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휴일
로마에서 탄생한 작품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아닐까? 로마에 직접 와본 사람보다 영화로 로마를 본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레비 분수나, 진실의 입과 같은 장소는 <로마의 휴일>을 통해 더욱 명소가 되었다. 또 하나의 명장면이 만들어진 곳으로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에서 내가 들을 음악도 놀라운 것들이다.
유럽 어느 나라의 공주인 오드리 헵번은 국빈으로 로마를 방문한 도중에 일탈을 꾀한다. 답답한 일상을 피해 심야에 궁을 빠져나온 공주는 길에서 잠이 들고 만다. 로마 특파원으로 일하던 기자 그레고리 펙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우여곡절 끝에 자기 집에 데려온다. 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그녀가 공주인 줄 모르는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침대가 아닌 카우치에서 자라고 한 뒤 파자마를 내준다. 여전히 잠꼬대만 하던 공주가 ‘카우치’라는 말을 듣고 시구를 인용한다.
“아레투사가 아크로세로니안 산에 있는 그녀의 눈 덮인 카우치에서 일어섰다”
키츠의 시라고 우기는 공주에게 기자는 셸리라고 맞선다. 공주는 키츠라는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아레투사의 시를 쓴 사람은 퍼시 비시 셸리이다.
아레투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님프이다. 아르테미스의 시녀였던 그녀는 처녀로 남고 싶어 강의 신 알페이오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샘물로 변해 땅으로 스며든다. 폴란드 작곡가 카롤 시마놉스키가 1915년에 쓴 바이올린 소나타 ‘전설’의 첫 악장이 바로 ‘아레투사의 샘’이다. 섬세한 시정과 몽환적인 반음계로 아레투사 신화를 묘사했다. 공주가 기자에게 딴마음 품지 말라는 경고로 읊은 시일까?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차리고 집을 나선 공주는 ‘헵번 스타일’로 머리를 자르고는 스페인 광장 계단에 앉아 젤라토를 먹는다. 지나가다 마주친 척 그녀 앞에 나타난 기자, 그는 아침 뉴스에서 간밤에 실종된 공주가 바로 자기 집에서 잔 아레투사임을 알고는 특종을 독점하려고 접근한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계단 바로 옆에 바로 키츠 셸리 기념관(Keats–Shelley Memorial House)이 있다. 25세의 키츠가 결핵을 치료하려고 로마에 왔다가 죽은 집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제인 캠피언 감독의 영화 <브라이트 스타Bright Star>가 떠오른다. 벤 위쇼가 키츠를 맡고 애니 코니시가 연인 파니 브론을 연기한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이다.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은 키츠의 운구 행렬이 스페인 광장을 지나갔음을 알았을까?
영국 문학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키츠이지만 그의 시에 붙인 음악은 뜻밖에 많지 않다. 19세기 영국 음악이 빈궁했던 탓이리라. 영국에 슈베르트나 슈만이 있었더라면 키츠를 내버려뒀을 리 없다. 그 가운데 가장 언급할 만한 것은 벤저민 브리튼의 <테너와 호른 현을 위한 세레나데> 가운데 한 악장이다. 모두 여덟 개 악장으로 된 이 곡은 영국의 명 호른 주자 데니스 브레인과 브리튼의 친구인 테너 피터 피어스를 위한 작품이다.
Composer: Benjamin Britten (1913-1976)
Serenade for Tenor, Horn and Strings, op. 31
1) "Prologue" (horn solo) 호른 독주의 “프롤로그”
2) "Pastoral", a setting of The Evening Quatrains by Charles Cotton (1630–1687) 찰스 커튼의 저녁 4행시에 붙인 ‘전원’
3) "Nocturne", Blow, bugle, blow by Alfred, Lord Tennyson (1809–1892) 알프레드 테니슨의 불어라 나팔 불어라에 붙인 녹턴
4) "Elegy", The Sick Rose by William Blake (1757–1827) 윌리엄 블레이크의 병든 장미에 붙인 비가
5) "Dirge", the anonymous Lyke-Wake Dirge (fifteenth century). 15세기의 무명작가가 쓴 라이크 웨이크 장송곡
6) "Hymn", Hymn to Diana by Ben Jonson (1572–1637) 벤 존슨의 다이애나 여신에게 바치는 송가
7) "Sonnet", To Sleep by John Keats (1795–1821) 존 키츠의 잠에게 바치는 소네트
8) "Epilogue" (horn solo; reprise of Prologue, played offstage) 무대 뒤 호른이 프롤로그를 반복하는 에필로그
O soft embalmer of the still midnight,
Shutting with careful fingers and benign,
Our gloom-pleas'd eyes, embower'd from the light,
Enshaded in forgetfulness divine:
O soothest Sleep! if so it please thee, close
In midst of this thine hymn, my willing eyes,
Or wait the "Amen," ere thy poppy throws
Around my bed its lulling charities.
Then save me, or the passed day will shine
Upon my pillow, breeding many woes,--
Save me from curious Conscience, that still hoards
Its strength for darkness, burrowing like a mole;
Turn the key deftly in the oiled wards,
And seal the hushed Casket of my Soul.
시작부터 ‘embalmer’를 마땅히 옮길 재주가 없어서 번역은 포기했다. 밤에게 자신의 잠든 육체를 맡기는 시인은 마지막에 “기름칠 한 자물통을 열쇠로 돌려 조용한 영혼의 관을 봉인해 달라”라고 청한다. 뒷일은 테너 이언 보스트리지에게 맡긴다.
영화에서 키츠가 파니에게 시를 읽어주고, 파니가 암송하는 모든 시가 곧 노래와 같다. 그런데 그 가운데 또 하나 기억할 만한 음악이 나온다. 키츠는 문학 살롱에서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그랑 파르티타>를 아카펠라로 노래한다.
키츠가 또 한 번 중요하게 언급되는 영화는 데이비드 린의 <밀회Brief Encounter>이다. 낱말 퀴즈를 풀던 남편이 아내에게 키츠의 시에 나오는 알파벳 일곱 개로 된 단어를 묻는다. 아내는 ‘로맨스Romance’라는 답을 알려주며 라디오를 켠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로맨스라는 단어 하나로 암시할 뿐이지만 사실 이 시는 영화 전체의 내용과 키츠 자신의 마음을 함축한다. 이번에는 애써 옮겨보았다.
나 죽으면 어쩌나 두려울 때
내 펜이 충만한 머릿속을 다 추수하기도 전에 죽으면
높은 책 더미가 글로 가득 찬 곳간인 듯
잘 영근 낟알을 갈무리하기 전에 죽는다면
그리고 별빛 가득한 밤의 얼굴에서
진정한 로맨스의 어렴풋한 상징을 보고
더 이상 살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이 들 때
마법과 같은 손으로 그 흔적을
다 베끼지 못하고 삶을 마치면 어쩌나
그리고 한 동안 만났던 아름다운 그대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할 때
마법의 힘도 즐겁지 않으면 어쩌나
지각없는 사랑의 힘도
그때는 이 넓은 세상 끝에 홀로 서서 생각합니다
사랑과 명예가 의미 없는 것으로 잠길 때까지
졸역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키츠를 완벽하게 음악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영화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준다.
스페인 광장 한쪽에 있는 기념관에 키츠와 함께 이름을 건 셸리. 키츠보다 세 살 많은 그도 키츠가 죽은 이듬해에 이탈리아 북부 해안에서 배를 타다가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그의 시신도 로마로 옮겨와 키츠가 묻힌 개신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셸리의 시 가운데는 엘가가 작곡한 것도 있다. ‘달님의 부드러운 빛처럼As the moon's soft splendor’을 ‘달빛에In Moonlight’라는 제목의 노래로 썼는데, 내가 번역에 자신이 없는 줄 알고 마침 핑커스 주커먼이 무언가로 연주해 주었다.
이만하면 스페인 광장의 ‘바르카치아 분수’에 음악이 그치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르카치아는 배(船)를 뜻하며, 이 분수는 베르니니 부자(父子)가 교황의 명으로 제작한 것이다. 키츠는 병석에서 이 분수의 물소리를 듣고 친구 세번에게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써달라고 부탁했다.
“여기 누워 있다. 그의 이름을 물로 적은 사람이”
Here lies one whose name was writ in water
무명 시인으로 남고 싶었을까! 키츠의 묘인 줄 몰랐더라도 이런 문재(文材)의 주인공이라면 누구인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것은 시나리오 작가 달턴 트럼보가 <로마의 휴일>(1953)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쿠스>(1960)의 대본도 썼다는 점이다. 심지어 <스파르타쿠스>를 작업하던 중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오토 플레민저 감독을 위해 <대탈출Exodus>의 스크립트도 썼다. 그가 이탈리아에 갈 만한 시간이 없이 할리우드에서 일만 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키츠도 촌구석에서 대부분 그의 시를 썼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17세기 이래 스페인 대사관이 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