막 ‘대푸가’는 베토벤 후기 예술의 결정체이다. 마치 바흐의 ‘음악의 헌정’ 가운데 ‘6성의 리체르카르’에 대한 오마주인 것처럼 베토벤 자신의 시대 양식을 초월한다. 그런데 초연 뒤에 이 ‘대푸가’가 너무 어렵다는 불평이 들리자 베토벤은 뜻밖에 좀 더 가볍고 짧은 새 피날레를 다시 쓰고, ‘대푸가’는 따로 떼어내 출판했다.
베토벤 사후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베토벤의 원뜻대로 ‘대푸가’를 마지막에 연주할 경우, 새로 쓴 피날레가 무색해진다. 이 또한 그냥 버릴 수 없이 아름다운 종결이다. 그렇다고 ‘대푸가’를 연주하고 또 피날레를 연주하면 작품 전체의 짜임새를 어지럽힌다. 어떤 학자는 피날레까지 연주하고 ‘대푸가’를 마지막에 두는 순서를 제안한다. 답이 없다. <벨베데레의 토르소> 다음 방의 아폴로와 아홉 뮤즈라도 갸우뚱할 것이다. 베토벤은 왜 미켈란젤로처럼 단호하지 못했던가! 그러나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고민인가! 여기는 바티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