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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Feb 14. 2019

아피아 가도에선 모두 스파르타쿠스

레스피기의 삼부작

내가 우리가 되고 우리가 내가 되는 로마의 마지막 날


볼로냐 태생의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1879-1936)는 바이올린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그는 1900년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 오페라 극장 수석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이미 러시아는 18세기부터 많은 이탈리아 음악가들의 활동 무대였다. 그는 이곳에서 음악원 교수이자 관현악법의 대가였던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만난다.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운 다섯 달이 레스피기의 작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레스피기는 고국으로 돌아와 1917년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이때 발표한 <로마의 분수>로 일약 주목받는다. 이 멋진 아이디어는 1924년 <로마의 소나무>로 이어졌고, 1928년 <로마의 축제>로 완결되었다.


첫 곡인 교향시 <로마의 분수Las fuentes de Roma>는 아래와 같은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새벽녘 줄리아 골짜기의 분수La fontana di Valle Giulia all'Alba (0:24)

2. 아침의 트리톤 분수La fontana del Tritone al mattino (4:48)

3. 한낮의 트레비 분수La fontana di Trevi al meriggio (7:23)

4. 황혼 녘 메디치 빌라의 분수La fontana di Villa Medici al tramonto (11:00)


첫 곡을 레스피기는 “줄리아 골짜기에 있는 분수에서 본 전원의 풍경과 먼동이 틀 무렵 로마의 상쾌한 아침 그리고 안개 낀 벌판을 가는 양 떼를 그렸다”라고 설명했다. 줄리아 골짜기는 보르게세 공원 바로 옆, 현재 국립 현대 미술관 부근이다.

아쿠아맨, 수중의 왕자

두 번째, 아침의 트리톤 분수는 바르베리니 광장에 있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유명한 조각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로 소라고둥을 부는 트리톤, 그리고 그를 따라는 물의 요정 나야드와 님프들의 모습을 음악으로 그렸다.

할아버지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세 번째, 한낮의 트레비 분수. 뒤돌아서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설이 전하는 명소이다. 사이렌과 트리톤을 거느리고 빛나는 바다를 지나는 포세이돈의 행렬이 장관이다.

이야기는 산으로 가고... 이분은 대마왕 같기도?
트리톤을 태운 돌고래의 이름은 찡
바다의 왕자 마린 보이와 트리톤이 타던 고래를 디즈니는 레스피기의 음악과 더불어 하늘로 날려보낸다

마지막은 황혼 녘 메디치 빌라의 분수이다. 보르게세 빌라에 접한 메디치 빌라에 해가 지고, 종소리, 새소리, 산들바람이 눈과 귀를 황홀하게 한다.


림스키코르사코프로부터 관현악을 배운 레스피기니만큼 이 곡의 오케스트레이션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관악기와 현악기 외에도 트라이앵글과 글로켄슈필, 종, 오르간과 피아노, 첼레스타, 두 대의 하프가 동원되는 대곡이다.


레스피기는 이어지는 <로마의 소나무>로 원숙함을 더했다. 이번에도 보르게세 장원에서 시작하지만, 나머지 세 곡은 좀 더 변두리로 나간다. 지하묘지인 카타콤이 밀집한 지역은 로마 남쪽이고, 그 가운데 아피아 가도가 지나가는 길에 성 세바스티안이 순교한 곳과 그의 이름을 딴 카타콤이 있다.

산 세바스티아노 대문, 아피아 가도가 시작되는 곳이다

1. 보르게세 장원의 소나무I pini di Villa Borghese (0:17)

2. 카타콤의 소나무Pini presso una catacomba (2:52)

3. 자니콜로의 소나무I pini del Gianicolo (10:08)

4.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I pini della via Appia (17:35)


자니콜로는 로마 서남쪽에 있는 언덕이다.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가리발디 장군의 동상이 내려다보는 곳에서 레스피기는 새소리를 관현악에 포함시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나는 리카르도 샤이가 베를린 발트뷔네에서 이 곡을 연주했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발트뷔네의 새들은 이 곡이 아니더라도 늘 음악에 화답한다.


끝으로 아피아 가도에서는 다시금 이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스파르타쿠스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은, 아직까지 전하는 그의 이름이 증명한다.

표도르 브론니코프가 그린 <고대 로마의 처형장. 십자가형에 처해진 노예들>

내친김에 레스피기 로마 3부작의 마지막 곡 <로마의 축제Feste romane>까지 들어보자. 앞선 두 곡은 레스피기가 몸담았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가 초연했지만, 이 곡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하모닉과 처음 연주했다. 다른 곡들에 비해 연주가 많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그 제목이 더욱 생소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1. 치르첸세스Circenses

2. 희년Giubileo

3. 시월제L’Ottobrata

4. 주현절La Befana


첫 곡 ‘치르첸세스’는 서커스의 어원을 보여준다. 바로 원형(Circle) 경기장에서 벌어진 향락과 학살을 회고하는 음악이다. 그 가장 생생한 현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현대 이탈리아 말로는 ‘치르코 마시모’이다)는 콜로세움 조금 남쪽에 있다. 영화 <벤허>나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전차 경주나 검투 장면이 바로 이런 곳에서 열린 행사이다. 대형 경기장을 좀 더 스펙터클한 공간으로 만든 것이 콜로세움이랄까? 레스피기의 무시무시한 관현악이 2천 년 시간을 넘어서게 한다.

치르코 마시모
아피아 가도에 있는 막센티우스의 전차 경기장

두 번째 ‘희년禧年’은 가톨릭 교회가 매 50년마다 경축했던 축제를 말한다. 가까이 서기 1950년, 2000년이 희년이었고, 다음 희년은 2050년인 셈이다. 레스피기는 이 곡의 공간적인 배경을 바티칸이 내려다 보이는 로마 북쪽의 마리오 산(Monte Mario)으로 정했다. 50년 만에 찾아오는 이 해에 속죄를 위해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들이 마리오 산에 이르러 로마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숨을 돌리는 모습인 것이다. 순례자의 행렬 가운데 본명이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인 바그너의 음유시인 탄호이저도 있었을까?


세 번째 ‘시월제’는 오늘날 뮌헨의 옥토버페스트로 가장 유명하다. 추수의 풍요로움을 즐기고 하늘에 감사하는 축제는 동서고금에 공통적인 축제이다. 호른은 사냥을, 만돌린은 사랑의 세레나데를 상징한다.


마지막 ‘주현절’은 1월 6일이다. 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를 맞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임과 동시에 수난절을 앞두고 마음껏 즐기는 카니발(사육제)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레스피기의 주현절 축제는 나보나 광장에서 열린다. 역시 베르니니의 4대 강 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i)가 있는 곳이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가운데 두고 아프리카의 나일강과 유럽의 도나우강, 인도의 갠지스강, 아메리카의 라플라타강이 발원하는 모습을 세긴 것이다.

로마의 카니발은 베를리오즈의 <벤베누토 첼리니>에도 묘사되지만,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가운데 괴도 루이지 밤파가 활약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밤파는 백작을 위해 파리에서 놀러온 귀공자를 납치한다. 그가 바로 백작의 옛 연인 메르세데스의 아들이다. 레스피기의 사육제를 들을 때는 정신을 소매치기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직 판테온, 라테란과 성 바오로 성당,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 등 음악을 기다리는 곳이 많지만 잠시 로마를 떠나려 한다. 피렌체가 빨리 오라 손짓하기 때문이다. 다음 음악을 들을 때까지, 로마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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