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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Feb 07. 2019

바로크 미술의 보고 갈레리아 보르게세

베르니니의 걸작들

아담한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이만큼 놀라운 미술관이 또 있을까?


보르게세 미술관은 넓은 보르게세 공원의 동쪽 끝에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공원 남쪽 끝에는 메디치 빌라가 자리한다. 17세기 초 교황 바오로 5세의 조카였던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이 지은 것이다. 원래 포도밭이던 정원은 영국식 조경의 정원으로 거듭났고, 빌라에는 추기경이 후원했던 미켈란젤로 카라바조(1573-1610)의 그림과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의 조각이 들어찼다.


르네상스 시대 조각은 미켈란젤로, 그림은 라파엘로라면, 뒤이은 바로크 시대 조각은 베르니니, 그림은 카라바조(그 또한 미켈란젤로이다)였다. 그러니 보르게세 미술관은 바티칸 미술관의 후속편인 셈이다. 특히 보르게세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는 베르니니의 조각들이다.

돌 하나에 국운을 건 소년이라니!

골리앗을 노려보며 돌팔매를 던지기 직전의 다윗은 비장미가 대리석을 뚫고 나올 기세이다. 시편의 대부분이 다윗과 솔로몬이 지은 것이라지만, 의외로 다윗이 주인공인 음악은 많지 않다. 앙투안 샤르팡티에의 <다윗과 요나단David et Jonathas>,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오라토리오 <다윗 왕Le Roi David>, 카를 닐센의 <사울과 다윗Saul og David> 따위가 있지만 다윗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헨델의 작품에 비할 바가 못된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사울Saul> 가운데 군중이 다윗을 예찬하는 신포니아가 아름답다.

글라인드본의 무용수들이 신났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두 딸 미칼과 메랍, 사령관 아브넬이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사울은 다윗에게 곁에 남아 메랍과 혼인을 하라고 명한다. 메랍은 미천한 태생의 영웅을 비웃는 반면, 미칼은 그를 사모한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우정을 맹세한다.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하며 그를 사울보다 높이 받든다. 사울은 질투심에 불타고 왕관을 뺏길까 두려워한다. 그는 아들 요나단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하지만 아들은 듣지 않는다. 요나단은 다윗의 용감한 행동 덕에 백성들이 골리앗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사울은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와 딸 미칼을 혼인시킨다. 그러나 이내 그를 전장에 내보내며 블레셋인들 손에 죽기를 기대한다.


다윗이 다시 한번 승리하고 돌아오자 사울은 창으로 그를 죽이려 한다. 다윗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돌보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지만 미칼의 부탁대로 몸을 피한다. ‘그런 도도한 미모는 반감을 부르네’(Such haughty beauty rather move)에서 메랍의 차가움을 흠잡는 다윗의 음성은 이미 “부드러운 음성과 친절한 미소”를 가진 미칼을 향해 있다.

헨델의 카운터테너 가운데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이 아닌가 싶다

베르니니의 <다윗상>은 역시 보르게세에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과 쌍을 이룬다. 골리앗의 머리를 베어 든 소년을 그린 것이다. 마이클 온다체의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 가운데 데이비드 카라바조라는 인물이 나온다. 카라바조는 캐나다 태생의 절도범이지만 전쟁 중에 활약한다. 연합군은 이런 사람들을 스파이로 이용했다. 카라바조는 여주인공 해나 아버지의 친구이다. 그는 피렌체에서 이탈리아 군의 고문을 받아 엄지손가락을 잃어 붕대로 감고 다닌다. 때문에 자신을 고문한 라누치오 토마소니라는 사람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 작가는 1606년 미켈란젤로 카라바조가 결투에서 죽인 라누치오를 여기에 끌어 오는 것이다.

아서왕이 카라바조이고 션 빈이 라누치오이다. 카라바조는 라누치오를, 라누치오는 틸다 스윈턴을 좋아한다.

그러면서 영국인 환자의 말을 빌어 카라바조가 그린 <다윗> 그림의 의미를 설명한다.


“카라바조가 인생 말년에 그린 그림이 있죠.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 그림 속에서 젊은 전사는 쭉 뻗은 팔로 짓밟히고 늙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어요. 하지만 그 그림에서 진정으로 슬픈 건 그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다윗의 얼굴이 젊은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하고 골리앗은 더 늙은 카라바조, 곧 그 그림을 그렸을 때 그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라고 추정하지요. 젊음이 쭉 뻗은 팔에 매달린 노년을 판결한 겁니다. 한 인간의 필멸성을 판단하는 거죠.”
내가 만든 프레지의 한 컷이다

다음 음악을 들으러 그 유명한 <아폴론과 다프네>(1625)가 있는 옆방으로 간다. 미켈란젤로의 웅장함에 놀란 사람도 이미 베르니니의 섬세함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다. 베르니니는 그녀의 몸이 수목(樹木)이 되는 찰나를 포착했다.


태양신 아폴로의 업신여김을 받은 에로스는 아폴로에게 황금화살을, 물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인 님프 다프네에게 납화살을 쏜다. 다프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아폴로, 그러나 다프네는 아폴로의 사랑에 냉대한다. 집요한 아폴로가 다프네를 잡으려던 순간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름다움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나무껍질로 덮이고 팔은 가지가 머리카락은 잎이 된다. 나무로 변한 다프네를 끌어안은 아폴로는 자신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자는 머리에 월계관을 쓰게 될 것이라며 애틋한 마음을 달랜다.


이 이야기는 1598년 피렌체 카메라타에서 만든 첫 오페라의 소재이다. 그러나 자코포 페리가 쓴 음악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이 또한 헨델의 세속 칸타타 <아폴로와 다프네Apollo e Dafne>(1710)로 시작해야 한다.

나 잡지 마라
귀염둥이, 잡았다

헨델이 이탈리아에 머물 당시에 쓴 작품이므로 베르니니의 조각으로부터 받은 인상이 생생했을 것이다. 다프네가 아폴론의 찬양을 마다하고 자유를 사랑한다며 마음을 거부한다.

소프라노 안나 프로하스카의 음반 제목 좀 보아!: <마법에 걸린 숲>

도망치는 다프네를 향해 발길을 재촉하는 아폴론. 그를 붙잡는 순간, 바로 베르니니의 조각을 음악으로 그린 부분이다.

베이스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 이름은 천사장인데 모습은 카사노바일세

아폴론은 이내 월계수를 찬양하며 자신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자의 머리에 그 잎으로 만든 관을 씌울 것임을 약속한다. 나는 음식에서 잡내를 없애기 위해 쓴 월계수 잎이 나올 때마다 아폴론의 노여움을 사지나 않을지 걱정하곤 한다.

헨델에 비견할 또 다른 <다프네>(1938)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이다. 그야말로 피렌체 동아리에서 시작된 이 장르의 클라이맥스라 할 만하다. 요제프 그레고어가 슈트라우스를 위해 쓴 대본에는 아폴론에 앞서 다프네를 사랑한 양치기도 등장한다. 앞서 헨델이 그린 ‘변신’ 장면이 아폴론의 입장에서 본 숨 가쁜 것이라면 슈트라우스의 ‘변신’은 다프네가 부르는 황홀경이다. 그녀는 “갈게요.. 갈게요, 녹색 형제님들Ich komme... Ich komme grünende Brüder”이라고 노래한다.

슬로바키아 태생의 소프라노 루치아 포프
사비니 여인의 납치, 아니 플루토에게 납치당하는 프로세르피나이다

이만하면 이 방을 떠나도 아쉽지 않고 생각하기 무섭게 다음 방 정중앙에 있는 베르니니의 절품에 또 한 번 아찔함을 느낀다.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의 모습이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1934년에 작곡한 발레 <페르세포네>를 위해 대본을 쓴 사람은 앙드레 지드이다. 그러나 지드의 가사는 베르니니의 우악스러운 납치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페르세포네가 저승에 내려가는 제1막의 내용은 이렇다.


사제 에우몰푸스가 대지의 여신이자 페르세포네의 어머니 데메테르를 불러내는 동안 막이 올라가면 해안 풀밭이 나타난다. 한쪽으로 저승으로 가는 바윗길이 나 있다. 여신은 님프들에게 딸을 보호하도록 맡긴다. 님프들은 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녀들은 초원에 자라고 있는 꽃을 예찬하지만 페르세포네에게 수선화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수선화의 향을 맡으면 저승의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선화를 향해 몸을 숙인 페르세포네는 절망적으로 방황하는 망령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는 꽃을 꺾는다. 에우몰푸스는 망령들을 향한 동정심은 그녀를 저승의 신 플루토의 아내로 만들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제 그녀는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 위에 군림한다. 페르세포네는 스스로 저승에 내려간다.
무대 연출의 기린아 마이클 커리의 최신작: 평창 올림픽의 여러 장면도 그의 솜씨이다

페르세포네가 저승에 가게 된 사정이야 어떻든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쥔 하데스의 손에는 혈류가 흐르는 듯하다.

맙소사!

보르게세 미술관에는 이들 작품에 비해 덜 알려진, 그러나 나에게는 좀 더 와 닿는 베르니니의 조각이 있다. <아에네아스, 안키세스, 아스카니우스> 삼부자상이다. 트로이가 멸망하는 순간, 아에네아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고, 아들 아스카니우스를 뒤세운 채 탈출하는 장면이다. 앞서 카라바조가 다윗과 골리앗에 자신의 유년과 노년을 대입한 것처럼 베르니니 또한 이 삼부자상에 사람의 세 때를 그려 넣은 것이 아닐까? 자연히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낸 문제가 떠오른다. 어려서는 네 발로, 커서는 두 발로, 늙어서는 세 발로 걷는 존재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베르니니가 이 삼부자를 겨우 스무 살 무렵에 완성했다는 점이다(클림트가 <여인의 세 시기>를 그린 것은 40대였다).

나에게 남은 수수께끼는 스핑크스의 문제보다 더 어렵다. 아들과 아버지와 그 손자를 동시에 그린 음악이 무엇일까? 삼대를 그린 서사적인 작품으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보탄, 지그문트, 지크프리트)나 주세페 베르디의 <돈 카를로스>(카를로스 5세, 펠리페 2세, 돈 카를로스)와 같은 작품이 있지만 그런 연결은 성에 차지 않는다.


각기 다른 인생이 나열된 것 말고 동시다발의 삶이 하나의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뭔가가 없을까? 헨델의 또 다른 오라토리오 <쾌활한 사람, 심각한 사람, 온화한 사람L'Allegro, il Penseroso ed il Moderato>가 바로 그런 것이다. 헨델은 존 밀턴이 지은 두 시 <쾌활한 사람>과 <심각한 사람>을 바탕으로, 자신의 동료 찰스 제넨스에게 그 둘을 합친 중용의 인물에 대한 시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어느 누구도 한쪽으로만 치우친 삶을 살 수 없고, 그렇다고 완벽한 중용의 삶을 사는 사람 또한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인간이 시간을 거스르거나 건너뛸 수 없는 것처럼 세 가지 성격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어우러질 때 하나의 인격이 탄생한다. 이렇게 ‘세’ 예술가의 협업으로 목가적인 전원극이 완성된 것이다. 마크 모리스와 그의 무용수들이 춘 춤은 그 결정판이다. 

단순한 동작으로 비범한 순간을 만드는 것이 마크 모리스의 스타일이다

동영상에 붙은 곡은 <온화한 사람>으로부터 가져온 노래 ‘아침이 밤에 살금살금 다가가As Steals the Morn’이다. 왜 아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로부터 가져온 구절이다.

아침이 밤에 살금살금 다가가
어둠을 녹여버리듯이
진실이 매혹의 환상을 녹이네
깨어난 이성이 정신을 에워싼 
안개를 쫓아버리는구나
지성의 날이 되살아나네

이제 불타는 트로이를 뒤로 한 삼부자의 무거운 발걸음이 좀 가벼워졌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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