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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Feb 10. 2019

속마음을 어찌 그릴 것인가?

미켈란젤로 카라바조와 키아로스쿠로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대성당과 프랑스 생 루이 성당에서 카라바조의 걸작을 만났다.


원근법. 평면에 멀고 가까운 것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인체 비례. 머리와 몸통, 사지의 길이가 서로 일정한 비례를 이룬다는 말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이렇게 겉모습을 묘사하는 방법이 완성되었다. 그다음은 마음이다. 속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남았다.

명상에 잠긴 철학자, 또는 토비트와 안나

렘브란트라는 걸출한 화가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오묘한 감동을 뭐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 갈색의 신비로움을 이르는 말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열심히 외웠다. 말 그대로 명암법이지만, 원근법처럼 그 의미가 명확하게 와 닿지는 않았다. ‘키아로스쿠로’는 ‘키아레’와 ‘오스쿠로’를 결합한 것이다. ‘키아레’가 ‘밝은’이고 ‘오스쿠로’는 ‘어두운’이다. 영어의 ‘clear’와 ‘obscure’를 떠올리면 좀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원근법에 비해 명암법이 좀 생소했던 까닭은 아마도 내가 어두움에 그리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대도시에서 태어나 가끔씩 전기가 나갔을 때 양초를 밝혔지만, 심지를 가지고 노는 것이 채 지겨워지기 전에 다시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야간 민방공 훈련 때 강요되었던 등화관제는 그 시절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진정한 암흑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탈대로 다 타시오

어쩌면 내가 경험한 가장 인상적인 키아로스쿠로는 텔레비전 화면 설정이었다. 명도(light)와 채도(contrast)를 올렸다 내렸다 함에 따라 화면이 요술을 부렸다. 바로크 양식을 연 화가 미켈란젤로 카라바조가 했던 작업과 같다. 어둠과 밝음의 대비를 강조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카라바조의 키아로스쿠로는 렘브란트에게 이어져 바로크 회화의 큰 획을 이룬다.


명암법을 이르는 또 하나의 용어가 ‘테네브리즘Tenebrism’이다. ‘어둠’을 뜻하는 라틴어 ‘테네브레Tenebrae’에서 온 말이다. 테네브레는 또한 가톨릭 의식이기도 하다. 부활절 직전 사흘, 그러니까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이 3일을 위한 의식으로 매 전날 저녁에 행해진다. 구약의 예레미야서와 시편의 여러 구절들을 읽고 부르는 의식인데, 스페인 다성음악 대가인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1548-1611)와 카를로 제수알도(1566-1613)에 의해 융성했다.


그것이 프랑스에서 ‘궁정가요Air de cour’의 전통과 결합해 ‘르송 테네브르Leçons de ténèbres’라는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달했다. 르송은 영어의 레슨과 같은 말인데, 사실은 라틴어 ‘독서Lectio’를 잘못 옮긴 것이다. 그러니 원뜻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르송 테네브르는 ‘어둠 속의 독서’쯤이 된다. 테네브레가 행해지는 동안 성당 안에 켜 두었던 촛불을 하나씩 하나씩 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뜻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내면을 성찰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어둠이 극에 달했을 때 마침내 부활이 오는 것이다.


(헉헉,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프랑스 르송 테네브레의 대가는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1643-1704)와 프랑수아 쿠프랭(1668-1733)이었다. 쿠프랭의 ‘성 수요일을 위한 르송 테네브레Leçons de ténèbres pour le mercredi saint’ 가운데 한 부분은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Tous les matins du monde>에 사용되었는데, 짧지만 테네브레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파스칼 키냐르의 원작을 읽어보자

두 고음 성악과 기악 반주가 연주하는 가운데 소년 복사가 성당의 촛불을 하나씩 끈다. 주인공 앞에 젊어서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나타난다. 그의 눈에 아내는 젊을 적 모습 그대로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화채를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한다. 도착해서도 내리기를 거부하던 그녀, 강가에서 배에 오르는 그녀에게 남편은 세월도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고개를 들었을 때 아내는 사라지고 없다. 레테의 강을 건너 저승으로 내려간 것이다.


맨 처음 바티칸의 피나코테카에서 <그리스도의 입관>을, 보르게세 미술관에서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과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을 보았으니, 이제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대성당(Basilica Parrocchiale Santa Maria del Popolo)과 프랑스 생 루이 성당(San Luigi dei Francesi)에서 카라바조의 걸작을 만날 차례이다. 보르게세 공원의 서쪽 입구를 나가자마자 포폴로 광장과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가 보인다. 포폴로는 국민, 인민이라는 뜻이다.

성당 안 체라시 예배당에 묵직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중앙은 안니발레 카라치가 그린 <성모승천>이고 좌우는 차례로 카라바조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성 베드로>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개종한 성 바오로>이다. 교황의 측근이었던 체라시 주교가 당대 로마 제일의 두 화가에게 이 그림들을 위촉했다. 카라치도 뛰어났지만 카라바조를 넘어설 사람은 없었다. 카라바조는 어둠에 빛을 끌어들이는 재주를 가졌다.

아이코, 젊은 양반 괜찮소?

베드로는 감히 그리스도와 같은 식으로 죽을 수 없다고 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리스도의 입관>에 나온 니고데모처럼 이번에도 베드로의 시선은 그림 밖을 향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마치 반대편에 있는, 말에서 떨어진 바오로 성인을 바라보는 듯하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아니고 뭣이겠는가!


베드로가 죄를 벗고 천국에 가는 모습은 말러의 교향곡 3번과 4번에서 차례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3번의 5악장에서 어린이와 여성 합창, 알토 독창이 부르는 노래이다.

세 천사가 사랑스러운 노래를 불렀다. 축복이 가득한 기쁨으로 하늘에 울렸다. 그들은 즐겁게 외쳤다. 베드로가 죄를 벗었다고! 그리고 주 예수께서 식탁에 앉아 열두 제자들과 저녁을 드실 때,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왜 여기 서 있느냐? 내가 보니, 너는 울고 있구나!”

“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주님? 저는 십계를 범했습니다! 방황하며 씁쓸하게 웁니다! 오시어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네가 십계를 어겼다면,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드려라! 언제나 주님만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천상의 기쁨을 얻을 것이다.”

천상의 기쁨은 축복의 도시이다, 다함이 없는 천상의 기쁨! 천상의 기쁨이 베드로에게 허락되었네, 예수를 통해, 그리고 영원한 축복을 구하는 모든 인류에게. 
에사 페카 나빌레라

이어서 교향곡 4번의 4악장은 천상의 삶이다.

우리는 천국의 삶을 즐깁니다.
지상 누구도 즐기지 못한
세상의 소란도 들리지 않고
모두 다 크나큰 평화 속에 있는 삶을.
우리는 천사의 삶을 따라
그 옆에서 즐거이 시간을 보냅니다.
춤추며 뛰어다니고
깡총거리고 노래하는 우리를
베드로 성인이 지켜봅니다. 

(후략)
노래도 일단 거기까지만 듣기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진 로마인 사울은 깨달음을 얻고 이름을 바오로라 바꾼 뒤 기독교로 개종한다. 유대인이지만 개신교로 개종한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6)이 오라토리오 <파울루스Paulus>에 이 장면을 빠뜨리지 않았다.

테너 독창: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합창: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테너 독창: 그가 말했다.
사울: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테너 독창: 그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합창: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의 예수이다. (여기서 빛이 비친다)
테너 독창: 그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사울: 주님, 제게 무슨 일을 하게 하시렵니까?
테너 독창: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합창: 일어나, 성안으로 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줄 것이다. (사도행전 9: 3-6)
합창: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이사야서 60:1, 2)
합창: 일어나라 외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성벽 위의 야경꾼이다. 일어나라, 예루살렘아! 일어나라! 신랑이 온다! 일어나, 등불을 챙겨라! 할렐루야! 깨어나라! 그분의 나라가 가까이 있다. 주님을 만나러 앞서가자! (마태오 25: 4)
바흐를 인용한 멘델스존


빛이 적을 때 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판테온 근처 프랑스 생 루이 성당은 겉모습은 추레하지만 내부는 별로 화려하다. 이름에서 보듯 프랑스 교구에 속한 교회이다. 프랑스의 앙리 2세와 결혼한 카트린 드 메디치가 로마에 지은 데서 유래한다. 카라바조가 성당을 위해 마테오 성인의 행적을 세 폭으로 그린 것이 그의 나이 채 서른도 되기 전이었다. 왼쪽부터 <마테오의 부름>, <마태오의 깨달음>, <마태오의 순교>가 걸려 있다. 특히 <마태오의 부름>은 카라바조의 출세작이자 그의 그림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것이다.

- 네가 마태오이냐? - 얘는 알페오의 아들 레비인데요! - 그냥 마태오로 해라!

창문에서 비치기 시작한 빛은 마치 그 아래 그리스도가 내뿜는 후광과 같다. 그리스도가 손을 뻗어 가리키는 사람이 마태오일 것이다. 오랫동안 수염 난 가운데 노인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점차 고개를 숙이고 돈을 세고 있는 젊은이가 세리(稅吏, 요술공주가  아니다)였던 마태오라는 해석이 힘을 얻었다. 하늘나라와 가장 멀 것 같았던 그가 그리스도의 최측근이 되는 순간을 이보다 극적으로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 아서라!: 깍지 끼신 예수, 귀를 베일까봐 미리 투구를 쓰고 온 병사들

더블린의 아일랜드 국립 미술관이 소장한 또 다른 명작 <그리스도의 체포>와 더불어 풍운아였던 카라바조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이다. 두 그림과 더불어 바흐의 <마태 수난곡> 가운데 베이스의 아리아 ‘나의 예수님을 돌려주시오Gebt mir meinen Jesum wieder’를 불러본다.

베이스 독창이 달린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 <장엄미사>의 선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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